>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희준크의 눈] 이회창과 수양대군
 
공희준 Soccer Jockey   기사입력  2002/08/26 [16:04]
{IMAGE2_LEFT}조선 제7대 임금인 세조로 알려진 수양대군은 한국사를 통틀어 정통성 없는 군주의 표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수양대군의 아버지 세종은 수양의 야망과 권력욕을 익히 간파하고 있었기에 임종을 얼마 남겨주지 않고 김종서 등의 무인과 황보인 같은 문신들에게 병약한 큰아들 문종과 문종의 핏줄인 손자 단종을 충심으로 보살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

김현철-김홍업의 예에서 보듯 권력자의 아들 때문에 역사의 흐름이 뒤틀리는 데에는 고금의 차이가 없다. 형 문종이 붕어하기가 바쁘게 수양대군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와 같은 원로대신은 물론 친동생인 안평대군까지 제거하고 왕권을 찬탈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정인지·신숙주 등은 선왕들의 유지를 배반하고 찬탈자인 수양대군의 편에 빌붙어 요즘말로 치자면 정치 자영업자로 변신하여 선비의 명예를 더럽히고 부귀영화를 누림으로써 만고역적의 기회주의자란 오명이 후세에 두고두고 찍히게 된다. 수양대군의 권력장악을 보필한 한명회와 권람을 비롯한 모리배와 간신배들이 부패한 특권층인 훈구대신으로 승승장구하면서 청신한 기운이 감돌던 조선왕조는 차츰차츰 무사안일과 정체상태에 빠지기 시작하고, 왜란과 호란의 비극을 대책 없이 맞이해야 하는 무기력한 정치체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집 창 밖을 내려다보면 수양대군의 무도하고 패덕한 정권찬탈에 반대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은 사육신묘가 눈에 들어온다. 의기와 충의를 선양한 충신들의 위업을 후대에 기리기 위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조성한 묘역이건만 지금은 강 쪽으로는 아파트로 가로막히고, 길 건너 뒤편으로는 고시학원에 갑갑하게 둘러싸여 있다. 자그마한 자투리땅이라도 쪼개어 기어이 아파트를 지어 이익을 챙기는 얄팍한 물욕과, 안정된 직장을 얻겠다는 목적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 없는 젊은이들이 부지런히 영어단어를 외우고 행정법 예상문제를 푸는 현재의 광경을 목도하고 지하에 묻혀 있는 사육신들이 어떤 감회를 피력할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어려서 읽었던 사육신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 중에 유달리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 고루하고 답답하고 비합리적인 봉건적 충성심으로 폄하할 수만은 없는 선비의 자존심과 사내 대장부의 기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아니, 자존심과 배짱이라고 뭉뚱그려 묘사하기보다는 검은 것을 검다 하고 흰 것을 희다 한 시민적 상식의 선구적 원형이라 칭하는 것이 차라리 진실에 가깝다고 하겠다. 검을 것을 검다 지적하지 않고 혹세무민하는 언론과, 흰 것을 희다고 밝히지 않고 곡학아세하는 지식 자영업자들이 진실을 농하고 진리를 폐하기에 55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박제된 역사의 한 토막으로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했던 김질의 고변으로 거사가 좌절된 후 궁궐로 끌려온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의 사육신들은 살이 으스러지고 뼈가 깨지는 모진 고문을 받게 된다.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은 이들에게 간담이 서늘하진 수양대군은 감언이설로 사육신을 달래보려 잔꾀를 부리지만 사육신 중 누구도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사선을 넘는 길을 감연히 선택한다.

사육신들은 친국하는 수양대군을 부를 때 '전하'란 존칭 대신 '나리'란 호칭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창칼을 앞세워 권력을 찬탈한 정당성 없는 권력자를 결코 군주나 임금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상징적 표현이었을 게다.

정통성이 결여된 정치권력과 자격 없는 통치자는 당대의 전횡과 위세를 부릴 수는 있을 망정 결코 난세를 치세로 바꾸지는 못한다. 박정희로부터 출발하여 전두환을 거쳐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민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들을 무도하고 독재적인 권력자로 간주했을 망정 진정한 의미의 정통성 있는 합법적 통치권자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국민의 자발적 동의와 승복을 획득하지 못한 집단과 인물이 정치권력을 손에 쥐는 것은 엄청난 역사적 비극과 나라의 불행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3당 합당의 태생적 한계와 DJP 연합의 원초적 굴레를 떠 안고 출범했을지언정 YS-DJ로 이어지는 10여 년의 기간은 정권에 대한 지지와 반대 여부를 떠나 국민이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 자체만큼은 인정하고 동의하는 시기였다. 친인척 비리와 홍삼 게이트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김대중 정권조차 정통성과 정당성 시비로부터는 자유로웠다. 맹목적 반DJ 정서로 똘똘 뭉친 영남지역에서도 DJ의 대통령 자격에 하자를 제기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곡절과 파란 끝에 이제야 겨우 최소한의 절차적 민주주의의 시늉이라도 내려 할 찰나, 우리는 정통성과 정당성 시비에 휩싸여 집권기간 내내 파행과 혼란으로 점철되어 비참한 말로를 걷게 될 또 다른 정치권력의 등장을 목격할 지도 모를 위험한 고비에 처해 있다.

