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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론', 임지현과 그 적대적 공범자들
[논단] '대중독재-민족주의'에의 동의로 귀결된 탈민족주의 담론의 허구
 
숨인씨   기사입력  2005/05/18 [21:52]

욕하며 돕는 민족주의와 오리엔탈리즘
 
“내 몸 안의 세계시민주의와 제3세계주의는 자주 길항하며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나야 제3세계의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이니, 그게 유감스러울 리는 없다.”
“내가 미국인이 아니었다면, 미국을 비판하면서도 그렇게 신바람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영우에 심지어 나는 미국 비판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편협한 민족주의자로 비치는 것이 싫다. 그러나 나는 미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민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다.” (고종석의 소설 ‘피터 버갓 씨의 한국 일기’ 중에서.)
 
“이(리)영희 선생을 옥고로까지 몰고간 글을 필자가 관여하는 잡지 ‘페리페리’(Peripherie)에 독일어로 번역소개하자 많은 독자들은 (...) 국수주의 냄새가 난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송두율, <역사는 끝났는가: 송두율 사회사상집> 중에서.) 
 
박노자: 저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역시 이 시대의 마지막 민족주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습니까?
리영희: 난 민족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보편적 가치에 더 충실한 사람이에요. (<한겨레 21> 인터뷰 중에서.)
 
위에서 인용한 고종석의 소설은 피터 버갓이라는 진보적인, 그러나 오만한 학자의 일기를 통해 서구 지식인의 위선을 폭로하는 작품이다. ‘세계시민’이라는 자부심은 고종석의 지론과 포개어지는 것이지만, 작가와 화자는 대립한다. 피터 버갓은 왜 세계시민주의자이면서도 제3세계의 민족주의를 옹호한 것일까? 제3세계의 특수한 상황을 헤아려서일까? 잘해야 반만 그렇다. 그가 제3세계의 해방투쟁을 지지하는 동시에 그 흐름을 세계주의로 승화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제1세계에는 선진적인 세계시민주의를 바라면서도 제3세계의 민족주의를 그러려니 하고 여기는 것은, 그가 미국인으로서 눈길을 내려깔고 제3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런 오리엔탈리즘적 오판은 민족주의를 바라보는 시선 뿐 아니라 민족주의를 규정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친다. 리영희는 ‘나라’라는 말까지 꺼려해 ‘사회’라는 표현으로 수정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졸지에 국수주의자로 평가받은 사정에는 외세 및 분단과의 사투를 유럽의 민족주의와 등치하는 몰역사적인 시각이 깔려 있다. 물론 파시스트도 처음에 해방적 민족주의자였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리영희가 민족문제 앞에서 가진 태도는 ‘민족’이란 개념에 봉사한 결과가 아니라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라는 고뇌의 산물이다.     
 
자연히 현실에서 제1세계의 오리엔탈리즘과 제3세계의 민족주의는 손잡지 않으면서 서로를 돕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피터 버갓의 결론에는 민족주의에 머무르는 제3세계의 한계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또한 민족주의로나 제국주의를 극복한다는 억지는 서구의 비웃음을 유발하기 충분하다. 오리엔탈리즘은 민족주의의 부아를 돋우고, 민족주의는 오리엔탈리즘의 편견을 만족시킨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시민인 에드워드 사이드가 양자를 모두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닐까.
 
‘열린 민족주의’? 창살 없는 감옥?
 
