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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와 히틀러, 노들섬의 이명박시장
[비나리의 초록공명] 최고급 오페라하우스는 누구를 위해 지을 것인가?
 
우석훈   기사입력  2005/10/14 [19:01]
리차드 바그너라고 이름 붙여진 독일 오페라계의 거성이 한 명 있다.
 
어찌나 유명하던지 바그너의 오페라에 노래부르는 가수들은 바그너 가수라고, 창법과 노래를 소화하는 방법을 달리해서 별도로 분리하고도 한다.
 
탄호이저 서곡은 나도 좋아한다.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헬리콥터에서 베트남 마을에 기관총을 난사할 때 나왔던 발키리도 좋아한다.
 
그러나 바그너의 음악이 좋다고 얘기하는 것은 지식인들에게는 일종의 금기처럼 되어있다. 그래서 바그너에 대해서 평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바그너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와 같이 등장한다.

첫 번째 남자는 바그너의 이탈리아판이라고 할 수 있는 베르디이다. 막 민족국가로 성립하던 시절의 게르만의 기상을 최대한 음악 언어로 소화하였던 사람이 바그너라면, 이걸 이탈리아 민족 버전으로 했던 사람이 베르디라고 보면 대개 틀리지 않다. 그에 비하여 똑같이 우울한 젊음을 보낸 사람으로 브라함스가 있는데, 바그너는 당대에 브라함스에 비하여 자신이 평가절하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속상해 했다고 한다.
 
두 번째 남자와 한 명의 여자는 니체와 루이 살로메이다.
 
살로메라는 여자는 근대 유럽사에서 빼놓고 가기에 어려울 정도로 신비스러운 여인인데, 프랑스 계열이고 러시아에서 귀족 교육을 받았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루이 살로메와 죠르쥬 상드가 신여성을 대표하던 당시의 여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살로메한테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바쳤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그랬다.
 
스물 한 살 때, 그토록 구하려고 해도 구할 수 없던 살로메 사진이 피가로 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을 보고 완전히 경악했던 적이 있었다.
 
이 꽃마차 사진에서 마차 앞을 끌던 사람이 하이네 마리아 릴케, 바로 그 릴케이고, 뒤에서 마차를 밀던 사람이 니체와 프로이드였다. 그리고 살로메가 화려한 귀족풍의 옷을 입고 마차에 타고 있었다. 릴케는 사랑이 깊어 일찍 죽고, 프로이드는 살로메와의 오래된 편지 연애를 하면서 살로메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의사 프로이드를 그만두고 사회학 분석으로, 흔히 제 2 프로이드로 넘어간다.
 
그리고 대학 시절 단 한 번 육체관계를 가졌다는 공식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던, 제정신과 정신분열을 오가면서 살았던 니체에게 아마도 사랑은 살로메였다고 하는 것이 대체적인 해석이다.
 
살로메는 바그너를 좋아했다고 한다. 약간 경박스럽게 니체가 바그너에게 가지고 있는 시대에 앞선 적대감은 이 살로메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왜냐하면 후대에 바그너가 끼친 독일 제3제국에 대한 영향은 바그너가 살아있을 때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1848년 혁명에 참가한 뒤 이 실패한 혁명의 여파로 바그너도 망명생활을 한다. 그리고는 대단히 염세적인 삶을 사는데, 말년에 바그너의 악극들은 대단히 성공하였고, 트리스탄과 이졸데 시절 - 아주 야한 오페라이다 - 민중들이 앉아서 듣던 자리를 결국은 게르만의 귀족들이 채우게 되면서 니체와 바그너의 사이가 멀어지고, 결국에는 Anti-Wagner라는 니체의 주요 저서 중에 들어가는 책을 쓰게 된다.
 
니체를 포함한 바그너에 대해서 적대적인 감정을 가졌던 사람들이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 가장 싫어했던 작품이 바로 "니벨룽겐의 반지"이다. 
 
