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정몽준과 케사리즘(Caesarism)
루비콘강은 아무나 건너나
 
공희준 Soccer Jockey   기사입력  2002/07/22 [06:49]
{IMAGE2_LEFT}케사리즘이란 갈등하는 세력들이 파국적인 방식으로 상호 균형 짓고 있는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세력들 간의 갈등이 계속되면 결국 상호파괴로써 종식될 수밖에 없게끔 되어 있는 상황을 말한다. 케사리즘은 그것이 비록 언제나 파국을 향하고 있는 세력간 균형으로 특징지어지는 역사·정치적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어떤 위대한 인물에게 '중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떠한 경우에나 동일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다. 케사리즘은, 진보적 세력이 승리하는 데에 케사르(위대한 인물)의 개입이 도움이 될 경우에는 진보적이다. 케사리즘은, 케사르의 개입이 반동적인 세력이 승리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반동적이다. 케사르와 나폴레옹 1세는 진보적 케사리즘의 경우이고 나폴레옹 3세와 비스마르크는 반동적 케사리즘의 경우이다

이상은 '헤게모니 이론'과 '진지전-기동전 원리'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좌파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저작인 '옥중수고(도서출판 거름 : 이상훈 역)'에서 갈무리한 내용이다. 오랜만에 들춰보니 옥중(獄中)이란 말이 새롭고 신선하다. 부패한 지자체장의 옥중결재와 비리 정치인의 옥중당선과는 명징하게 구별되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한 혁명가의 처연한 초상과 이루지 못한 이상에의 처절한 회한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초판이 발행한지 10년이 훨씬 지난 묵을 책을 다시 꺼내보게 된 배경은 순전히 정몽준씨 덕분이었다. 향후의 정치적 행보에 대한 질문에 "부호인 록펠러와 케네디 가문은 보수적 공화당이 아닌 자유주의적 민주당과 인연을 맺었고, 귀족 출신의 케사르는 평민을 기반으로 하여 집권했다"는 요지로 발언한 그의 대답이 유달리 흥미를 자극했다. 특히 두 번째 구절은 범상하지 않다. 이전 구절이 12월 대선에 대비한 단기적 전술과 연관된 것임에 반하여 후자의 경우 그람시가 제기한 케사리즘과 대비하여 대단히 오묘하고 중층적인 전략적 복선과 장기적 포석을 깔고 있는 탓이다.

영문 알파벳 Caesar가 우리말에서는 카이사르, 케사르, 시이저 등 사용하는 사람의 기호와 입맛에 맞게 혼란스러울 정도로 제각각 발음되는 것처럼 정몽준씨에 대한 호칭 역시 맥락과 시점에 따라 중구난방이다. 대한축구협회장이자 국제축구연맹 FIFA의 부회장을 겸하고 있는 인물로서 2002 월드컵을 통해 세계 축구계의 실력자로 대중의 뇌리에 강하고 깊숙이 각인되긴 했지만, 동시에 그는 영남지역 유일의 비한나라당 지역구 국회의원이자 현대중공업의 실질적 오너이기도 하다. 좋게 얘기해 멀티플레이어고 독하게 표현하면 황금박쥐인 셈이다. 나로서는 이 글이 본격적으로 정몽준씨를 화자로 내세운 마수걸이이니 일단 본인이 가장 듣기 좋아할 직함으로 예우해 드리고자 한다. 현재 정씨의 주가를 천정부지로 밀어 올리고 있는 호재인 월드컵 4강 신화를 총지휘한 대한축구협회장 자격으로서 부르도록 하겠다. 게다가 아무래도 정씨 하면 회장이란 수식어가 자연스레 입에 붙기도 하였으니 이래저래 정회장이라고 불러 드려도 별다른 하자는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왜 꼬와^^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만 끄집어내자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만큼은 정몽준씨가 승패의 분수령을 가르는 결정요소로 작용하지 않을 개연성이 짙다. 상식적으로 판단해서 정회장이 17대 대통령직에 승부수를 걸을 뚜렷한 동기부여가 없다. 잘해야 본전치기지만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피박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국흐름의 맥을 종합적으로 짚어보면 정몽준 의원이 대권레이스에 뛰어들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상정될 수 있다.