별자리가 별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듯 집단은 개인들의 모임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 상식은 전제권력에 의해 부정되었고, 20세기에도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에게 학살당했다. 민족주의도 ‘개인’을 박탈했다. 패권적 민족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를 동일시할 수는 없으나, 다른 측면으로는 후자의 해악이 더 컸다. 전자는 패퇴하였지만, 후자는 선민의식에 기대어 자신들의 또다른 악행을 지난 핍박으로 정당화한다. 구태여 이스라엘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예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그렇다. 민족주의는 식민지배를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부도덕’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남이 우리를 짓밟는 굴욕’으로 이해했고, 옛 강자에게 보복하면서 우리보다 약한 자들을 능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괄시받는 건 내부의 ‘개인’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밖에서’ 들여와 ‘위에서’ 키운 것이었고, 아무리 민족을 운운해봐야 모두가 벗이 될 수는 없었다. 바깥 나라의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이 자기네 동포의 인권을 존중할 리 없었다. 하지만 관제 민족주의는 안으로부터의 반발을 반민족적인 매국으로 덧칠하고 단죄한 힘을 가졌었다. 가령 김영삼은 외신과의 회견에서 한국민주화를 도우라고 미국에 촉구함으로써 유신 정권의 좋은 먹잇감(“사대주의자”)이 되었다.
 
자유, 인권이나 민주주의 그리고 평화 같은 것들은 한번쯤 비판적인 검토를 거쳐야겠지만, 모든 인류가 향유해야 할 보편적 가치임에는 틀림 없다. 한국내 대다수의 민족주의자들도 이를 지향한다고 밝힌다. 하지만 일제와 군부독재를 통과한 지금, 해방의 디딤돌이던 민족주의는 폐쇄성과 배타성으로 말미암아 진보의 걸림돌로 전락했다.
 
그러자 ‘열린 민족주의’라는 수사로 보편적 가치와 민족주의를 봉합하려는 시도가 생겨났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를 출간했을 무렵의 임지현도 그무렵에는 ‘시민적 민족주의’를 이야기했다. 필자는 동의하지 않았다. 민족주의가 진정으로 열린 이상 그것은 민족주의라고 할 수 없다. 더구나 시민적인 이념이라면 그것은 민족주의가 될 수 없다. 인권과 민족이 충돌할 때 인권의 편을 드는 사람은 ‘민족을 사랑해서 한 선택’이라고 해도 결코 민족주의자라고 일컬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민주적 민족주의’를 포기하면서 빚은 필자의 결론이었다.
 
임지현과 민족주의의 대립과 공모
 
임지현도 이제 ‘시민적 민족주의’를 폐기한 것 같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의 손을 들어줄 수 없다. 그는 민족주의와 반대 방향으로 가면 탈민족주의의 성과를 취할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듯 민족주의자가 개입한 과제들에 관해 시큰둥하거나 반대한다.
 
필자는 그가 ‘간도되찾기’ 운동을 신랄히 비판하는 것은 대체로 수긍한다. ‘고구려’를 변경사로 보자는 주장은 적어도 기존 학설의 경직성에 반작용을 가하는 도구는 된다. 엄연히 독도가 ‘섬’이 아니라 ‘바위’라는 근거를 들어가면서 변경의 땅으로 이해해서 한국 영토인 동시에 시마네현에게도 권리를 주자는 견해도 한가롭기는 하나 들어는 볼 만하다. 허나 친일청산에서 그가 내비치는 탈민족주의는 인정할 수 없다. 필자가 민족주의자라서가 아니라, 그게 탈민족주의가 갈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지현의 ‘대중독재론’을 과거사청산에 대입해 보자. 과거사가 청산 안된 것은 지배권력 뿐만 아니라 기층민중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 기층민중이 가진 사고방식은 다름아닌 민족주의이고, 민족주의 가운데서도 저열한 혈통주의다. 일본놈은 미워하지만 그에 달라 붙은 동족은 미워하지 말자는 것이다. 예컨대 ‘독도는 우리땅’임을 절규하는 국민들의 다수는 박정희의 일본군 복무전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심지어 민족주의는 일제부역을 두둔하는 논리로도 작동한다. 이광수, 최남선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내선일체를 택했다는 것이다. 공고한 한미동맹을 외치는 수구세력도 자신이 얼마큼은 민족주의적이라고 자부하지 않을까.
 
사실 친일청산에 참여한 세력의 주류는 단연 민족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일제부역을 명확히 규명하고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임지현은 ‘단죄’를 못마땅해 하지만 그 대상은 이미 죽어 사라졌다. 서울에서 광주에 가려면 적어도 부산행 여객들과 충청권까지는 동행해야 한다. 그럼에도 임지현은 서울 시내를 맴돌며 평양에나 가볼까, 하는 격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임지현의 속류화된 탈민족주의를 두고, 민족주의자들이 “저래서 세계시민주의는 허구지”라고 수군거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이는 또한 탈민족주의의 속류화를 독려하게 될 것이다.
 
