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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게이트를 아시나요?
백기완의 줏대와 이명박의 핏대
 
공희준 Soccer Jockey   기사입력  2002/07/10 [18:20]
{IMAGE2_LEFT}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는 뿔푸리 민주주의의 근간이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파행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지자제에 관한 시민들의 낮은 관심과 중앙집권적 정치문화를 원인으로 꼽을 수 있겠으나, 지방자치가 토호들과 유지들의 잔치판으로 전락하고 대중의 외면과 혐오를 받고 있는 핵심에는 함량미달의 저질 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이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사진출처 : 스포츠서울

서울시장에 취임한 이명박씨가 공직자로서 부적절한 처신을 계속하여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씨에게 체질화된 낮은 공복의식과 높은 특권의식이 사단을 빚은 것이다. 이씨의 돌출행동과 기행은 CEO 시장을 호언하며 서울시장에 도전할 때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어온 바이다.

요즘 들어 CEO형 리더십이 마치 바람직한 정치지도자상인양 운위되고 있다. CEO란 말을 직역하면 곧 '사장님'이다. GE를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켜 이상적인 기업인으로 칭송받던 잭 웰치마저 미국경제를 휘청거리게 하고 있는 분식회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실이 폭로된 데서 드러나듯이 사장님들의 궁극적 목표이자 존재의 이유는 돈을 많이 벌고 축재하는 것이다. 돈을 벌자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사장님들의 속성이고 미덕이다. 사장님의 돈 욕심엔 한계가 없다.

이명박씨는 한국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자신의 약속을 조금씩은 지켜가고 있다. 그가 서울시민 전체를 '고르고 차별 없이' 부자로 만들어줄 리는 만무하지만 본인의 공언대로 최소한 CEO 시장만큼은 확실히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 갑자기 조선시대 사육신들의 잔영이 뇌리를 스친다. 죽기 직전까지도 수양대군을 임금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칭한 박팽년과 성삼문의 의기가 떠오른 것이다. 그들의 의기를 벤치마킹해 나도 조금은 객기를 부려보겠다. 나는 이씨에게 시장이란 몸에 안 맞는 호칭 대신 사장이란 직함을 선사하겠다. 이명박씨가 시장보다는 사장이 훨씬 어울리는 인물이라는 데에는 북한산에서 관악산에 이르기까지 서울 어디에 사는 장삼이사든 쉬이 동의하리라.

방송에 출연해 히딩크 사진촬영 파문을 해명하는 이사장의 표정에는 막말로 전혀 개전의 정이 비치지 않는다. 이명박씨가 상식이 없는 사람이라거나 도덕감각이 마비된 인물이라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게 바로 CEO의 체질이자 발상인 탓이다.

회사에 귀한 손님이 오셨다. 내 귀여운 아들녀석과, 내 금쪽 같은 딸네미의 반려자인 사위자식 불러서 사진 한 장 찍게 해주는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게 내 회사지, 니들 회사냐. 게다가 사장을 비방하는 글들로 도배질된 회사 홈페이지 게시판 관리차원에서 직원 몇 명 풀어 CEO 브랜드 마케팅한 것이 큰 대수라고 이렇게 난리 블루스들인가.

설마 이명박씨의 인식이 이렇게까지 저급하지야 않겠지만 이씨의 태도와 언행을 찬찬히 훑으면 내 회사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웬 잔소리냐는 식으로 핏대 올리는 오만함과 도도함이 묻어나 종내 씁쓸하다. 주민소환제를 도입하든지, 내가 경기도로 이사가든지 양단 간에 결정을 내려야겠다.

내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였다면 지금쯤 혈압 올라서 돌아가시기 일보직전일 것이다. 6.13 지방선거에서 톡톡이 약발이 먹혔던 친인척 비리 레퍼토리로 8.8 재보선마저 싹쓸이하려던 계획이 개념 없는 지자체장 하나 덕택에 말짱 도루묵이 되었으니 그 속이 오죽 타들어 가겠는가. 선거공학적 측면으로 분석하면 이씨의 추태와 망동으로 한나라당 입장에서 100만 표는 족히 날아갔으리라. 강남구 구청장에나 어울리고 압구정동 동장에나 적합한 그릇의 인물을 홍사덕씨의 가슴에 생채기까지 내며 서울시장 후보에 마구잡이로 공천한 것을 보니 한나라당의 인물난도 어지간한 모양이다. 이씨의 친형이 한나라당의 고위 당직자이고 막대한 재력가인 이씨가 알게 모르게 당재정에 기여한 공로를 참작하더라도 과연 이명박씨가 대통령 선거 유권자 백만 명의 무게와 맞바꿀만한 거물인지는 의문스럽다.

