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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창지식인'들이여, 이 시대의 예수가 되어주오
이문열 이영훈은 역사의 뒷골목에서 배회하지말고 '원죄'의 십자가 져라
 
임흥재   기사입력  2004/09/06 [20:07]
 공창지식인公娼知識人들이여, 이 시대의 예수가 되어주오

이문열의 한일합방 합헌 망언에 이어 이영훈의 공창 망언이 나오고 빗나간 문경지우의 귀감인 양동휴의 칼부림까지, 섬뜩한 춤사위가 연일 우리네 가슴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초가을의 문턱에서 맞이한 휴일의 한 낮에는 이영훈의 사기성 사과문이 걸리고 오늘은 그가 나눔의 집을 방문하여 위안부 할머님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슬픈 역사의 산증인인 우리 할머니들은 그에게 ‘호적등본부터 떼어오라’며 이영훈에게는 죽기보다 더 싫은 그 일을 요구하였다는 기사를 방금 전에 읽었다.


공창지식인들의 원죄론


이문열이 “4년 8개월의 프랑스와 36년의 우리의 경우는 다르다”고 말한 속내는 아마도 이런 것이라 생각한다. 즉 4년 8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나찌에 부역한(이문열의 표현으로는 전시점령 하에 전시 부역한) 사람들과 36년간의 짧지 않은 식민 지배를 경험한 우리의 친일분자들에게는 다른 잣대를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처음에 조선독립의 희망찬 앞날을 믿어 의심치 않던 식민지 백성들도 강산이 세 번 넘어 변하도록 찾아오지 않는 광복의 꿈을 서서히 믿지 않게 되었고, 따라서 많은 지식인들은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면서 황국신민의 길을 걸었다는 말이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혹은 기왕의 그 식민지에서 차라리 적극적인 황국신민화에 일조하면서 조선민중들의 삶의 질이나마 개선키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냐는 항변이다.


다카기 마사오도 그래서 천황군대의 소위가 되었고 이광수도 최남선도 김성수도 친일과 내선일체의 공작에 가담하였을 것이니 어찌 그들만의 잘못이라 탓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전망 없는 암담한 내일에 불가항력적으로 흔들린 대표적인 사람들의 행적을 쫒는 것이, 실제의 상황에서 더욱 악랄한 반민족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겐뻬이 교쪼(헌병오장’)나 ‘오니 게이부(귀신 잡는 경부)’를 제외시킴으로서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문열의 주장이다. 반민특위의 김창룡 등이 겐뻬이 교쪼 출신임을, 이육사를 체포한 최석현이나 후에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으로 악명이 자자했던 노덕술이나 내무장관까지 지낸 이익흥이 바로 오니 게이부 출신임을 예시하는 친절까지 잊지 않는다.


주장하는 바에 타당한 논리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혹은 그 논리가 그 시대의 보편적인 가치와 정서에 합당한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영훈의 경우가 문제되는 것은 바로 앞의 이유 때문이다. 이영훈의 망언과 어제의 곡학아세한 사과문을 통해 문제가 된 위안부 부분만을 해독해 보면, 그의 논리란 일제의 위안부 문제는 군국주의 일본의 잘못도 있었지만 그에 협력한 조선인 성매매자와 그 곳을 이용한 조선인에게도 분명한 잘못이 있는데, 이를 고백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고, 이에 반해 일본은 그 고백의 변이 2,000여건이 넘음으로써 자기고백적 성찰적인 역사청산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해방부터 지금까지 행해진 여러 형태의 성착취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가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겠다는 것은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짓이라는 논리다.