‘일상적 파시즘’과 대중독재론
 
필자는 임지현이 ‘일상적 파시즘’을 펼 때 기꺼이 환영하면서도 그 용어에 불만을 가졌다. 서양이든 한국이든 파시즘의 어법이나 해석은 많은 오류를 낳았었다. 스탈린이 코뮌테른에서 유포한 것으로 소문이 난 속류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파시즘을 단순히 ‘자본주의의 발악’쯤으로 규정한다. 임지현은 이미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은 바로 파시즘이 아니었나’라는 반문으로 이 위험을 비껴간 바 있다. 그러나 파시즘을 ‘폭력과 테러로 점철된 권위주의’로 정의하는 나이브한 관점에서 그는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임지현과 그 외의 논자들이 지목한 ‘일상적 파시즘’의 사례들은 권위주의인지 파시즘인지 확실하지 않았거니와, 전근대적 가부장주의의 후손에 불과한 것들도 있었다. ‘파시즘’이라는 어휘가 붙은 것은 아마도 그 말이 뽐내는 섹시함 덕분이리라.
 
한국의 독재를 무턱대고 파시즘으로 수식하는 것도 잘못이다. 이승만 정권은 문민독재였고, 전두환 정권은 단순무식한 국가 테러리즘을 좇았으니까 말이다. 3공화국은 제한적으로나마 다원주의가 숨쉬었으며 정치동원력이 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전체주의도 아닌 권위주의 시대였다. 유신체제는 미국 정권과 갈등을 빚으며 통일과 반공을 뭉뚱그리며 총화단결을 시도한 만큼은 파시즘에 근접했지만, 진짜 파시즘에는 다소 못 미쳤다. 무솔리니, 히틀러 치하에서는 여당마저 무력했던 시절이 없었다. 또한 파시즘은 민주주의 제도가 정착된 시점에서 대중들의 위기감, 집단우월주의 등으로 출발하지만, 한국은 기껏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경우였다.
 
필자는 임지현이 파시즘을 붙잡는 대신 마련한 ‘대중독재’라는 틀은 근현대 세계의 여러나라의 독재들이 지닌 각각의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보편적인 기준을 세워보기 위한 노력으로 짜여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대중독재론은 절실한 문제의식을 쏘아올려 몇가지 성과를 이룩하기도 했다. 조희연이 ‘전통화한 지배의 단절’과 ‘평등주의적 전통’을 논하자, 임지현(과 공동작업한 이상록)은 이민족 지배와 자민족 지배가 외형적으로는 단절되었으나 ‘국민만들기’ 프로젝트는 계승되었다는 점, 평등주의 전통은 내셔널리즘으로 전유, 회수되었다는 점을 들어 한국현대사의 심층을 분석할 현미경을 제작한다. 또한 박정희시대의 딜레마였다고 여겨지는 통일과 반공이 모순적 관계에 그치지 않고, 함께 추구할 목적으로 통합되었다는 지적도 옳다. 물론 박정희 독재의 모순적 복합성을 들추는 조희연의 작업도 옳다. 그러나 강압의 헤게모니를 경계한다는 측면에서 임지현의 작업은 한결 신선하다.
 
과거사청산이야말로 대중독재와의 싸움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임지현은 실천적 오류를 범한다. 기성의 단순한 세계관에 도전하는 임지현의 새로운 작업이 현실을 도리어 단순화하는 것(조희연의 반론의 기조다)은 차라리 둘째 문제다. 심각한 것은 ‘친일문제’에 이어 또다시 과거사청산작업을 폄하하는 것이다. 임지현은 정녕 당대에 독재의 주역이거나 최소한 공범이었던 대중이 최근에 과거청산에 매달려 스스로의 죄를 사하고, 사법적 추궁으로 사회적 망각을 부추긴다고 생각하는가. 한 기사를 인용한다. 
 