첫 번째는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8.8 재보선에서 세간의 예측처럼 민주당이 죽을 쑤고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이회창 후보를 추월하게 해주는 확실한 돌발변수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노무현씨는 본인의 약속대로 어떠한 형태로든 경선을 다시 치러야 한다. 민주당이 아무리 개판 5분 직전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소위 곤조가 있는 당이다. 정권재창출이 아무리 다급하다 해도 정몽준씨에 대해서는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 "그래도 어떻게 재벌아들을..."이라는 양가적 감정이 돌출하기 마련이다. 동교동계의 위세에 눌려 위축된 상태이긴 하지만 민주당내의 개혁세력들 사이에도 만만치 않은 반발과 비토가 예상된다. 문제는 정몽준 회장이 노무현 후보를 제치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직을 쟁취한다 해도 기존 민주당 브랜드를 달고서는 그 역시 이회창 후보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란 점이다. 성한 사과를 썩은 자루에 집어넣으면 덩달아 맛이 가는 이치에 비견할 수 있겠다.

두 번째는 정몽준-이인제-박근혜-김종필 여기에 개평으로 김윤환 민국당 대표까지 더해 이른바 5자 연대가 성사되는 경우이다. 당연히 정몽준 의원이 대권후보로 추대 내지 옹립된다는 전제 하에서이다. 우선 5자 연대의 성사 자체가 의문시된다. 5명을 함께 아우를 수 있는 공통의 컨셉과 코드를 도저히 찾을 길이 없다. 동상이몽에도 한계가 있다. 정몽준-박근혜-김윤환을 포괄하는 영남후보를 내세우자니 이인제와 김종필의 충청표가 운다. 정몽준-박근혜-이인제의 세대교체 바람을 앞세우면 김종필과 김윤환은 곧바로 아웃이다. 각자 나름의 지지기반이 있다고 자부하는 박근혜와 이인제 두 사람이 정회장에게 자존심 팍 숙이고 들어갈 인센티브도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다. 정몽준씨 입장에서도 5자 연대를 하느니 차라리 민주당에 입당하는 게 덩달아 도매금으로 욕먹을 위험성이 단연 적다.

세 번째는 정몽준 회장의 단독드리블이다. 물론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이 시사했든 범 현대그룹 계열사가 전폭적으로 정회장을 지원하는 한에서이다. 여기에는 함정이 따른다. 일단 정주영 명예회장 타계를 전후하여 빚어진 왕자의 난을 계기로 깊이 파여진 형제간의 감정의 골이 메워질 수 있겠는가를 물어야 한다. 형제간끼리의 감정의 골이 메어진다 하더라도 왕자의 난에 연루되어 골육상쟁에 가담했던 측근들간의 화합까지 이뤄질 수 있을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오야붕끼리는 어울릴망정 밑의 꼬붕들은 죽는 날까지 철천지원수로 앙앙불락하는 것이 파워게임의 냉엄한 철칙이다. 꼬붕이 오야붕 먼저 유화노선을 밟았다가는 칼맞기 십상이다. 현대가(現代家)가 일치 단결해서 MJ 대통령 만들기에 나선다면 제일 먼저 총력전으로 맞불을 놓을 존재는 다름 아닌 삼성과 SK, LG 등을 필두로 한 재계의 라이벌들이다. 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정주영씨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 삼성과 대우가 전사적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음은 공지의 사실이다. 김영삼 민자당 후보에게 정보로 자금으로 가장 요긴하게 도움을 준 기업이 삼성이었음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설상가상으로 정주영 회장이 대선에 출정했던 때와 비교하여 현대를 둘러싼 적대적 언론환경이 조금도 개선된 구석이 없다. 라이벌 재벌들이 거대신문기업과 혼인 등의 방법을 동원해 동맹관계를 강화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현대는 산하의 신문사 경영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위에 제시한 세 가지 논거만 따지자면 정몽준 회장이 이번 선거에 무리해서라도 도전장을 던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 도처에 정회장의 대선 출마를 머뭇거리게 할 억지요인이 널려 있다.

{IMAGE1_RIGHT}냉정히 계산해보자. 정몽준 회장도 야심 있는 정치인인 이상 노무현씨와 이회창씨 못지 않게 대통령이 되고 싶은 욕구가 간절할 것이다. 정치란 것은 가능성의 예술이다. 가능성이 없으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정치인의 생리다. 이회창씨와 노무현씨는 대선에 실패해도 잃을 것이 상대적으로 적다. 이회창씨가 대통령 선거에서 또 한번 미역국을 먹었다고 해서 멸문지화의 화를 당하지는 않는다. 노무현씨가 대권고지에 오르지 못했다고 해서 누가 와서 노무현씨 일가족을 강제로 거리에 나앉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정몽준 회장은 대선에 섣불리 출사표를 던졌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잃을 것이 많다. 우선 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기반인 대한축구협회장 자리부터 흔들릴 것이다. 최악의 경우 물적 토대인 현대중공업 지분을 상실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나리 기업은 아무리 재무구조가 튼실해도 정부에서 여신만 규제하면 그걸로 끝장이다. 정주영씨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정회장은 선거패배의 후유증이 몰고 올 엄청난 피해와 타격을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객관적 견지에서 정몽준 회장은 80% 이상의 승산이 보장되어야만 대선 레이스에 전력투구로 임할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지형에서 8할 이상의 승산은 결코 있을 수가 없다. 지역대결구도가 온전하고 유권자들이 지역감정의 망령에 사로잡힌 작금의 상황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로 이완용이 등장하고 민주당 주자로 히딩크가 출마한다 해도, 민주당 후보자로 최규선이 나서고 한나라당 선수로 홍명보가 출전한다 해도 어느 당이나 8할 이상의 승산은 장담하기 불가능하다.

