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들을 음악이 너무 없어서 칼라스의 Normade라는 판을 들었다. 칼라스를 처음 들은 건 어떤 미대다니는 아줌마의 집에 밥먹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15년 쯤 되나? 그냥 개인적 취향이지만, 칼라스도 별로 안 좋아할 뿐더러 소프라노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한다. 물론 40~50년대 성악과 60년대 이후의 성악의 변화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난 옛날식의 음감있는 목소리를 더 좋아하는 편인 것 같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60년대 이후 성악이 그야말로 음량 좋고 소위 소리통 좋은 사람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디트리히 피셔-디카수를 제일 좋아하는 건, 그의 바리톤 음색도 그렇지만 성악가들이 정감과 표현력으로 승부하던 옛날의 향수가 남아있고, 바리톤 전성기의 그리움 같은 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디트리히 피셔는 CD로만 10장이 넘고, LP도 20장 가깝다.
제일 좋아하는 음악은, 그렇지만 기글리가 부르는 헨델의 “Ombra Mai Fu” 헨델의 오페라 Serse 중에 나온다. 요즘은 많이 부르지는 않지만, 50년대 까지만 해도 좀 한다는 사람들이 한 번씩은 다 불렀던 레파토리이다. 중학교 1학년 때 매일 이 노래를 들으면서 잠들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겹쳐지면서, 더 좋아한다.
그런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도밍고와 파바로티의 노래들은 싫어한다. 정확히 얘기하면 괴로워 한다. 도밍고의 아버지가 “너는 노래가 뭔지 몰라”라고 했다는 전설을 지금도 나는 곱씹으면서, 쟤는 노래를 잘 몰라... 호세 카렐라스는 좀 낫지만, 그래도 50년대 바리톤 노래들과는 차이가 좀 있다.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이다.
카운터 테너는 절대 듣지 않지만, 김동규의 노래만은 듣는다. 김동규는 또 다른 감성과 생각이 녹아 있다.
칼라스는 거의 안 들었는데, 칼라스를 제일 잘 나오게 맞추어 놓았다는 이유로 이름을 칼라스라고 붙인 스피커를 4년 전에 사면서 가끔씩 칼라스를 듣는다. 노래는 정말 잘 하지만, 가끔은 초음파 발생기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음악이 아니라 지금 초음파를 감상하는 중이라고...
스피커 기준으로 하면 칼라스의 고음은 중역대에 해당한다. 만약 3 way 스피커라면 중역을 담당하는 스피커에서 이 소리가 나오고, 2 way라도 고음을 담당하는 티위터에서 나올 정도로 고음파는 아니지만, 왠지 칼라스를 들으면 초고음파를 듣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나는 조수미는 듣지 않는다. 소프라노도 원래 안듣고, 메조 소프라노들을 더 편하게 듣기 때문에, 아무리 누가 신의 목소리 아니라 신 그 자체라고 하더라도 감흥이 없는데 어떻게 듣나?
요즘은 자주 보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내 주위에는 조수미를 아주 좋아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50대 초반의 좌파 교수 몇 사람이었는데, 집에서 소주 마시면 꼭 조수미를 트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노래를 잘 하다니... 너무 본지가 오래 되는 윤이 그 중에 한 명이었다. 별로 그렇게 좋아보이지 않는데, 하여간 윤은 그렇게 좋아했다.
조수미에게는 서울대 시절의 전설 같은 얘기들과 그리고 또 이런저런 전설과 소문이 많이 붙어 다닌다. 원래도 신경도 쓰지도 않았고, 또 사람들이 좋아하든 말든, 거의 신경쓰지 않는다.
뮝운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여간 프랑스 TV에서는 이 사람을 뮝운충이라고 부른다. 정명훈의 불어발음이 그렇다. 나도 TV에서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에는 화면의 얼굴을 확인하고야 그런줄 알았다. 식사를 같이 할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어차피 나 한 명 정도 빠진다고 티가 날 것도 아니라서 한 번도 간 적은 없다. 별로 그렇게 관심이 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만약에 정면으로 만난다면 좋지 않는 비판 관계로 만날 가능성이 더 많을 것 같아서 그렇다.
그렇지만 그 시절에 송두율 교수가 왔을 때는 몇 번 식사를 했다. 궁금하기도 했고, 정말 그렇게 하버마스가 우리가 존경하고 따라가야할 사람인가, 듣고도 싶었다. 하버마스 얘기는, 그러나 한 마디도 안했다.
비슷한 이유로 나는 조수미에게 관심이 전혀 없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기분 좋아지자고 음악 듣는 건데 기분까지 상해가면서 게다가 음악도 별로 취향이 아닌데 억지로 듣고 있을 이유는 별로 없다.
TV에 나와서 ‘독도는 우리 땅’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해서 조수미가 열심히 부르고 있는 걸 보면서, 갑자기 윤과 혹은 그런 그런 서울대 출신의 좌파 50대 아저씨들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오케스트라가 시대의 아픔이나 소외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역사에 몇 번 있기는 한데, 대개는 극우파나 왕당파의 손을 들어주었고...
한일 갈등이 첨예화되어 일본의 극우파와 한국의 극우파가 바야흐로 자웅을 겨루는 이 시점에, 조수미는 독도는 우리땅을 부르고 있다. 자꾸 윤과... 또 그 몇 사람의 50대 좌파 얼굴이 생각난다. 지금 그들도 이걸 보면서 속상해할까, 아니면 조수미 노래 잘 부른다고 좋아하고 있을까?
10년 전에 카페 맑시스트라는 말이 유행을 할 때, 나는 소주 맑시스트라고 애써 방어하던 때가 있었는데...
문화와 예술, 그래서 어렵다. 아름다움과 옳음, 이미지와 형상, 그리고 이걸 포획하려는 또 다른 커다란 힘. 그래서 늘 문화에 관한 생각은 어렵다.
그러나 EBS에 나온 이상은의 노래 다섯 곡을 들으면서 간만에 들뜬 토요일 밤의 기분을 조수미의 ‘독도는 우리 땅’이 싹 망쳐놨다. 앞으로 한 시간은 더 이런 류의 노래를 조수미는 계속 부르고 있을 것 같다. 이 속초에서 열리는 이상한 음악회 때문에 기분이 많이 안좋아졌다.
* 필자는 경제학박사로 초록정치연대(
www.greens.or.kr) 정책실장입니다. 최근
<아픈 아이들의 세대 - 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뿌리와이파리, 2005)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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