최근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공과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국민 대다수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과거사 규명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여론조사전문기관 TNS에 의뢰, 지난 26일 전국의성인남녀 7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기 여론조사(표본오차 95%±3.7%)에 따르면 응답자의 81.7%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경제성장 등 잘한 점이 더 많다'고 응답했다. '독재, 인권탄압 등 잘못한 점이 더 많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응답자는 15.6%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박 전 대통령 시대에 대한 과거사 규명작업 움직임에 대해서는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찬성한다'는 의견이 65.4%로, '야당 탄압 의도가 있으므로 반대한다' 응답(28.6%)보다 높았다.
 
대중은 언뜻 과거사청산을 떠받치는 것 같다. 그러나 박정희에 대한 지지도가 80%를 돌파했다. 과거사청산 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면, 그를 지지하는 팔할과 과거사청산을 지지하는 육할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국민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현 정부와 민주노동당 등의 진보진영 그리고 시민단체의 과거청산 추진은 대중의 광범위한 동의를 얻지 못하는 실정이다.
 
차라리 당대의 대중들이 박정희와 불화한 정도가 더 크다. 물론 새마을운동이나 유신헌법안의 찬성률 등은 대중이 그저 강제동원되지 않고 박정희 독재에 협조했는지를 입증한다. 그러나 박정희가 5, 7대 선거에서 공작 없이는 당선될 수 없었다는 점, 말기에 대규모 항쟁이 일어난 부산, 마산은 물론 대구에서조차 강력한 반독재투쟁이 벌어졌다는 점, 기어코 총선에서 야당보다 낮은 득표율을 기록하게 되었다는 점을 봤을 때, 대중의 여론은 임지현의 문제의식을 거슬러서 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사청산은 대중들의 안일한 의식이나 충족시키며 사회적 망각을 부추기는 게 아니라, 거꾸로 혁신적 엘리트들이 우매한 대중들과 전면적으로 투쟁하는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때 겪을 크나큰 사회적 고통은 소수의 옛 지배자들을 처단하고 끝나는 짧은 통증이 아니라 오늘 한국인들이 가진 저열한 사고방식을 폭로하는 뼈를 깎는 아픔일 것이다.
 
임지현의 과민함과 불민함
 
노무현 대통령이 참여정부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또 2003년 10월 ‘재신임 국민투표’를 천명했을 때, 임지현은 자신의 대중독재론을 응용했었다. 그렇지만 임지현은 일종의 매트릭스를 분석한 셈이다. ‘참여정부’에 기층민중이 달려 들어 참여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다. 적잖은 하층 노동자, 농민, 영세 자영업자들이 지지하는 것은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한나라당, 그리고 박정희라는 건 새삼스러운 진실이 아니다. 아무래도 노무현식 ‘참여’에서 주역은 자신의 주요 지지계층-30대 남자 사무직 노동자나 신중간계급일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역대 정부 가운데 가장 엘리트주의적이다. 그가 국민투표를 천명한 밑바닥에도 포퓰리즘 따위가 아니라 의회권력에 포위된 상황을 직접민주주의로 해결하려는 정치공학이 깔려 있을 따름이다.
 
아, 그 과민함. 이만하면 임지현의 혜안에 포착되지 않을 파시즘적 징후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미숙하고 아둔한 필자도 잡아낸 것들을 그는 좀처럼 가리키지 않는다. 우선 그가 종종 얼굴을 내미는 조선일보는 ‘대중독재’의 전형적인 앞잡이다. 그들은 심심하면 신자유주의적 보수 정권에게 포퓰리즘이라는 공격을 가하지만, 민중선동을 포기한 적이 없다. 임 교수의 탈민족주의를 소개하는 한편으로 이제 쇼비니스트를 닮아 가는 김지하의 고구려 예찬시를 올리기도 한다. 문화면에서 <자유의 미래> 따위를 소개하며 참여민주주의로 인해 의회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투로 떠들지만, 막상 의회가 개혁입법이나 행정수도 건설을 통과하려 들면 국민여론을 들어 반대한다.  
 
