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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16강 저런 16강
한나라당 치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희준 Cinema Jockey   기사입력  2002/06/15 [19:26]
{IMAGE1_LEFT}16강 진출의 쾌거로 전국이 달아올랐다. 시청 앞에 운집한 군중의 함성이 울창한 빌딩숲을 헤치고 충무로까지 메아리 친다. 길가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간간이 부르는 만세삼창이 술 취한 취객의 고성방가로 불편하지 않고, 심야까지 연장운행된 지하철을 가득 메우고 돌아가는 붉은 악마들의 쉬지 않고 쳐대는 박수소리와 끊이지 않고 외치는 연호도 전혀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동네 초입의 도로를 막고 서서, 세워진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을 조명으로 즉석 춤판을 벌이는 젊은이들 역시 조금도 밉살스럽지 않다. 평소 같았으면 짜증을 부렸을 택시기사 아저씨가 규칙적으로 경적을 울리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그들에게 박자를 맞춰준다. 사상 최초의 16강 진출을 축하하는 들뜬 분위기로 꽉 찬 서울거리 새벽녘까지 잠들 줄을 모른다.
- 사진출처 : 스포츠투데이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둬 정권탈환의 9부 능선을 넘었다는 한나라당 치하의 이틀째 밤을 맞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풍경이다. 레드콤플렉스를 조장하며 정권을 연장해왔던 집단이 지방정부의 대부분을 장악한 그 시간, 전국 방방곳곳은 그들의 압승을 조롱하고 야유하듯이 붉은 물결로 출렁거렸다.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모든 나라-미국은 예외로 치자-들이 농도와 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축제분위기로 충만해 있다. 16강 진출에 실패한 나라의 국민들은 때로는 조용한 침묵으로 때로는 과격한 소요로 자국팀의 탈락이 낳은 아쉬움과 침통함을 애써 달랜다.

그러나 16이라는 숫자가 항상 사랑과 애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열 여섯 명의 광역자치단체장을 배출한 양대 정당은 승리의 기쁨에서도 패배의 슬픔에서도 국민 대부분의 관심권에서 철저히 벗어나 그들만의 썰렁한 월드컵을 치르고 있다. 11명이나 16강에 진출시켰다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득의양양하는 한나라당 사람들의 표정은 출전자 모두가 입상하는 마을 경로당 노래자랑 시상식처럼 여겨져 쓴 웃음만 자아낸다. 축하받는 이들이나 축하하는 이들이나 면면을 찬찬히 뜯어보면 퀘퀘하고 노린내 나는 낡은 기원에 앉아있으면 딱 어울릴 구태의연하고 고루한 인물들 뿐이다.

자신들이 초래한 예견된 지방선거 참패 결과를 놓고 서로 앙앙불락하는 민주당도 우습기는 마찬가지다. 지방선거 결과가 양호했을 경우 동교동 실세들과 대통령의 세 아들이 남김 없이 연루된 각종 게이트를 유야무야 넘겼을 개연성이 농후한 그들의 꼼심을 고려하면, 오히려 고소한 생각마저 든다.

나는 노무현이 가엾다. 김민석에 떼주고, 진념에 잘라주고, 동교동계에 뭉텅이로 나눠준 지지도가 성할 리 없었을 테고,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가던 노풍은 그만큼 잦아들었을 게다. 한화갑도 버리고, 박상천도 버리고, 한광옥도 버리고, 민주당을 통째로 버리고 노무현이 마음 맞고 궁합 맞은 의원들과 따로 살림을 차려주길 바란다. 망해가는 집안 일으키자고 억지 시집간 맏며느리 신세를 걷어차고, 국민을 배우자 삼아 개가할 것을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민심일 것이다.

노무현은 노풍에 무임승차하려는 동교동계에 단호히 승차거부를 했어야 했다. 여전히 DJ와의 단호한 결별을 주저하는 노무현이 답답하다. 왜. 김홍일의 의원직 사퇴를 요구하지 않는지, 왜 동교동계의 당직 완전배제를 관철하지 못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IMAGE2_RIGHT}한나라당 치하의 서울은 유난히 신문 장사치들의 영업의 자유가 도드라진다. 집에 있으면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선풍기와 퀵보드를 공짜로 주겠다며 거대신문회사 지국원들이 문을 두드린다. 이들만이 한나라당 치하에서 제세상을 만나 활개치는 격이다. 자칭 국민작가의 독기서린 궤변이 아니라 신문판촉원들의 무례한 방문에서 홍위병의 참모습을 발견한다.

누구나 실감했겠지만 이번 지방선거를 하기 위해 나는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떼어놓아야 했다. 하지만 선택을 하느라 별로 고심은 하지 않았다. 서울시장은 민주노동당 후보자에 한 표를 던졌고, 정당선호투표에서는 사회당을, 그리고 구청장과 시의원에서는 민주당 후보를 찍었다. 기초의원의 경우에는 두 명의 출마자 모두 함량미달이라 두 사람 전부에게 기표하여 아예 무효표를 만들어 버렸다.

1인 2표제가 도입된 투표과정은 별로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았다. 16강에 진출하는 경우의 수를 국민학생 조차 수월하게 계산해내는 나라에서 이게 난해하다고 푸념하는 것은 시뮬레이션 액션에 다름 아니다.

나는 오히려 투표절차가 더 까다롭고 난이도가 상승했으면 좋겠다. 참정권의 진입장벽도 지금보다 훨씬 높아졌으면 한다. 차 한 대 모는 운전면허조차 종류에 차등을 두어 필기시험은 물론이고 기능시험과 주행시험까지 통과해야 발급하는 상황에서, 나라의 중차대한 운명과 직결된 권력의 향배를 결정하는 선거권을 누구에게나 생후 일정 시점에 도달했다고 무조건 부여하는 처사가 올바른 것인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선거 당일 투표를 팽개치고 에버랜드로, 롯데월드로 놀러간 이들을 나는 감히 국민사기극의 공모자라 말하고 싶다. 이른 아침부터 투표장 앞에 길게 줄을 짓고 늘어섰던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주머니 들이야말로 어쩌면 한국정치의 진정한 주역이리라. 조직된 노동자보다 동원된 유권자가 현실 정치지형을 주조하는데 보다 강력한 작용을 하는 것이 한국정치의 현주소고 대의정치의 맹점이다. 비례대표와 정당지지도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민주노동당은 결국 울산시장 선거전에서 패배했다. 경제투쟁에 나선 노조의 행동력은 치열하지만 정치적 실천력에 있어서 노조는 저열하다.

66년 월드컵에서 북한의 돌풍을 잠재운 포르투칼에게 같은 민족인 우리는 36년만에 멋지게 설욕하며 예산탈락의 수모를 안겼다. 북한축구 전설의 제물이 되었던 이탈리아를 우리 역시 한국축구 신화창조의 희생양으로 삼아 북한이 등정했던 16강 고지로 도약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16강 전에서 이탈리아의 벽을 넘지 못하더라도 국민은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러나 월드컵이 끝나고 붉은 악마의 환호성이 사라진 텅 빈 서울시청 광장은 많은 이들을 허탈하게 할 것이다. 서울시청 시장실에 내걸릴 한나라당 당기는 우리를 서글프고 우울하게 한다. 민족의 화해와 교류의 전환점이 되었던 6.15 남북 공동선언을 이유없이 할퀴고 발길질해 썰렁하게 만들었던 한나라당에 소속된 시장과 구청장들이 지배하는 수도 서울의 6월 15일 토요일 오후는 왠지 모를 착잡하게 사로잡혀 더더욱 썰렁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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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6/15 [19:2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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