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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명계좌 저런 편법증여
미리 보는 이회창 대통령
 
공희준 Cinema Jockey   기사입력  2002/06/25 [20:06]
{IMAGE1_LEFT}노련한 선수는 심판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파울을 한다. 진정한 반칙왕은 좀처럼 반칙하는 모습을 들키지 않는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축구, 특히 토티가 유감없이 진수를 과시한 이탈리아 축구를 너무나 열심히 벤치마킹한 듯 하다. 아니면 이번 월드컵을 통해 교묘한 파울의 묘미를 만끽하게 해주었던 세계의 유명축구 스타들이 한국의 야당에서 좋지 않은 것만 골라 베낀 것 같다.

전 국민과 대다수 네티즌들의 시선이 월드컵 축구에 쏠린 틈을 타 한나라당이 빌라게이트-원정출산-세풍사건 등 이회창 대통령 후보를 둘러싼 여러 추문과 의혹들을 날카롭게 지적한 원로 언론인 정경희 선생에게 축구화 바닥이 드러날 정도의 깊숙한 태클을 고의적으로 걸었다. 심판 노릇을 해야 할 네티즌들과 국민들은 공의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하느라 양심적 언론인의 발목을 예리한 축구화 스파이크로 지긋이 밟고 눌러대는 한나라당의 치졸한 빗장수비 작전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한나라당이 정경희 선생에게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액은 5억원이라고 한다. 어떤 근거로 5억원이란 금액이 산출됐는지 저간의 속사정은 소상히 파악할 수 없으나 액수의 터무니없음을 논하기 이전에, 힘없는 원로 언론인을 희생양 삼아 비판적 여론을 잠재우겠다는 독선적 발상과 오만한 저의가 가증스럽고 욕지기 난다.

20여년간 한국일보를 구독했던 나는 정경희 선생의 이름이 썩 낯설지 않다. 서슬 퍼런 민정당 독재시대에 정권의 폭압과 모순을 파헤치는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른 선생의 글들은 빌빌거리는 미몽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던 나를 개안시키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비판을 억누르고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독재권력의 속성이다. 절대적으로 부패하기 마련인 절대권력을 지향하며 거대 신문회사와 찰떡궁합을 지어 대권으로 논스톱 질주하고 있는 한나라당도 당권을 전면적으로 틀어쥔 민정계 덕분에 독재체제에 대한 귀소본능과 노스탤지어를 실정과 전횡으로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던 동서고금의 어떠한 붕당과 도당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남부럽지 않게 가지고 있다. 우리는 정경희 선생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극악한 침탈의 서곡이 되지 않을까 지극히 우려스럽다.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시점은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압승이 확실시되던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 치밀하게 짜여진 모종의 정권장악 시나리오에 따라 여론형성구조와 언로의 흐름을 한나라당에 유리한 방향으로 인위적으로 조작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감지된다. 지금과 같은 페이스라면 연말 대통령 선거에서 권력을 잡을 경우 한나라당과 동조세력이 얼마나 기고만장해 날뛸지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른다.

{IMAGE2_RIGHT}맘껏 이권을 분탕질한 동교동계가 물러간 자리를 골빈 강남 졸부들과 전쟁에 환장한 양키들이나 좋아할 민정계가 차지한다면 한국의 역사는 정확히 20년 전으로 후퇴할 것이다. 비리의 규모와 부패의 크기에서 동교동계는 민정계에 비할 바 아니다. 오락실에서 애들 코 묻은 돈이나 삥 뜯는 3류 양아치와 영업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상대방 조직원을 서슴없이 회칼로 무자비하게 난자하는 야쿠자 조직의 차이 만큼이나 음험함과 잔학성에서 차원을 달리 한다. 정경희 선생에 대한 한나라당의 딴지걸기가 암울한 민정계 공포정치로 대한민국을 되돌리려는 문벌귀족과 권문세가들의 본격적인 총공세를 알리는 은밀한 시그널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5억원이란 돈은 한 채에 10억원에 육박하는 105평 빌라 세 채에 패밀리 타운을 형성해 단란하게 사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서민들에게는 언감생심의 거액이다. 물어줄 돈이 없어 몸으로 때우려면 감옥에서 도대체 어느 정도나 오래 썩어야 하는지 난감하기조차 하다.

역사의 뒤틀림을 고발하고 참언론의 지표를 제시한 칼럼을 썼다는 괘씸죄에 걸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난데 없는 송사에 휘말려 졸지에 피고인 입장에 선 사실에 정경희 선생은 지금 눈앞이 깜깜해질 게다. 명리에 물들고 영달에 눈멀어 권력에 영합해 훼절한 무수한 언론인들과 달리 학처럼 고고한 선비정신으로 평생을 일관했던 정경희 선생의 고통스런 처지와 고통을 힘겨운 싸움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메어온다.

법에 문외한으로서 손해배상 청구소송으로 어떤 불이익과 피해가 따를지 정확히 가늠하지 어렵다. 하지만 앞으로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에 비판적인 글을 쓰자면 선행조치로 깔끔하게 ‘주변정리’를 해야 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내 귀중한 재산으로 한나라당 자산을 불려줄 용의는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우선 주위 지인들에게 부탁해 차명계좌를 개설하겠다. 탈탈 털어봐야 몇 원이나 나올지 알 수 없지만 우선 내 명의로 개설된 통장에서 모든 예금을 인출해 차명계좌에 전부 입금시킬 작정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한민국 영토는 물론 지구상 어디에도 내가 보유한 부동산은 존재하지 않는다. 돈 없고 가난한 것이 이렇게 편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은 것은 생전 처음이다. 혹 모르겠다. 우리 어머니가 내 명의로 주책없이 어느 촌구석에 평당 5천원짜리 땅이라도 한 100평 사놓았는지 모를 일이므로 내일부터 전국의 모든 등기소를 뒤져 내가 혹 팔자에 없는 부재지주가 되었는지도 샅샅이 검색할 작정이다. 내 땅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예정에 없이 누비게 생겼다. 아흐 동동다리. 만약 내 땅이 발견되면 절친한 지기에게 편법으로 증여할 계획이다.

이제껏 차명계좌와 편법증여는 민정계 정치꾼들과 삼성가 도련님이나 일삼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한나라당 덕분에 차명계좌도 개설하고 편법증여도 자행하게 되었으니 뭐라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황송할 따름이다.

정치인을 비판하려면 마치 만주로 독립운동 떠나는 독립군 같은 비장한 심정으로 주변정리를 고민해야 하는 나라가 과연 정상적인 나라인지 묻고 싶다. 고민의 원인을 제공한 정당과 그 당의 대통령 후보 역시 제대로 된 공당이나 정상적 정치인인지 견적을 낼 수 없는 노릇이다. 한나라당을 밥맛없어 하고 이회창 총재에 호감을 갖지 않은 개혁적 성향의 유권자와 국민들이 수백 수천만 명에 이른다. 이들에게 일일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요량이라면 한나라당내 율사 출신 금배지 나으리들은 당분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리라.

정경희 선생을 지지하는 홍세화 선생의 칼럼 말미에 있는 표현을 빌어 결론을 갈음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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