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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국방부 극비문서와 X파일, 언론자유
[김영호 칼럼] 진실을 말하려면 잘못된 법과도 싸워야 한다
 
김영호   기사입력  2005/10/03 [13:40]

 X파일 특종, 타언론사 취재해도 ‘보도불가’ 결정 내린 MBC
 
 MBC가 X-파일이란 언론사에 기록될만한 희대의 특종을 낚고도 낙종해 버렸다. 이상호 기자가 도청문건을 입수했으나 일곱 달 가까이 미적거리다 불발탄에 그치고 만 것이다. 그 사이 인터넷에는 그가 왜 미국에 왔다 갔다 했는지 무엇을 취재했는지 궁금해 하는 글이 더러 나왔다. 6월 들어서는 이 기자보고 입을 열라고 압박하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MBC가 불쑥 '보도불가'라고 매듭을 지었다. 내용의 윤곽은 이미 언론계에 파다하게 떠돌고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취재에 들어갔다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말이다. 

 조선일보가 7월 21일 김영삼 정부 시절 안기부가 '미림팀'이라는 비밀조직을 두고 정계, 재계, 언론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불법도청을 일삼았다고 보도했다. KBS는 같은 날 밤 녹취록의 일부를 익명으로 보도했다. 그러자 이튿날 MBC가 오늘 밤 터트리겠다고 벼렸다. 삼성측이 기다렸다는 듯이 법원에 방송금지가처분을 냈고 그것은 즉각 받아 들여졌다. MBC가 이 사실은 크게 알렸으나 막상 내용은 변죽만 건드렸다. 반면에 KBS는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그러자 이튿날 MBC가 X-파일에 담긴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결국 조선일보와 KBS가 물꼬를 튼 다음에야 MBC가 뒤따라 간 셈이다.

 취재전선에는 휴전도 영일도 없고 더욱이 영원한 승자는 없다. 어느 매체가 취재했다면 다른 매체도 얼마든지 취재할 수 있다. 어떤 취재대상도 독점적, 배타적일 수 없다. 다만 내용에서 구체성과 치밀성이 떨어질지 몰라도 말이다. MBC가 취재했다면 다른 매체도 취재가 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MBC는 취재내용이 독점적이라고 판단하여 다른 매체가 취재할 가능성을 배제했던 모양이다. MBC가 보도하지 않으면 취재원이 다른 매체와 접촉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간과했던 것 같다.

 알려진 바로는 도청 테이프의 출처를 확인하지 못해 보도를 미뤄 왔다고 한다. 이 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도청하면 응당 정보기관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취재할 의사와 의지가 얼마나 투철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뉴욕 타임스 국방부 극비문서 보도하자 행정부 보도금지 가처분 얻어내
    
 1971년 6월 13일 뉴욕타임스는 국방부의 극비문서를 특종보도했다. 첫날 1면의 절반을 채우고 6개면에 걸쳐 깔며 기획연재를 시작했다. 이 날부터 10일간 연재물을 게재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 문건은 2차 대전 이후 1967년까지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게 된 모든 과정과 배경을 담은 것이다. 닉슨 행정부는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보도중지를 요구했다. 첫 보도가 나가자 존 미첼 법무부 장관은 타임스 사장에게 전보를 보내 보도된 문건은 국방부의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언론보도는 간첩법에 저촉된다고 통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타임스는 6월 15일자에 연재물보다 이 사실을 더 크게 보도했다. 미첼 장관이 베트남 전쟁 연재물의 보도를 중지하도록 시도했고 타임스는 이를 거절했다고 말이다. 그러자 닉슨 행정부는 즉각 뉴욕에 소재한 연방지방법원에 보도금지 가처분을 신청했고 받아들여졌다.

 법정에서 법무부는 타임스의 보도는 간첩법을 위반 한 것으로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며 보도중지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타임스의 변호를 맡은 헌법학자인 알렉산더 비켈 예일대 교수는 보도중지 요구는 전형적인 언론검열이라고 반박했다. 간첩법은 신문보도를 대상으로 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도중지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보도중지 가처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담당판사는 타임스가 소지한 문건을 압수해 달라는 법무부의 요청은 기각했다. 법원의 보도금지 명령에 따라 타임스는 6월 16일자에 월남전 연재물을 게재할 수 없게 되자 이 법정공방을 크게 보도했다. 이제 미국 국민의 관심은 타임스와 닉슨 행정부의 법정공방에 모아졌다.
 
