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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배의 디지털 觀点]
단절과 배제의 한국식 네트워크
 
민경배   기사입력  2002/07/09 [22:05]
"아무리 노력해도 실력 있는 놈 못 따라가고, 아무리 실력 있어도 빽 있는 놈 못 따라간다"는 말이 있다. 웬만큼 사회생활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뼈저리게 공감할만한 이야기이다. 솔직히 한국 사회에서 빽에 밀려 불이익을 당해본 경험 한 두 번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랴! 그리고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상관없이 무언가를 도모하기 위해 빽 한번 동원해 보려고 애써본 적 없는 사람이 또 얼마나 되랴! 빽에 살고 빽에 죽는 '빽생빽사'의 사회. 이것이 한국 사회의 현주소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1. 한국사회 연줄망의 세 가지 문제군

빽이란 말 자체는 원래 '배경'을 뜻하는 영어의 back에서 유래했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는 '연줄망', 즉 network란 의미로 간주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사회적 관계로서의 '연줄망'이 곧 든든한 '배경'과 동의어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오늘날 '빽생빽사'라는 기형적인 풍토를 그대로 대변한다. 연줄망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효과적인 자원이자 무기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합리적인 절차나 합법화된 제도보다도 훨씬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식 연줄망이다. 즉 사적인 관계가 공적인 관계를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빽생빽사'의 한국 사회가 잉태한 첫 번째 문제점이다.

{IMAGE1_LEFT}공적 영역이 사적인 연줄망 중심으로 운영되면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폐해라면 "우리가 남이가" 식의 연고주의와 "친구끼린 미안한거 없데이" 식의 정실주의를 꼽을 수 있다. 인사 청탁과 전관 우대 등 일상화된 각종 부작용은 한결같이 연고주의와 정실주의로부터 비롯된 결과이다. 그리고 이처럼 사적인 연줄망을 앞세워 공적인 사회 관계가 형성될 때 그 관계는 다분히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를 띨 수밖에 없다. 합리적 절차와 합법적인 제도가 무시되면서, 촌수 관계나 선후배 관계 등과 같이 기존에 사적 연줄망을 질서 지우고 있는 위계화된 권력 관계가 공적 영역에서의 사회관계를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사회의 제반 조직들이 베버식의 합리적인 관료제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피아 식의 패밀리 조직이나 봉건적인 가신집단에서나 볼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사적 연줄망의 공공화는 자연스럽게 비민주적인 사회 관계로 이어진다. 이것이 '빽생빽사'의 한국 사회가 잉태한 두 번째 문제점이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대표적인 3대 사적 연줄망이라면 단연 혈연·지연·학연을 들 수 있다. 물론 혈연·지연·학연을 중시하는 풍토가 유독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친밀감과 동질감을 느끼는 거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의식 속에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 연줄 의식은 단순한 친밀감과 동질감과는 차원을 달리 한다. 즉 프로야구 경기에서 지역 연고팀을 응원하는 애향심이나 고교야구 대회에서 출신학교를 응원하는 애교심처럼 소속 집단에 대한 충성도와는 분명 다른 성격의 문제라는 것이다. 경기가 끝나면 승자에 대한 박수와 패자에 대한 격려로 마무리되는 배려와 포옹의 자세가 야구장 밖의 사회 관계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당사자들의 구체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연줄 의식은 곧잘 배타적이고 단절적인 파벌 의식으로 확장되면서 사회적 균열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는 한다. 이것이 '빽생빽사'의 한국 사회가 잉태한 세 번째 문제점이다.

2. 오프라인적인 온라인 네트워크

한국식 연줄망 문화는 인터넷을 매개로 한 온라인 네트워크에서도 그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공통의 관심사를 중심으로 한 수평적이고 쌍방향적인 사회관계, 그리고 개방적이고 호혜적인 사회관계가 형성될 것이라는 온라인 네트워크에 대한 기대는 최소한 한국사회에서만큼은 그다지 설득력을 갖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실제로 '다음(www.daum.net)'이나 '프리챌(www.freechal.com)'같은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에 개설되어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들의 구성을 살펴보면 학교, 지역, 연령 등 전통적인 오프라인 연줄망에 기반한 커뮤니티의 숫자나 참여자의 규모가 특정한 주제나 관심을 매개로 형성된 커뮤니티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한국의 온라인 네트워크는 기존의 연줄망을 탈피한 대안적 관계를 만들어주기 보다는 오히려 전통적인 연줄망을 전자적으로 확장시키는 쪽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 시공의 장벽을 초월한 다양한 사람들의 대안적 네트워크의 가능성보다는 시공의 장벽을 초월하여 손쉽게 기존의 연줄망을 관리할 수 있게 해주는 보조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2000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아이러브스쿨(www.iloveschool.co.kr)'의 동창 찾기 열풍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연줄망조차 모자라서 이미 단절되었던 연줄망까지 기어이 복구해 내고픈 강한 연줄 의식의 발현인 셈이다.