더불어 그는 좌우익의 대립에 의한 희생을 덮고 숨김으로서 화해를 가능케 한 (그가 조사했다고 주장하는) 어느 마을의 지혜를 우리는 배워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니 역사왜곡의 바로세움이란 학문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것임으로 학자들의 고뇌에 찬 연구와 결단만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라 강변한다. 곡학아세의 훌륭한 전범이다. 역사적으로 정권 혹은 불순한 시대에 의해 저질러진 죄과를 개인의 불행으로 치환함으로써 일제의 강제에 의해 저질러진 (위안부 문제 같은) 만행은 쇼윈도우에 갇혀 성을 파는 문명 시대의 어쩔 수 없는 그늘에 묻어 버리는 것이다. 김진명인가 하는 얼빠진 사람이 이문열 이영훈을 옹호하며 찬가를 불렀듯이(업코리아 9.4일자), 이영훈은 이제 파시즘적인 대중선동과 학문을 탄압하는 사회에 저항하는 용기 있는 학자의 모범이 된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의 추악한 뒷거래. 친일청산과 과거사 규명이야말로 희망찬 내일을 위한 첫걸음이다.     © 인터넷 자료


이문열 이영훈 류의 역사인식을, 필자가 한마디로 요약하면, 역사의 원죄론이다.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어쩔 수 없이 지배당한 일제 식민지와 그 후의 독재정권의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원죄를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는 죄인임으로, 누가 누구를 단죄하고 처벌할 수 있느냐는 역사인식의 태도가 그것이다. 이문열의 오장 칼럼에서 주장하는 형평성의 문제는 친일 조사대상의 범위를 더욱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라 깊게 들어가면 친일 안한 놈이 없고 죄 짓지 않은 인간이 없으니 소위로 대상의 범위를 확대한 것은 박근혜를 겨냥한 마녀사냥이라는 것이다.


이문열이나 이영훈의 궤변대로 설령 정략적 발상이 끼워져 있다손 치더라도 이런 원죄론적 역사인식이 참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과거사의 정리란 존재가치가 없다. 학문의 영역에서조차 역사적 결론이란, 불행한 시대가 도래 하였고 까마득한 광복의 염원은 꿈인양하여 다들 황국신민을 수락하였고 그 힘겨운 역사적 불행에 아파하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기독교적 원죄론이 인류를 종신토록 죄로 구속하는 것은 인류에게 범하고 있는 또 다른 죄악이라고 주장하는 신학자가 있는 세상에서, 누구나 죄인이라는 역사의 원죄론은 스스로 죄인 된 자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희석시키고 감추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


당대에 과거사의 청산이 중요한 것은, 이영훈 등의 아류들이 전제로 내세우는, 바로 그 자기 고백적인 반성이 없이, 그저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에만 급급했던 이 땅의 거짓된 주류들이 만들어 놓은 허위의 성곽을 허무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위이든 오장이든 신분의 고하는 중요치 않다. 설혹 법이란 이미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가장 하위의 수단에 빠진 것이 있다면, 그 누락을 찾아내고 사실史實과 진실을 밝히는 것이 학자들의 할 일이지, 논해지고 있는 법을 이러니저러니 트집 잡으며 역사청산의 시대적 요청에 딴지를 거는 것이 학자나 지식인의 역할은 아니다.  하물며 과거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별개의 성착취 문제를 들고 나와 성매매와 공창 운운하며 호도하는 서울대 교수라면, “그가 매국노 이완용의 조카 맞어?”하는 의구의 백성들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이 시대의 예수가 되어주오.


공창이란 성매매를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어느 나라나 성매매와 성의 문란 등을 올바른 가치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문명국가의 성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다. 공창을 인정하거나 안하거나 그것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한 인식은 공히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공창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성의 문란이나 성매매의 해악과는 별개로 성범죄로부터 많은 다수의 국민을 보호하고 사회의 성적욕구를 일부분 해소해주는 그 기능에 주목한 것일 것이다. 공창이든, 불법이나 현실에서는 버젓이 존재하는 사창가이든 그 곳은 이율배반의 영역이다. 때로는 휘황하기까지 한 불야성 같은 그 곳을 찾는 이들은 가능한 한 숨어들고 싶어 한다. 사회적으로 밝게 빛나나 개인적으로 은밀히 숨어들고 싶은 곳, 그 곳이 소위 창가娼街다.


