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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자전거와 이회창의 사이클
정몽준의 모터사이클과 이인제의 세발자전거ba.info/css.html'>
 
공희준 Soccer Jockey   기사입력  2002/08/12 [22:01]
{IMAGE2_LEFT}제본이 마무리되고 내가 지은 책 '노무현을 부탁해'가 내 손에 쥐어졌을 때 형용하기 난감한 착잡한 감정의 무게에 몸의 중심이 기우뚱거렸다. 제본소에 다니며 나를 공부시켰던 어머니 생각이 슬금슬금 올라왔기 때문이다. 진정한 해방세상은 활자공이 자신이 조판한 책의 내용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에 도래한다는 그람시의 언명이 맥락에 어울리지 않게 주책없이 연상된 탓인지도 모르겠다. 제본공장 아줌마의 막내아들이 장성해 책을 펴냈다는 알레고리도 관계의 의미를 무리하게 끼워 맞춰 해방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이런 해방은 너무나 더디게 날아온 미네르바의 올빼미에 불과할 게다.

노무현 관련서적의 끝자락에 내 책을 보태며 이 책이 혹 미네르바의 올빼미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지 몹시 걱정스럽다. 물론 이런 걱정의 태반은 책 판매가 부진해 말라비틀어진 내 지갑의 주름살이 펴지지 못할까 하는 조바심에 기인한 것이다. 그에 못지 않게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노무현의 낙마와 좌절이 한국정치에 만연된 불신과 냉소를 치유불능의 중증상태로 완전히 고착화하리라는 근거 있는 전망이다.

200만 명이 참여한 국민경선에서 선출된 후보자마저 여론조사의 부침에 따라 트랙 밖으로 밀려난다면 한국정치는 문자 그대로 정치 자영업자들의 담합과 불공정 경쟁이 판치는 거대한 아수라장으로 화할 것이 명확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과, 일인을 위한 만인의 굴복과, 만인을 위한 일인의 억울한 희생이 수시로 자행되는 복마전과 진배없는 정치판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제본소 노동자로 일하던 어머니는 종종 제본이 잘못되거나 낙장이 된 책들을 집으로 가져왔다. 덕분에 우리 집의 삐걱거리는 낡은 책장에는 가정경제수준과는 터무니없이 어울리지 않게 많은 책들이 끼워져 있었다. 소장된 장서만을 놓고 본다면 여느 대학교수 부럽지 않은 호사였다. 유감스럽게도 그 책들은 사람의 손때를 거의 타지 않고 고물장수가 주는 강냉이 몇 바가지와 수시로 맞바꿔지곤 했다. 그 책들의 서문이라도 한 번씩 훑었더라면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려한 문장과 명민한 내용의 글들을 쓸 수 있었으리라는 때늦은 후회가 든다. 역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골목에서 놀던 철수와 영희가 제 집으로 사라지는 저녁 무렵이 돼서야 나타나는 모양이다.

노무현에 대한 나의 과도한 감정이입은 구질구질한 변두리 태생들 사이의 희미한 연대의식에 바탕한 것임을 인정하겠다. 그 희미한 연대의식이 자본의 이익을 수호하고자 총단결한 재벌회장들의 이익공동체와 제 아이들은 반드시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강철대오로 결속한 강남 학부모들의 신성동맹보다 공고한 것인지 나는 자신하지 못한다. 책제목을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향한 오마주의 의미가 담긴 '우리들의 비밀암호 : 노무현을 부탁해'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나와 출판사 사장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본문 중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축구 이야기로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이 매출과 마케팅에 훨씬 유리할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재삼재사 마음을 독하게 다져야 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노무현의 수호천사로 나서게 하였을까? 그것은 바로 본류(本流)를 견지해야 한다는 본능적 의무감이었다. 한국사회의 본류와 주류는 한끗 차이임에도 본질적으로 정반대의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소수의 주류가 무한대의 특권과 증발된 책임의식을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우고 있다면, 다수자인 본류는 소리 없이 땀흘리며 한국 사회가 이만큼 성장하고 성숙하는데 이바지해온 일개미 같은 존재들이다. 주류들이 대단히 쿨하고 댄디한 레테르를 달고 있는 반면 본류들은 일상의 구질구질함을 꼬리표로 붙이고 있다. 물리적 숫자는 본류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정관재계와 언론 등 알토란같은 권력의 포스트는 주류들이 모조리 독식하고 있는 현실은 주류와 본류의 관계를 한층 불합리한 성격으로 변질시킨다.

