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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준크의 눈] 설렁탕의 정치학
김영배와 자존심
 
공희준 Soccer Jockey   기사입력  2002/08/10 [03:10]
{IMAGE1_LEFT}설렁탕의 기원은 옛날 임금이 동대문 밖에 선농단(先農壇)을 쌓아 놓고 인간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는 전설 속의 인물인 신농씨(神農氏)에게 제를 올린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던 주된 음식이 선농탕이었는데 후세로 내려오며 차츰차츰 발음이 변하더니 현재와 같은 설렁탕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설렁탕의 탄생에 관한 여러 가지 이설이 있지만 내가 음식문화 전문 연구자는 아니므로 이만 줄이고자 한다. 더 자세한 내력과 상세한 정보를 알고 계신 강호제현의 보충설명을 기대하겠다.

설렁탕의 주된 재료는 소(牛)다. 국물은 사골에서 우러나고 건더기는 살코기에서 건져낸다. 농경문화에서 소는 고기와 노동력을 동시에 제공하는 귀중한 짐승이었다. 그만큼 여간해서는 쉽게 음식상에 오르기 어려웠으니 많은 이들이 쇠고기 맛을 볼 수 있는 비결은 큰 가마솥에 물을 가득 채우고 소뼈를 국물이 뽀얗게 될 때까지 팔팔 끓여 내여 여러 사람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국물에 고기 몇 점을 집어넣고 밥을 말아먹으면 깍두기나 김치를 제외하고 특별한 반찬 없이 한 끼 배불리 요기할 수 있는 설렁탕은 짧은 점심시간 동안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기 일쑤인 요즘 직장인들에게도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예전에 일을 하다가 야식까지 포함해서 사흘 동안 12끼를 줄창 설렁탕으로 계속 해결한 적이 있었다. 끝물에 가서 속이 메스꺼울 만큼 물리기는 했지만 추운 엄동설한에 고뿔 걸리지 않고 끄떡없이 버틴 것을 보면 영양가 측면에서 설렁탕은 탁월한 음식임에 틀림없다. 간혹 양심불량의 음식점 주인들이 국물이 진하게 보이도록 사골국물에 우유를 섞어 탄다는 괴소문도 종종 들리지만 낯선 타지에 가서도 입짧은 사람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먹거리가 설렁탕이다.

민주당 김영배 상임고문이 노무현 후보로부터 설렁탕 한 그릇 얻어먹지 못했다고 푸념한 것이 정가의 화제가 되고 있다. 시사평론가 진중권은 설렁탕이 먹고 싶거들랑 노후보 대신 왜 진작 자기에게 연락하지 않았냐며 김고문의 생뚱맞고 썰렁한 발언을 신랄히 질타했다. 대학 구내식당에서 판매하는 2000원짜리 설렁탕에서 유명 한정식집에서 파는 기만원짜리에 이르기까지 설렁탕의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보통 일반 음식점에서의 설렁탕 가격은 대략 4~5000원 사이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픈 야당 생활을 오래 거쳤다 해도 현역 의원인 김영배 고문이 진짜로 설렁탕 사먹을 돈이 없어 이런 하소연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김영배 고문의 설렁탕 타령은 기존 한국정치를 움직여왔던 고전적인 메커니즘을 꿰뚫어볼 수 있는 중요한 언급이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을 불문하고 거대 제도권 정당의 구조는 자판기와 같다. 동전을 넣지 않으면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백만 당원을 자랑하지만 이들은 당비는커녕 식사시간만 되면 어영부영 나타나는 속칭 '빈대'와 유사한 존재들이다. 자발적으로 결속한 당원들이 당을 떠받치는 정상적 의미의 근대 민주주의 정당이 아니라 당이 당원들을 먹여 살리는 의사(Pseudo) 동원정당, 사이비 대중정당인 것이다.

{IMAGE2_RIGHT}중앙당 차원이건 말단 지구당 단위이건 한국정치의 작동방식은 별반 차이가 없다. 지구당 위원장이 식사자리에 나타나는 당원들에게 설렁탕이라도 한 그릇 사줘야 지역의 조직을 움직이는 조직책들에게 말발이 통하듯, 정당의 영수는 중앙당을 수시로 들락거리는 측근과 가신들에게 국영기업체 감사직이나 관변단체 이사 자리라도 하나 챙겨줘야 계보를 통솔할 영(令)이 서기 마련이다. 민정계나 동교동계, 민주계나 이회창을 둘러싼 친위세력 역시 이러한 법칙으로부터 예외가 아니다. 정견과 이념과는 무관하게 계파 보스와 제왕적 총재 밑에 이권과 먹을 것을 찾아 하이에나 떼처럼 모여든 것이 우리 정치인들의 한심한 실상이다.