필자는 2004년도에 여론조사를 통해 한국사회의 특이한 이념적 상황을 발견했다. 진보정치의 대표적 정책인 부유세가 5, 60% 가량의 지지를 끌어내고 있던 반면, 양심적 병역거부는 지지율을 입에 올리는 것이 불필요했다. 필자가 과민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계급의식’은 확산되지만 ‘자유의식’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방증이었고, 고로 신자유주의를 싫어하되 진보적인 방향으로 틀지 못하면 이러다 파시즘으로 치달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분만케 했다. 
 
박정희는 분명 일본식 파시스트였으나 그가 집권하는 동안에도 한국 사회는 순수한 파시즘에 이르지 않았다. 앞으로도 파시즘 체제가 도래하리라 상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파시즘 운동은 현실로 나타났다. 실재했던 박정희는 민중의 열망이 아닌 한밤의 급습으로 떠올랐고, 민족적 민주주의와 청렴결백을 외치는 군인정치가이면서도, 매판적인 정치를 일삼으며 사생활도 문란했다. 그렇지만 요즘 이른바 ‘박통진리교’로 불리우는 국민들에게 박정희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그들이 섬기는 박정희는 가공된 박정희이며, 그 신화를 토대로 파시즘 운동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시장에서 유세하는 박근혜와 그를 응원하는 아줌마들, 그리고 폰카메라를 든 중고생들, 정치한 사상보다 순결(?)한 열정에 기대어 폭발하는 듯 궐기한 박사모에게서 필자는 파시즘 운동의 그림자를 본다. 소위 ‘뉴라이트’가 제창하는 ‘보수혁명’에서는 ‘참여정부’보다 몇백배로 큰 파시즘의 울림을 듣는다. 만일 그들이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까지 옹호한다면, 이는 파시즘이 급진화 단계에서 국가사회주의, 생디컬리즘의 힘을 빌었던 것과 완벽하게 닮게 된다(낭만주의나 신비주의와 같은 파시즘의 예술적 요소는 이미 갖춰져 있다 그 주역은 서정주, 이문열과 이인화, 김진명 등이다). 바로 지금이다, 파시즘, 대중독재의 시대는. 
 
진정한 세계시민의 길:‘구체적 보편’
 
조희연은 대중독재론이 우익화할 위험을 안고 있다며 비판했고, 임지현은 “‘혐의’의 정치학과 ‘오독’의 논리학”이라고 맞받았다. 그러나, 오독의 책임을 임지현에게 물을 수는 없어도, 극우 헤게모니에 봉사한다는 비판이 마냥 선험적인 혐의에서 비롯되지는 않았다. 수구세력은 그를 즐겨 인용하고, 그는 이론의 세계에서와는 달리 현실에서 수구세력과의 동맹고리를 끊어내지 않았다. 민족주의와 일상적 파시즘, 대중독재를 향한 그의 저항은 결국 동의가 되고 말았다.
 
필자는 임지현이 개인주의자일 거라고 기대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간의 작업들이 가능했겠는가. 그렇다면 임지현은 보다 더 섬세해져야 한다. 이를테면 김우창이 주창한 ‘구체적 보편’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 길은 김우창 스스로도 잘 실천했는지 불투명할 만큼 가기 힘든 길이다.
 