정몽준 회장이 진보적 노선을 천명하려 하고 케사르의 성공사례를 벤치마킹하려 애쓰는 것은 본인의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는 이와 같은 주변여건을 감안한 고육지책이라 하겠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한국축구의 4강 진출로 정회장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었다. 케사르가 로마시민들로부터 커다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갈리아 정복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이후부터였다. 원정에서 생포한 포로들을 이끌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를 외치며 멋진 갈기를 가진 우아한 백마들이 끄는 전차 위에서 월계관을 쓰고 개선식을 거행하는 케사르의 위용은 로마인들을 매혹시켜 민심을 얻기에 충분했으리라. 정회장이 월드컵 4강 신화를 케사르가 정복한 화려한 전리품처럼 유효적절히 활용하고자 머리를 싸매는 것이 익히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로마의 후예인 이탈리아가 정몽준의 갈리아 노릇을 해준 것이 이채롭다.

케사리즘은 두 개의 적대적 정치세력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며 마주 오는 기관차처럼 파국을 향해 돌진하는 정세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다. 21세기의 한국은 개혁세력과 수구세력이 서로 날을 세우며 맞서 있는 형국이다. 대치양상을 찬찬히 개관하면 미국의 배후원조와 거대신문기업의 노골적 지원사격을 등에 업은 수구반동세력의 힘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 한국의 파국은 난형난제를 이룬 수구와 개혁의 첨예한 호각지세가 아니라, 수구의 일방적 우위에서 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진실에 근접해 있다.

수구보수세력에게 원사이드하게 기울고 있는 균형추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개혁지향적 케사르의 출현이 절실하다. 정몽준 회장이 순기능적 의미에서의 케사르 역할을 할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그의 정치적 선의를 폄하해서가 아니다. 그가 딛고 서 있는 존재론에 의거한 분석이다. 정몽준 의원의 사회학적 위상은 케사르보다는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를 진압한 로마의 부유한 상인이자 케사르-폼페이우스와 더불어 로마의 제1회 삼두정치를 주도했던 크라수스에 가깝다. 정회장이 축구선수들을 검투사처럼 모아놓고 스파르타쿠스를 흉내내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라.

케사르는 정복전쟁의 승리 이외에도 평민들의 세금을 감면해주고, 귀족이 강탈한 농민의 토지를 되돌려주며 로마의 시민권을 속주의 신민들에게로 확대하는 등 고대사회의 관점에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전향적인 정책들을 과감히 추진했다. 땅따먹기 하나 잘했다고 로마의 민중들이 그를 지지한 것은 아니다.

정몽준 회장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가 진정으로 바람직한 웅지와 대망을 품고 있다면, 포부의 동기가 선친의 한풀이 차원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면, 그는 축구 이상의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히딩크의 능력을 보여 주었으니, 다음은 정몽준의 역량을 입증할 순서다. 나는 그 첫 시험대가 미시적으로 축구 한 분야에서만 이라도 한국병의 근원인 연고주의와 정실주의를 뿌리뽑는 것이고, 거시적으로 아버지의 유업을 받들어 남북관계의 흐름을 대결과 반목에서 화해와 협력으로 돌리는 것이라 믿는다.

필연적으로 학연과 지연과 혈연에 집착하는 반개혁적 세력들이 딴지를 걸 테고, 냉전체제를 존속시키려 혈안이 된 외세와 거대신문회사가 정몽준 회장의 등에 비수를 꽂는 수구적인 원로원 구실을 할 것이다.

나는 이 지점이 크라수스와 케사르, 그리고 스파르타쿠스가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분기점이라고 생각한다. 정회장은 케사르가 되고 싶은가. 그럼 브루투스를 겁내지 말지어다. 브루투스의 칼날이 시저를 시저로 만든 것이다. 정몽준 의원은 이제 그만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결론은 이미 나오지 않았는가. 해는 지고 강물은 점점 불어나는데 루비콘강은 언제 건널 셈인가.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2/07/22 [06:49]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