그 이율배반의 속성이 존재함으로 그곳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존재의 목적에 맞게 기능한다. 그러나 그곳의 행위들, 즉 성의 매매나 성의 문란이 사회적 정의라 말해질 때, 자유연애라는 말의 본질이 왜곡되어 사회적으로 주창될 때 그 사회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필자가 서두에서 이영훈이나 이문열류의 원죄론적 역사인식의 주창자들에게 공창지식인이라 폄하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역사인식의 태도나 방법론은 그들 개인의 것일 때는 사회적으로 크게 해가 될 것이 없다. 어떤 권력이 있어 개인의 생각과 양심까지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음습한 뒷골목을 몰래 숨어들어가는 사람들처럼 스스로 부끄러운 전력을 가지고 산들 다른 누구가 시시콜콜 그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들의 부끄러움이 사회적 정의인양 내세워질 때, 그 때는 사회의 커다란 해악이 된다. 더욱이 그것을 정의라 주창하는 사람의 외양이 허울 좋은 지식과 그럴싸한 논리로 입혀져 있을 때, 그 해악은 참아 두고 보아줄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불행이나 과오와 역사와 시대의 오욕은 같이 등치시켜 고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공창지식인들의 문제제기처럼 기나긴 식민의 역사와 독재유린의 시대에 적지 않은 민중들이 자신들의 신념과 가치체계를 포기했을 수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똑같은 기간 꼭 같은 시대에 그들보다 더한 갈등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와 싸우며 개인의 짐이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을 그 절망을 참아내며 독립과 인권과 국가의 존망을 위해 숨져간 많은 이들의 처절한 투쟁을 역사의 묘지에 파묻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들의 존엄한 주검 앞에서 개인의 영달과 안위를 위하여, 민족을 팔고 나라를 저당 잡히고 백성의 피를 마시며 가문의 영광과 가계혈족의 번성을 누리며 지금까지 역사의 물줄기를 거꾸로 돌렸던 많은 이들의 면면은 올바로 세워진 역사의 묘지를 오르는 계단의 돌조각 하나하나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각인되어야 한다. 우리 후세의 번영과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이는 반드시 필요한 당대의 과업이다.


구약과 신약을 가르는 접점에 예수가 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랐고 못 박히는 형벌을 받았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었기에 그는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되었다. 원죄를 안고 살아가야할 인류를 위하여 그는 그 죄를 대신 속죄하였다. 그로부터 인류는 원죄에서 풀려나 기도하고 속죄하는 한 구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적어도 기독교적 신앙에 입각하면 그렇다. 나는 이문열 이영훈 등의 공창지식인들에게, 허구 헌 날 탄핵과 국기문란의 주문을 외우며 터부에 미쳐가는 한나라당의 광신도들에게 간곡히 읍소한다.


이 시대에는 우리의 오욕의 역사를 죄씻음 해줄 예수가 없다. 그러니 해방 60년이 되도록 우리는 죄인인 것이다. 다행이 이제라도 깨우친 신도들이 있어 몽매에서 벗어나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의 오욕을 대속해줄 예수는 보이지 않는다.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대속할 수도 없고 부끄러움에 재갈 물린 족벌 신문이 대속할 수도 없다. 정치인들이 나서면 미친 예수요 사이비 선지자라 당신들부터 난리칠 것이다.


바로 핏대 세우며 예수를 핍박한 우리의 빌라도 당신들이 예수가 되어야 한다. 그게 모두가 화해하고 아픈 상처를 여미는 길이다. 한 때 거짓되었던 지식인이여, 자신들도 어쩌지 못했던 친일과 친공의 가계와 개인의 역사 때문에 숨어서 몰래 아파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이 예수가 되어주오. “선대와 나의 잘못은 이제 내가 지고 가오니 이 후로는 다시 나와 같은 불행한 후손들이 이 땅에서 태어나지 않게 하여 주소서, 아멘” 이 기도와 함께 그대들의 죄를 씻고 또한 우리의 죄를 씻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들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이 아닌가.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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