{IMAGE1_LEFT}히딩크 양옆에서 미소짓는 이씨의 아들과 사위의 모습에서 나는 자꾸만 김홍걸이 오버랩되고 이형택이 어른거린다. 제 자식 끔찍이 귀여운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인지상정이겠으나 공과 사를 구별 못해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불행한 역사의 전철을 왜 그리 답습하려 발버둥치는지 도통 이해하기 힘들다.

한 가지를 보면 열을 알고, 될성 싶은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 속담을 이명박씨는 새겨들어야 마땅하다. 이번 포토게이트(Photo Gate)에서 이씨가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그는 무능하고 부패한 자치단체 수장의 대명사로 기록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씨의 개과천선과 대오각성을 바라는 마음 한켠에서 뼛속 깊이 체화된 사장님 마인드가 그의 발목을 종내 붙잡지 않을까 못내 불안한 속내를 지우기 어렵다.

덕분에 서울시청 홍보담당 공무원들은 이명박씨의 임기 동안 휴가나 제대로 챙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씨는 사재를 털어서라도 홍보담당 직원들에게 미리 보너스라도 두둑이 챙겨주시기 바란다.

이씨 패밀리의 행태에서 한국인을 둘러싼 모든 부정적 이미지의 총체를 발견한다. 그 핵심에는 히팅크가 그토록 불식하려 애쓴 정실주의와 연고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정실주의와 연고주의의 다른 말 같은 뜻은 줏대 없음과 자존심 팽개치기다. 사장인 아빠와 시장인 아버지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철부지 아들과 눈치 없는 사위. 제 자식 귀하고 편한 건 알아도 시청 앞에서 히딩크 발뒤꿈치라도 구경하려 몰려든 수백 명의 평범한 청소년 축구팬들과 종일 손놓고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은 나 몰라라 하는 몰염치와 무신경. 월드컵 4강 국가의 수도(首都)행정을 총괄한다는 인사와 그 가족들의 꼴불견에서 히딩크는 한국을 떠나기로 한 자신의 결심이 옳은 판단이었음을 새삼 확인했으리라.

나는 히딩크 감독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에게 헌사한 존경과 사랑의 정념에는 한국에서 힘께나 쓴다는 이들에게 느낀 환멸과 혐오가 실려 있다고 믿는다. 백선생을 만나고 나서야 히딩크는 비로소 한국에도 신념과 주관을 가진 사회 원로가 살아 있음을 체득했으리라. 대표팀 성적이 일희일비할 때마다 불나방처럼 히딩크 주변에 모였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모이는 한국사회 특권층들의 신물나는 광경이 히딩크에게 심어줬을 좋지 않은 인식이 백선생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불식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고 고수가 고수를 눈치채는 것일까. 말도 통하지 않은 두 사람은 서로의 분위기와 아우라 만으로 상대방의 인품과 인물됨을 충분히 헤아렸다. 백기완 선생은 히딩크를 사나이라 불렀다. 들끓는 냄비들의 성화에 굴하지 않고 소신과 의지로 목표를 관철한 히딩크와, 일신의 부귀와 영달을 위해 지조를 꺾고 권력과 자본에 영합하기보다는 험난한 가시밭길 투성이인 통일과 개혁의 한길을 헤쳐온 백기완 선생은 나라와 인종과 국적과 분야는 달라도 서로가 공유하는 공통적 호흡과 공동의 코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줏대와 자존심이다.

가족의 행복과 안위를 위해 핏대를 세우는 인간군상들이 시장으로, 대통령 후보로, 신문사 사장으로, 재벌총수로 승승장구하는 이 나라에서 줏대를 지키는 이들은 그래서 더더욱 값지고 귀중한 존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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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7/10 [18:2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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