뉴욕타임스 보도금지에 맞서 워싱턴 포스트 입수한 문건 보도하는 용기 보여
         
 뉴욕 타임스가 국방부 기밀문건을 입수하여 보도하려는 움직임을 낌새 챈 워싱턴 포스트는 낙종을 기다릴 수 없다며 뛰었다. 이 문건을 누출시킨 내부 고발자와 접선이 이뤄져 마침내 6월 18일 월남전의 내막을 폭로할 수 있었다. 지난 9월 3일 사망한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은 당시 법무부 차관이었는데 그가 전화를 통해 보도중지를 요구했고 포스트도 거절했다. 그 날 늦게 닉슨 행정부는 법원으로 달려갔다.
 
  뉴욕과 달리 워싱턴에서는 보도금지 가처분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담당판사는 간첩법은 언론검열이나 보도삭제를 위해 제정된 법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사건에 적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날 밤 닉슨 행정부는 긴급항소를 논의했고 토요일인 그 이튿날 콜럼비아 지방항소법원에 항소를 제기했다. 항소심은 하급심의 결정을 번복하고 월요일인 6월 21일 재심리하도록 결정했다. 이것은 닉슨 행정부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이 법에 의해 족쇄가 채인 타임스는 AP 통신이 인용한 포스트의 보도내용을 전재하는 통한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한편 6월 19일 저녁 뉴욕 지방연방법원은 행정부가 요청한 보도금지 가처분을 거부했다. 이것은 타임스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닉슨 행정부는 긴급항소를 심리하는 월요일인 6월 21일까지 가처분의 지속적인 효력을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6월 22일 제2순회 항소법원은 타임스에 불리하게 난 판결을 하급심이 재심리하도록 반송했다. 반면에 콜럼비아 지역 순회항소법원은 하급심의 포스트에 대한 보도금지 가처분을 거부한 하급심의 판결을 확인했다. 포스트가 이긴 것이다. 정부는 재심리를 요청했으나 이마저 거부당했다.

 6월 24일 타임스는 항소심의 판결에 굴복하고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날 늦게 닉슨 행정부는 항소심에서 포스트에 유리하게 난 판결을 심리해달라고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6월 25일 대법원은 두 사건을 6월 26일 병합심리하기로 결정했다. 하급심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이 거친 두 사건은 대법원의 최종결정을 기다리게 됐다. 나흘 후인 6월 30일 대법원은 6대3으로 정부는 국방부 극비문건의 발행을 봉쇄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그 이유는 가처분은 위헌적인 사전통제이며 정부는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자유롭게 정보를 입수하고 보도할 수 있는 언론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며 시민은 국가의 권력남용을 감시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언론이 월남전의 비밀역사를 둘러싸고 정부와 벌린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타임스가 첫 보도한 이후 17일만에 최종판결이 난 셈이다. 이것이 이른바 <뉴욕 타임스 대 합중국> 사건이다.
 
두 신문 모두 법률검토에서는 불가판정이 나왔으나 국민의 알 권리를 택해
 
 국방부 문건은 1968년 중반에 완성된 것으로 모두 7,000쪽 47권으로 되어 있다. 그 중 4,000쪽은 부속서류이다. 모두 15부만 제작되었고 그 중 2부는 국방부의 연구용역을 수행해온 랜드 연구소에 배포됐다. 바로 그 연구소의 연구원이었던 다니엘 엘즈버그가 이 문건을 복사해서 뉴욕 타임스 닐 쉬한 기자에게 줬다. 그는 월남 종군기자 출신이었다. 엘즈버그는 1965~1967년 월남에서 미 국방부 고위 문관으로 근무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잘못 가고 있고 정부가 전쟁에 대해 정직하지 않다고 믿어왔다. 내부 고발자인 그는 뉴욕 타임스에 이어 워싱턴 포스트에 이 문건을 누출시킨 다음 법정공방이 끝나자 6월 28일 보스턴 연방검찰청에 자진 출두했다.