▲니베룽의 반지 중 발퀴레 장면     ©인터넷 이미지
 
바그너한테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한 가지가 게르만주의이고 또 다른 한 가지가 반유태인주의이다.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 반유태인을 가장 노골적으로 나타낸 작품이 바로 이 니벨룽겐의 반지이다. 니벨룽이라는 민족은 당시 무대에서 오페라를 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이게 유태인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작품이다.
 
그래서 보통 니벨룽겐의 반지는 유럽의 전통 신화임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소수 민족 혹은 화석 민족이나 소수자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좀 조심스럽게 평가하게 되는 작품이다.
 
니체는 바그너의 작품이 민중들로부터 멀어지면서 게르만의 귀족들의 전유물이 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게다가 이게 민족의 화려함으로 치장하게 되면서 바그너와는 철학적으로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
 
한참 바그너가 음악적으로 유명할 때 니체는 어느 연주회에서 "나는 매일밤 계속되는 이 연주회가 두렵다"라고 얘기하였다.
 
물론 니체 그 자신도 자신의 동생이 철학적으로 너무 과소평가되는 것을 안타까와한 그의 누이들이 수고집을 "권력에의 의지"라는 제목으로 발간하게 되면서, 제 3제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받기도 한다. 이러한 누명이 벗겨진 것은 60년대 이후 프랑스에서 니체 선풍이 불면서 니체를 맑스와 프로이드 사이에 있던 철학자로 해석하면서 다르게 해석이 되기 시작하였다.

바그너를 불행하게 만든 세 번째 남자가 바로 히틀러이다. 젊은 시절에 바그너의 무대에서 바그너에게 완전히 반한 이 사나이가 권좌에 올랐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바그너의 유족들에게 국가의 예의를 갖추고 자신이 후견자가 된 사실이다.
 
빼도박도 못하게 이 때부터 바그너는 게르만 제일주의와 반유태인주의의 상징 중의 상징이 되었고, 제 3제국의 그야말로 아이콘이 되었다. 물론 바그너가 죽은 다음에 벌어진 일이므로, 음악적으로 바그너는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고 변명하거나 자신의 미학을 말로 펼칠 기회 자체가 박탈당한 상태였다. 그야말로 죽은 자는 말이없다.
 
바그너에 대해서 평가하는 일은 이러한 히틀러와의 관계, 그리고 열풍의 2차 세계대전과 유태인 학살 등의 문제로 언제나 불편한 일이다. 바그너 음반을 사거나 심지어는 노래를 들을 때에도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니벨룽겐의 반지가 국내 초연이라고 흥분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저들이 과연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가 어떠한 시대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들섬으로 이제는 대충 입지결정이 끝나가는 서울시의 오페라 하우스 얘기를 보면서 니체가 바그너에 대해서 했던 얘기들이 생각난다. 니체는 바그너가 조금 더 민중들과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함께 하기를 바랬는데, 독일에서의 오페라는 서울에서의 오페라와 시대적 맥락에서는 좀 많이 다른 것 같다.
 
독일어와 게르만 그리고 민족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 빠트리고 갈 수 없는 사람이 두 사람 있다. 칼빈과 괴테라는 사람이다. 이 때에는 라틴어로부터 독일어를 만들자는 것 자체가 진보이고 혁명이었던 시절이다.
 
독일어는 안된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서 괴테는 “사랑을 이야기하기 가장 아름다운 말은 Ich liebe dich라는 말이다”라고 역설했다.
 
서울시민은 오페라 하우스 같은 고급스러운 문화를 원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자꾸 나는 히틀러의 제 3제국이 바그너를 찬양하던 시절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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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0/14 [19:0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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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풀뿌리 2005/10/16 [22:06] 수정 | 삭제
  • 이번 청계천 물맞이 광고에 30억 들었다고 한다. 수 천억을 들여서 만든 것 까지는 몰라도 그 선전에 수십억원을 들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시민의 세금으로 한 일을 자신의 업적으로 선전해서 더 큰 제 욕심을 채우려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이를 대통령에 앉혀 놓으면 또 제멋대로 세금을 써버릴 것이다. 한푼이라도 세금을 알뜰하게 쓰는 자가 진짜 나라 살림꾼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국민은 제 세금으로 선전하는 것에 속아 이명박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