{IMAGE1_RIGHT}주류와 본류가 격돌하는 게임의 규칙은 앞서 언급한 불공정이라는 단 한 마디로 요약된다. 노무현과 이회창의 레이스를 천착하며 나는 초등학교 시절 읽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김신의 '대학별곡'에 수록된 자전거 경주 장면을 흐릿하게나마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자전거 경주대회가 열렸다. 결승에서 두 사람이 맞닥뜨렸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청년은 쌀가게에서 빌려온 짐자전거를 몰고 경기에 나섰다. 부잣집 아들인 또 다른 학생은 매끈한 경주용 자전거를 타고 스타트 라인에 섰다. 출발신호가 울리고 짐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은 출발선을 떠났다. 이 경쟁은 애초부터 불평등하지만 소설의 결말답게 짐자전거를 끌고 나온 청년이 가열찬 헝그리 정신을 발휘해 경주용 자전거를 제치고 먼저 결승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현실의 스토리는 소설과 판이하다. 아무리 페달을 열심히 밟아도 속도를 내기 힘든 짐자전거와 기어까지 장착된 사이클이 원천적으로 경쟁이 될 리 없다. 그래도 많은 국민들이 짐자전거를 열심히 응원할 당시만 해도 짐자전거는 사이클을 앞섰다. 그러다 심판인 언론이 짐자전거는 짐을 실어야 한다며 자전거 뒷좌석에 무거운 모래주머니를 올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짐자전거의 속도는 느려질 수밖에 없다. 경기의 불공정성을 지적해야 할 지식인들은 애써 이 사실을 외면하고 숨을 헐떡이며 짐자전거를 모는 노무현을 되려 손가락질하기 바쁘다. 노무현 편이어야 할 사람들까지 나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자전거 바퀴에 오히려 구멍까지 뚫었다. 경주가 종료되지 않은 레이스 도중임에도 사이클에 역전 당했다고 해서 평생 짐자전거를 타야 하는 국민들이 외려 사이클 선수에게 판돈을 건다. 이제는 아예 짐자전거는 경주에서 빠지라고 한다. 대신 어디서 나타났는지 현대에서 제작한 신형 모터사이클에 탑승하고 레이스 중간에 등장한 선수를 열광적으로 성원한다. 경주의 룰과 규칙은 이미 실종된 지 오래고 경기장은 완전 난장판이 되었다. 상대방 바퀴의 바람을 빼든, 경쟁 선수에게 돌팔매질을 하든, 자전거 대신 폭주족들이나 몸 직한 오토바이를 타든 무조건 이기면 장땡이라는 식이다.

거대신문회사와 정치 자영업자들의 반칙이 횡행하지 않는 깨끗한 승부가 이루어진다면 나는 노무현이 이길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설령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혼자만 유유히 탑승 가능한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사이클보다는 힘없고 고단한 사람을 뒷좌석에 태우고 구불구불 앞으로 나아가는 짐자전거를 노무현이 계속 몰기를 바란다.

선수와 관중과 심판이 뒤엉켜 아비규환을 이루는 경기장을 향해 휘슬을 불고 싶다. 내 책이 호루라기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그를 지지하든 안 하든 노무현에게도 이회창과 동등한 경쟁의 기회를 보장해야 마땅하다. 그가 이회창처럼 날래고 비싼 사이클을 이용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다만, 불편부당한 심판 노릇을 포기하고 일방적이고 노골적으로 한나라당을 두둔해온 거대신문회사는 제 본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자기 편 타이어에 못으로 펑크를 내는 동교동계와 중도개혁포럼은 정치판에서 깨끗이 퇴출돼야 한다. 정몽준은 나 홀로 오토바이를 몰겠다고 떼쓰지 말고 자전거 경주의 규정을 준수해야 한다. 민주당이든 신당이든 현대그룹이 급조한 정당이 아니라면 그 역시 다른 후보들처럼 국민경선을 통해 철저히 검증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실체가 공개되는 것이 두려워 추대를 고집한다면 이는 초등학생 반장 선거에도 없는 추태에 다름 아니다.

이인제에 대한 언급으로 글을 마치겠다. 노무현과 이회창, 정몽준 세 명 모두 바퀴 두 개 달린 운반수단을 선택해 경주에 출전했다. 이인제는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는 민주정치의 구구단을 충분히 깨칠 때까지 당분간 세발자전거를 타야 할 것 같다. 애들은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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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8/12 [22:0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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