 전장에서 두 눈으로 전쟁의 참혹상을 목격한 엘즈버그는 이 전쟁을 정치가와 고위관료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이 기만적 전쟁을 하루 빨리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국방부 극비문건을 외부로 누출시켜 폭로해야 한다고 다짐했고 그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그래서 1970년 2월 그는 월남전에 비판적이었던 풀브라이트 상원 외교분과위원장에게 3,000쪽 가량을 우송했다. 면책특권이 가진 상원의원이니 국회에서 닉슨 행정부의 전쟁수행을 비판하여 국민에게 월남전의 진상을 알릴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풀브라이트 의원이 협조하지 않아 그의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먼저 뉴욕 타임스를 찾았다.    
      
 타임스는 석 달 동안 12명의 전문가를 투입하여 기사를 작성하며 법률적 검토도 마쳤다. 내용을 검토한 변호사들은 보도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정부에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다만 부사장이며 상임변호사였던 38세의 제임스 구데일만 보도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반면에 기자들은 이 역사적 기록이 현재의 전쟁상황과 국가안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보도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앞으로 닉슨 행정부의 법적 조치가 있더라도 이에 굴복하지 말고 보도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언론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보도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여기에는 유명한 언론인 제임스 레스턴도 가세했다. 결국 아서 슐즈버그 사장이 결행을 단행했다.

 경쟁지인 뉴욕 타임스 보도을 인용보도해온 포스트의 입장에서는 국방부 극비문건 사건은 치욕적이었다. 그 포스트는 역시 엘즈버그한테서 문건을 입수하여 이틀 동안 벤 브레들리 편집국장 집에서 작업하며 법률적 판단을 내렸다. 이미 법원에 의해 타임스가 보도금지 가처분을 받은 상태에서 말이다. 포스트의 자문 변호사들 역시 보도를  반대했다. 타임스와 달리 법정모독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며 타임스의 재판결과를 기다리자는 주장을 폈다. 

 반면에 주로 월남전을 취재한 경험이 있는 기자들은 보도를 강력히 주장했다. 입수한 정보를 보도하지 않으면 포스트가 정부의 입장에 동조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결국 캐서린 그레이엄 사장이 국민의 알 권리를 존중하여 결행에 옮겼다. 포스트는 언론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뜻에서 가처분에 정면 도전했던 것이다. 언론사에 찬란하게 기록될만한 용기다.
 
삼성측의 가처분에 대한 MBC의 이의신청 조속심리 촉구하는 노력 부족
 
 한편 지난 7월 21일 MBC가 X-파일의 내용을 보도하겠다고 나서자 홍석현 주미대사와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부회장)은 당일 저녁 기다렸다는 듯이 서울 남부지법에 방송금지가처분을 신청했다. 이들은 신청서에서 "불법으로 도청된 자료에 근거해 사실로 확인되지도 않은 불명확하고 부정확한 내용의 보도가 이뤄진다면 신청인들이 불법 정치자금 공여의 당사자로 오인될 수 있는 심각한 인격권, 성명권 등의 침해와 명예훼손이 이뤄질 것이며 이는 통신기밀보호법 위반 등 범죄행위를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방송 자체를 금지하기는 곤란하지만 테이프의 불법성이 있으므로 테이프의 원음을 직접 방송하거나 대화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실명을 직접 거론해서는 안 된다"며 "나머지 세부사항은 방송국이 결정할 문제다"라고 결정했다. 한마디로 1997년 선거자금을 불법적으로 살포한 사건과 관련한 테이프는 도청문건이니 방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서울 남부지법 민사 51부가 맡았다. 그런데 이 사건을 대리한 변호사는 2004년 2월부터 지난 2월까지 바로 이곳에서 수석부장판사를 지냈다. 5개월 전까지 그곳에서 근무했으며 담당판사는 그의 후임판사이다. 이를테면 전관(前官)예우를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대해 MBC는 삼성측이 신청한 방송금지 가처분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만 크게 보도했다. 방송보도를 통해 일부만 인용하도록 결정한 가처분의 부당성을 부각시키지 못했다.