{IMAGE1_RIGHT}두 아들의 병역면제의혹을 둘러싼 진실이 여전히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존재와 행보는 사회안정과 정치발전을 열망하는 이들의 심기를 심히 불편하게 만든다. 명목상의 국민개병제가 시행되고 있으며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60만 명이나 되는 국민의 자제들이 북한군과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 대치하는 국가에서 대통령의 아들 모두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병역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논란에 휩싸인다면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평소부터 양심적 병역거부를 옹호하고 군비축소와 평화체제 정착을 시종일과 주창해온 정치인이라면 최소한의 일관성이라도 찾아볼 수 있겠다. 그러나 그는 한나라당의 당권을 잡은 이후 줄곧 북한과의 일전을 불사할 듯한 강경한 대북 정책기조를 견지해왔다. 게다가 철통같은 안보태세 확립을 요구하는 노년층의 목소리에 편승해 지지율을 유지해온 터다. 극우논객 지만원씨마저 가족의 병역의무를 정상적으로 마쳐야만 국군 통수권자로서의 영(令)이 선다고, 그것도 한국논단이라는 희한하고 야릇한 잡지를 통해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네티즌들에 의해 한나라당에 비교적 우호적인 방송매체로 분류되는 KBS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면제 처리과정에서 부당하고 불법적인 방법이 동원됐을 것이라는 대답이 응답자의 압도적 다수를 점했다. 부유층과 특권층의 병역의무 회피가 관행처럼 굳어진 상황에서 우리사회의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이회창씨로서는 이 부분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 있어야 하겠다. 가신 몇 명을 방패삼아, 자기당 의원들을 홍위병으로 앞세워 공작정치 운운하며 한가롭게 정면돌파를 부르짖을 계제가 아니다.

의혹의 당사자인 두 아들과 부인 한인옥씨는 말이 없다. 이들 대역으로 이회창 지키기에 나선 이후보 측근 정치인들이 펼치는 막무가내식의 구태의연한 고답적 정치행태는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어 저렇게 극단적으로 과민 반응하는 게 아니냐는 세간의 의심만을 더욱 증폭시킬 뿐이다.

이회창 후보가 현대판 한명회와 유자광을 자임하고 있는 거대신문회사들의 힘을 빌려 수양대군처럼 설령 정권창출에 성공한다 해도 병역면제 의혹의 진실이 명료하게 가려지지 않는다면 이회창씨가 과연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 심각한 회의 분위기가 시민들 사이에 조만간 감돌 것으로 우려된다. 이는 곧 한나라당 정권의 정통성과 정당성 자체에 대한 국민적 문제제기로 비화될 것이 불을 보듯 훤하다.

자격시비에 휘말린 정통성 없는 정치권력은 스스로의 몰락은 물론 나라와 겨레를 파국으로 몰고 가기 십상이다. 동시에 역사적 평가에서도 영원히 음지의 독버섯처럼 홀대받기 쉽다.

이회창 대통령 후보께서는 두 아들의 병역면제 의혹에 관한 분명한 진실을 밝히는데 전향적이고 전폭적으로 협조해 주시기 바란다. 구렁이 담 넘듯 어물쩍 넘어가려는 모호하고 무책임한 작금의 대응자세로는 그가 설혹 집권에 성공한다 해도 우리 국민들의 마음 속과 역사 앞에서 그는 수양대군처럼 일개 '나리'로 자리잡을 것이다. 사육신과 같은 기개를 갖지 못한 범부인 나 역시 비록 면전에서는 전하라 부르며 무릎을 꿇을 테지만, 등을 돌리고 이회창씨의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를 '나리'라 부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게다.

아직 권좌에 오르지 못해 기실 전하가 아닌 '나리'로 머무르고 있는 이 순간에도 혹여 자신이 수양대군 같은 부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회창 후보는 겸허히 자성할 필요가 있다. 채 정권도 잡기 전에 민정계와 거대신문회사를 위시한 무수한 간악한 무리들이 훈구파들처럼 호가호위하며 일찌감치 이회창씨 주변에 너무나 많이 포진한 탓이다.

* 필자는 [우리들의 비밀암호 : 노무현을 부탁해] (도서출판 시와사회, 2002)의 저자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2/08/26 [16:04]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