사실 어떠한 기술이건 그것이 사회적으로 수용되는 과정에는 그 사회의 구조와 문화,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의 퍼스낼리티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을 매개로 한 온라인 네트워크가 국내에 확산되는 과정에서도 기존 오프라인에서의 사회적 특성이 반영된 독특한 네트워크 문화가 형성·정착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고래 힘줄보다 더 질긴 한국 사회의 연줄망은 개방성과 호혜성을 근간으로 하는 온라인 네트워크마저도 외부와 단절한 채 무차별적으로 내부적 연줄과 결속만을 앞세우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네트워크로 탈바꿈시켜 버리는 놀라운 소화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3. 권력장치로서의 연줄망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막론하고 연줄망이 배타성을 띄고 있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서구와 달리 사회계약의 원리보다는 힘의 원리가 우선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계약의 원리는 구성원간의 상호 신뢰를 전제로 형성된다. 반면 힘의 원리는 구성원들의 숫적 우위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뼈아픈 지적처럼 저신뢰 사회에서는 사회계약의 원리를 기대하기 힘들다. 오직 일차적 연줄망으로 끈끈하게 뭉쳐진 다수의 패거리만이 문제 해결의 확실한 보증수표이다. 패거리 문화는 곧 배타성의 문화를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막상 배타적인 연줄망을 통해 관철되는 이해관계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며, 그 최종적인 수혜자는 누구인가를 들여다보면 상황은 한층 더 심각해진다. 배타적인 연줄망이 그 속에 들어있는 개개인에게 제공해주는 혜택이란건 보잘 것 없는 떡고물 수준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일자리 알선해 주고 병원에서 남보다 좀 빠르게 입원수속 처리되는 정도가 고작이다. 물론 힘없는 서민들 입장에서야 이 정도의 혜택이라도 감지덕지 할만한 일이겠지만, 역으로 자신이 다른 연줄망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결과적으로 연줄망 동원 전략은 제로섬 게임에 그치고 마는 셈이다.

{IMAGE2_RIGHT}배타적 연줄망의 실질적인 열매는 전적으로 기득권층의 몫이다.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불어닥치는 지역감정 놀음에 유권자들은 놀아나지만 막상 그들 손에 쥐어지는 것은 사회 균열이라는 상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여의도 입성에 성공한 정치인만이 유일한 수혜자일 뿐이다. 비즈니스 상의 작은 거래라도 성사시켜 보려고 걸핏하면 동창이니 동문이니 하며 학연이 동원되지만 이렇게 해서 작은 성과를 따내기 위해 희생해야 할 대가는 너무나 크고 혹독하다. 왜냐하면 좋은 학연이란 곧 좋은 학벌을 의미하며, 따라서 좋은 학벌로 진입하기 위한 피나는 노력과 치열한 경쟁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탈락한 수많은 사람들은 진입에 성공한 소수자들이 만들어놓은 학벌 사회라는 거대한 괴물에 짓눌려 평생을 신음해야 하는 냉엄한 현실로부터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

이렇듯 배타적 연줄망은 소수 기득권층의 게임에 다수의 대중들을 소모품으로 동원시키는 일종의 권력 기제로 작동한다. 개개인의 작은 이해관계 때문에 스스로가 높이 쌓아올린 단절과 배제의 네트워크라는 장벽은 결국 그 개개인들을 감금하는 감옥과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연줄망이라는 감옥 안에 들어앉은 사람들끼리 끈끈한 패거리 의식을 나누면서 떡고물을 나누어 먹고 있는 사이, 저 높은 감시탑 위에는 음흉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를 내려다보는 기득권층의 화려한 향연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느낄 때도 되지 않았나?

* 필자는 사회학박사로 사이버문화연구소 소장입니다.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2002. 7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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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7/09 [22:05]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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