지역구도에 근거한 3김식 정치 패러다임을 고려한다면 노무현 후보를 향해 던진 김영배 고문의 직격탄은 이유 있는 항변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단, 현재와 같은 고비용 저효율의 구태의연한 비생산적·비민주적 정치패러다임의 고수를 바란다는 단서가 붙는 한에서만 김고문의 주장은 정당하다.

홈페이지 접속이 수월치 않을 정도로 김영배 고문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음에도 정치권 안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그의 의견에 내심 동조하는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민의(?)를 수렴하는 순간 정치개혁의 희망은 영원히 물 건너간다는 점에 있다.

민주당 당직자들은 노무현씨가 대통령 후보에 당선된 직후 중앙당에 찾아와 활동비를 달라고 얘기하자 어안이 벙벙해졌다고 한다. 학수고대했던 금일봉 대신 노부호의 텅 빈 지갑만 실컷 구경했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이었을 게다.

3김씨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조직운영 방식은 대동소이하다. 우선, 대규모 정치헌금을 제공할 여력이 있는 인사들을 공천하거나 측근요직에 중용한다. 이들로부터 수금되는 뭉칫돈을 자잘하게 나누어 현역 의원들과 지구당 위원장, 그리고 중하위 당직자들에게 배분한다. 오야붕으로부터 종자돈을 하사 받은 꼬붕들은 다시금 제각기 흩어져 나름대로 관리하는 중소규모 물주에게서 뿜빠이한 것을 지방의원들과 지구당 조직책, 그리고 일반 당원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세포 수준에서 보스의 영업방식을 대량으로 복제·유포하는 것이다.

물론, 재력가들이 3김씨와 이회창씨 같은 제왕적 총재를 진실로 존경하거니 지지해서 상도동을 부양하고 동교동을 먹여 살리며 민정계의 봉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궁극적 노림수는 막대한 이권이 걸린 국가 프로젝트와 지역개발 사업의 수주다. 비교적 헐거운 먹이사슬의 일부분이 폭로돼 물의를 빚게 되는 것이 이른바 각종 게이트다. 현존하는 낡고 썩은 정치구조를 유지한다면 누가 차기 정권의 담당자가 되든 또 다른 비리와 부정부패 사건의 재발은 필연적이다.

나는 노무현 후보가 김영배 고문에게 설렁탕은 고사하고 자판기 커피라도 한 잔 뽑아주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이권과 청탁으로 얼기설기 뒤범벅된 종래의 정치판을 뒤엎는 첩경은 당이 당원을 먹여 살리는 비정상적 구조를 과감히 혁파하고 당의 정강정책에 동조하는 자발적 지지자들이 자연스럽게 납부하는 소액다수의 당비로 정당이 운영되는 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노후보가 중진의원인 김영배 후보에게 설렁탕을 사주면 김영배 후보는 평소 절친한 동료 의원들과 후배 지구당 위원장들에게 설렁탕을 대접해야 한다. 의원들과 지구당 위원장들은 조직책들과 핵심 기간당원들에게 설렁탕을 사주고 이들은 이제 일반 당원들의 설렁탕 값을 치러야 한다. 상층에서 저변으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설렁탕 그릇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소요되는 정치자금의 총액은 각 단계를 거치면서 자릿수 하나가 더 붙어 천문학적 액수로 불어날 수밖에 없다. 당연히 아무리 개혁적인 정치인이라도 정치자금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싫든 좋든 정당의 보스에게 기대야 한다. 결국, 개혁성과 충성을 맞바꾸는 정치권의 음습한 거래가 성사되는 것이다. 김근태 의원의 정치자금 고해성사는 설렁탕 한 그릇이 가져오는 한국정치의 비극성을 적나라하고 실증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서울..대전..대구..부산 찍고 진행됐던 국민경선 동안 알게 모르게 유명세를 탔고, 경선 후보자들에게 앞장서서 승복의 미학을 강조했던 김영배 상임고문이 민주적 국민경선의 정신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행태를 연출하는 사태는 대단히 유감스럽다.

김영배 고문에게 묻고자 한다. 노무현 후보에게 설렁탕을 사달라고 조르기 이전에 김영배 고문은 민주당의 회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노후보의 쓰린 속을 달래주고자 수고한다는 위로의 말을 전하며 따듯한 해장국이라도 한 그릇 사준 적이 있는가?

초등학생 아이들조차도 자존심 없이 치사하게 먹을 것 가지고 투정하지는 않는다. 자타칭 정치원로인 김영배 고문을 상대로 초급 한국정치학 원론을 가르쳐야 하는 내 속까지 덩달아 쓰리다. 날이 밝으면 돈 잘 버는 친구 떨이 쳐 설렁탕이라도 하나 사먹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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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8/10 [03:1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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