내셔널리즘을 굳이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로 구별하고 그 둘이 매우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을  필자는 반대한다. 그렇지만 그 범주에 들어간 ‘개별자’들의 차이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 시대적 상황이 아니었다면 세계시민주의자가 되었을 민족주의자도 있다. 박홍규는 열린 민족주의는 아직 유효하다고 했지만 박노자는 ‘민족주의’란 개념을 굳이 쓸 필요가 있느냐, 고 한다. 필자의 눈으로는 둘 사이의 거리는 거의 없다. 아니, 박홍규가 박노자보다 민족주의를 더 혐오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혹시 임지현은 ‘국민국가와 민족주의는 운명공동체다’는 명제를 민족주의자들과 공유하지는 않았나? 민족주의자들은 국민국가를 빌미로 민족주의의 생명력을 주장해 왔고, 속류 탈민족주의는 민족주의의 극복을 의도하다가 국민국가를 무시하였다. 사람이 속한 공동체는 크게 지역적 공동체와 포부의 공동체로 나뉜다. 가령, 지역적 공동체에서 필자는 박근혜와 동포가 되고, 포부의 공동체에서는 아웅산 수지와 동지가 될 수 있다. 후자를 백안시한 민족주의를 극복하려 전자를 외면하는 것은 세계시민주의가 아니다. 투쟁하건 타협하건 박근혜와 더불어 사는 것도 현실이니까.
 
더구나 세계시민주의를 위협하는 적은 자잘한 민족주의들 뿐만이 아니다. 초국적 대자본이 주도하는 패권적 세계화는 생명중심의, 아래로부터의, 자유평등의 세계화를 짓밟고 있다. 국민국가도 세계시민주의의 적절한 수단이 된다. 해외투기자본이나 무분별한 자유무역 등의 사안에서 특히 그렇다.

임지현이 진정한 세계시민주의자라면 ‘열린 민족주의’든 ‘시민적 민족주의’든 진일보한 흐름을 발굴하여 ‘낮은 단계의 인류애’로 재조명하고 종국에는 세계시민주의로 이끌어야 한다.
 
임지현이 정말 대중독재를 넘어서고자 한다면 독재의 사령탑과 상종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실현되어야 그에게 “혐의”를 두거나 그의 텍스트를 “오독”하는 일은 비로소 실패할 것이다. 
* 글쓴이는 경북 구미시 시의회 의원(무소속)입니다.
2010년 6.2지방선거에서 영남지역 최연소(27세) 기초의원에 당선돼 현재 시의원으로 활동 중입니다.
2002년 <대자보> 필진으로 참여한 이래 다년간 정치칼럼 등을 연재해 왔으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대자보> 독자들과 만납니다.
기초의원으로서 풀뿌리 정치 현장에서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블로그 : http://kimsoomi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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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5/18 [21:5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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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휘파람 2007/06/15 [19:09] 수정 | 삭제
  • 민족주의라는 말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언제부터 적용해야할까 하는 고민에 이 글과 댓글들을 읽었습니다. 오히려 댓글이 더 설득력있게 느껴지네요. 아이들에게 삼국시대의 신라의 영토확장(?)을 가르치면서 과연 그 시대에도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을까? 신라입장에서는 당이나 백제나 고구려나 왜나 다 외국이지 않았나요? 현재의 정치적 입장에서 글을 쓰자면 별 말을 다하겠지만 제가 궁금해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답을 얻을 수가 없었네여~
  • 김수민 2005/05/20 [17:12] 수정 | 삭제
  • 당연히 임지현 교수식으로 하면 과거청산은 머나먼 여정일 수밖에 없죠. 머나먼, 이라기보다는 영원히 가지 않은 길이 될 것입니다.
    임지현 교수의 의견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고 보존하자, 는 데 그칠 뿐입니다. 구체적인 노선은 제시한 적이 없고, 오히려 법적 제도적 청산에 대해 부정적인, 혹은 님의 견해를 존중해 백보양보하더라도 회의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 아리송 2005/05/19 [13:50] 수정 | 삭제
  • 독해실력이 부족해서인지는 몰라도 요점이 뭔지 들어오지 않는군요. 계속 임지현 교수의 어떤 주장은 괜찮다, 근데 이건 맘에 안 든다... 이런 이야기의 단순한 반복에 양념으로 이것저것 끼워넣은 이야기들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입니다. 자, 그래서 임지현 교수의 논지에서 결정적인 오류가 뭡니까? 얼핏 드는 느낌이 조선일보에 이용당하기 괜찮은 부분이 있다는 점이 영 맘에 안 드시는 모양인데 그런건가요?