  또 MBC는 방송보도를 통해 삼성측의 가처분에 대한 이의신청을 조속히 심리하도록 촉구하지도 않고 있다. 도청내용의 상당부분은 이미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진 상황에서 보도를 계속 금지할 만큼 급박한 긴급상황이 존속하는지 법원을 압박해야 한다. 이것은 가처분이 남용됨으로써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전관예우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해야 하는데 그 같은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보도하지 않아 얻는 사익과 보도해서 생기는 공익을 깊이 따져 봤어야
 
 MBC는 법이란 덫에 걸려 스스로 운신의 폭을 옥죄었다. 통신비밀보호법은 불법도청이나 도청내용 공개에 대해 똑같이 10년 이하 징역이나 5년 이하 자격정지를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공익과 공인에 대해 심각한 고려가 부족한 듯하다. 공익을 판단하는 기준은 주체가 공인인가, 그 공인의 행동이 공적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가, 특히 공인이 저지른 행위가 불법적이거나 부적절한 행위인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어야 한다. 대화당사자의 한 사람은 거대신문사 사장이고 또 다른 한사람은 거대재벌의 경영책임자이다. 두 사람 다 공인의 범주에 든다. 또 대화는 당시의 정치자금에 관한 법을 위반한 불법적인 내용이다. 불법적 정치자금과 관련한 불법행위를 보도하지 못하게 금지하는 것은 신청자들의 이익만 보호함으로써 언론자유를 침해한다고 재판부를 강도 높게 비판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통신기밀보호법이 언론자유를 제약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깊이 따져봤어야 한다. 보도하지 않아 얻을 사익과 보도해서 생기는 공익을 깊게 생각했는지 묻고 싶다. 보호이익과 침해이익을 놓고 법익의 균형성을 재어봤는지 말이다. 거기에는 사생활이 없고 그들은 공인이다. 돈과 언론을 동원해서 정권을 창출하려는 쿠데타적 음모가 들어있을 뿐이다. 이것은 주권재민을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가 국방부 극비문서를 보도한 배경은 미국의 부도덕한 월남전쟁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사회는 월남전쟁으로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무고한 젊은이들이 전장에 끌려가 무수하게 희생되고 반전여론이 비등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됐고 그 이후 네 차례의 선거가 있었지만 주요 입후보자들은 재벌한테서 선거자금을 조달하여 선거를 치렀다. 이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재벌 돈이 대통령을 만드는데 일조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실체적 단서가 드러났다면 MBC는 금권정치를 청산하는 계기로 삼는다는 결의를 보였어야 한다. 이것을 역사적 사명감으로 알고 접근하는 자세가 부족했다.   
 
언론자유를 쟁취해서 진실을 말하려면 잘못된 법과도 싸우는 용기가 필요
 
 취재기자가 검찰송환에 순순히 응한 이유도 잘 모르겠다. 이 사건의 핵심은 불법도청과 음모내용이다. 그런데 검찰이 본질적 문제는 제쳐두고 취재과정부터 조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시점에 취재원은 다른 경로의 제보에 따라 이미 체포된 상태에 있었고 취재과정도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취재과정은 취재원 보호의 연장선상에 있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 언론인한테 취재원 보호란 생명 같은 직업윤리다. 취재원에게 사례비로 1000달러를 준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취재협조를 위해 베푼 호의에 대한 사례로서 사회통념상 용인될 수 있는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취재물건이 불법적 생산물이기는 하지만 왜 검찰에 자진제출했는지도 의문이다. 불법도청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언론이 도청과정에 개입하지 않았고 그 내용이 공익과 관계된 것이라면 언론의 자유가 우선된다는 주장을 폈어야 한다. 2001년 미 대법원은 노조위원장이 자신의 전화통화를 불법도청한 내용을 방송한 라디오 방송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해 비슷한 취지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뉴욕 타임스는 닉슨 행정부가 국방부 극비문건은 정부재산이니 반납하라고 주장했지만 그 요구를 거절했다. 또 재판부도 타임스의 입장을 존중해 줬다.  

 언론자유는 쟁취하는 것이다. 때로는 잘못된 법과도 싸워야 한다. 진실을 말하려면 말이다. 언론도 법을 존중해야 하나 그것이 국민의 알 권리와 충돌할 때는 처벌이나 불이익을 감수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국민은 그 테이프에 담긴 육성을 듣고 싶다. 이것이 국민의 알 권리다.
 
* 본문은 계간 <열린미디어 열린사회> 2005 가을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언론광장 공동대표
<건달정치 개혁실패>, <경제민주화시대 대통령> 등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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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10/03 [13:4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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