    그리고 임지현 교수가 과거사청산을 폄하한다는 것은 그의 주장을 잘못 이해했다고 봅니다. 임지현 교수는 현 과거청산 단계가 무의미하다는게 아니라, 진정한 역사청산을 위해서는 지금 논의되는 단계 이상으로 대중들이 스스로의 묵과에 대해서 털어놓고 반성할 수 있는 데까지 가야한다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지요. 역사학자로서 당연히 장기적인 목표에 대해 논할 수 있는 법이고, 저 스스로도 과거청산이라는 것이 앞으로도 머나먼 여정이구나 라는 좋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 2005/05/19 [10:18] 수정 | 삭제
  • 임지현의 탈민족주의는 결국 제국주의에 대한 투항이다.
    예컨대, 임지현 말대로 근대국가가 형성되면서 각국의 국경이 획정되어 간다. 그런데 영토의 경계는 대체로 힘의 논리가 관철되지만, 서로 분쟁의 대상이 되는 영토는 힘으로 빼앗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역사성과 실효정 지배 등에 따른 타협의 결과이다. 따라서 독도도 마찬가지이다. 뭐 전근대국가에서는 국경이 명확하지 않다느니 하면서 독도가 우리땅이라고 주장할 명확한 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힘에 의한 복속이 아니라면 우리땅임을 주장하고 이를 입증해감으로써 자국의 영토로 획정짓는 것이 근대 국가의 국경획정 과정이다. 그런데 이런 엄연한 현실을 놔두고 국경이 모호했었으니 우리땅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그럼 한평의 땅이라도 더 빼앗아 가려는 제국주의자들에게 독도도 울릉도도, 그밖에 변경의 많은 영토가 국경이 분분명하니 떼주지 그래? 임지현 말대로 서로 영토 쟁탈전이 벌어진 근대 이후에는 결국 국경 획정 과정에 우리만 손놓고 제국주의자들의 힘의 논리에 따라 그냥 넘겨주자는 주장과 전혀 다르지 않다. 제국주의가 비판의 대상이고 투쟁의 대상이듯 근대 이후 국경 획정 과정에서는 땅 한편이라도 자국의 영토에 편입하려는 제국주의에 맞서 당당히 약소국도 자기 땅의 역사성을 근거로 영토를 수호해가는(영토 확보) 것이 마땅한 것이지. 이 영토 전쟁에서 강도가 하자는 대로 그냥 놔 두자고? 임지현 말대로 경계가 불분명한 땅이었으니 공동으로 활용하자고 하면 저 제국주의자들이 그래 좋다고 친선우호 관계를 유지하려할 것 같은가? 아마 경계가 불분명한 땅이었니 너희한테도 일부 권리를 주겠다고 하면 그걸 빌미로 자기땅이라고 당장 편입해 버릴 걸? 아니라고? 내 땅이라고 강력히 주장해도 자기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데..... 그렇지 않느냐 말이다. 근대주의를 탈근대주의로 맞선다. 학문의 장에서는 그것이 무기가 될 수도 있지. 하지만 현실의 근대주의의 힘의 논리 앞에서는 탈근대주의는 그야말로 무장해제일 뿐이지. 예컨대 반전 평화의 논리를 근거로 하여, 상대는 몇 천개의 핵으로 무장하고 있는데, 나만 핵은 물론 재래무기도 다 버리면 상대도 무장해제 할 것이라고 믿는가? 군비 감축은 그야말로 상호간의 신뢰와 상호간의 호혜의 원칙이 먹혀들 때 가능한 것이지 상대방은 오히려 군비를 강화하고 있는데 나부터 무기를 버리면 결국에는 상대방도 평화의 장으로 나올 것이라고 믿는가 말이다. 역사에 그런 예가 있는가? 제국주의 시대에 과연 그런 역사가 있는가? 역사를 공부한 자가 당연한 현실도 무시하면서 계속 헛소리를 짖어대는가? 혼자 착생머리에 앉아서 망상을 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걸 무슨 대단한 주장인양 언론에까지 떠들어대니. 참으로 그 학자로서의 역사의식에 측은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