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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수' 전향거부가 '간첩'행위 거부?
중앙일보의 '의문사위' 마녀사냥은 저열한 '색깔론', 의도적 날조로 일관
부당한 공권력에 희생된 '전향거부' 평가를 '간첩행위' 평가로 둔갑 왜곡
 
이광길   기사입력  2004/07/17 [23:03]
흠... 또 시작하는군. 지난 2일 중앙일보발 "의문사위 결정 파문, 남파 간첩이 민주 인사로"라는 기사를 봤을 때, 내 첫 반응은 이랬다.
 
사실 그 기사는 기사라기보다는 70년대식 선술집 벽에 걸린 비키니 달력에 가까웠다. 별 매력도 없고 눈길 주기에 민망하기 만한 그런 촌스러움이랄까? 하지만 문제는 촌스럽다는 게 유용하지 못하다는 것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 촌스러운 형식이 때로 제약을 벗어 던진 적나라한 욕망을 실어 나르는 적절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너무 촌스러워 따져볼 가치가 없을수록, 그 부당함을 정색하고 따져보려는 사람을 한층 우습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제정신 가진 이를 어이없게 만드는 것, 그것이 촌스러움의 정치적 위력일까? 촌스럽다고 순진하다거나 악의적이지 않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순진'은 커녕 지극히 악의적이고, 이성의 개입을 전면적으로 차단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각설하고 2일자 중앙 기사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의문사위 조사관이 \'간첩 사노맹 출신\'이라고 왜곡한 중앙일보 7월 15일자 1면 기사     © 중앙일보 PDF

"의문사위 결정, 남파간첩이 민주인사로"라는 제목에 이어 의문사위가 "비전향 장기수들의 죽음을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한 것은 국가기관이 자유민주체제를 부정하던 사람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 셈"이라고 첫 문단을 시작한다. 그 근거로 의문사위 보도자료의 구성을 문제삼는다. "첫머리에 굵은 글씨로 <'깡패동원, 강제급식, 고문' 전향공작이 부른 살인! 반인륜적 전향공작에 굴하지 않은 양심의 죽음>"이라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지, 굵은 글씨가 거슬렸다는 뜻일까?) 
 
게다가 의문사위가 위 사건 진정인들의 이력을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다가 기자가 물어본 후에야 그들이 "남파간첩과 빨치산임을 밝혔다"고 하여 '심증'을 굳히려 한다. 계속해서 1기 의문사위가 기각했던 사안을 뒤집었다는 점을 밝히고,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그런데, 중앙기자의 의문은 이어지는 기사, "7명 중 6명이 시민운동 경력…2기 의문사위 '진보색'"을 통해 그 위원들의 색깔로 연결된다. 2기 위원들의 진보색(왜 빨강이라고 하지 않았는지 의문이지만)이 (중앙이 보기에)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럼, 이 기사가 왜 문제되는가? 첫째는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틀려 있다. 둘째로, 이 기사가 전제하는 가치평가가 틀려먹었다. 즉, 간첩은 배제되고 차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가치평가를 기본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의 의도와 노리는 효과는 두 번째의 가치평가에 의해 규정된다. 간첩이라는 선정적인 낙인을 어떻게 이용해 먹을 것인가에 의해 첫째 부분에 대한 자의적 짜깁기와 왜곡, 날조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때문에 가능한 '제대로' 이용해 먹겠다고 욕심을 부릴수록 무리한 글쓰기가 될 수밖에 없다.
 
위 사항을 염두에 두고 첫 번째 문제부터 보자. 중앙 기사가 전혀 기본이 안되어 있다는 점은 의문사위의 보도자료가 특정하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는 데서 전면적으로 드러난다. 사건에 대한 가치판단이나 그를 뒷받침하는 자료를 모으는 작업은 기자의 재량에 달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무엇'(즉, 대상의 특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지는 기자와 취재원, 양자가 일치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중앙의 기사는 이점부터 의문사위와 어긋나고 있다. 어긋날 뿐만 아니라 아예 묵살로 일관하고 있다.
 
의문사위 보도자료를 요약하면 "전향을 거부하다 공권력에 의한 강제급식, 구타 등으로 숨진 이들의 행위"(대상)는 "위법한 공권력에 대한 저항"(법률적 판단)이었으며, "결국 전향제도 등의 폐지로 이어졌으므로 이들의 행위가 민주화에 기여"(법률적 판단)했다는 것이다. 의문사위가 판단대상으로 하고 있는 대상 사실은 갇힌 상태에 있었던 장기수들이 전향을 거부하고 위법한 공권력에 저항한 행위이지, (중앙일보의 제멋대로식 독법처럼) 투옥되기 전 간첩행위가 아니다. 그러기에 결정문은 전향거부와 위법한 공권력행사, 전향제도 폐지라는 결과와의 관련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앙은 어떻게 했는가? 중앙은 의문사위 보도자료에 있는 '전향거부 행위'를 '간첩행위'로, '전향거부에 대한 평가'를 '간첩에 대한 평가'로 대치시켜 버렸다. 중앙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국가기관에 자기나 동료의 간첩행위를 재평가해달라고 진정할만한 사람이 있다고 믿는 걸까? 혹시 이 사건 진정인들이 요청한 것일까? 천만에. 확인결과, 진정인 기0문씨 등은 간첩행위에 대해 재평가해달라고 한 게 아니라, 전향을 거부하다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죽음을 맞은 동료들의 죽음을 규명하고 그에 따르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 달라고 한 것이었다.
 
누구도 간첩행위를 재평가하라고 한 적도 없고 의문사위가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오로지 중앙만이 '간첩들에 대한 재평가, 그러므로 간첩행위에 대한 재평가'라고 우기고 있는 꼴이다. 이런 걸 법률용어로 처분권주의 위반이라고 하고 속된 말로 '오바질'이라고 한다. 둘이 말하는 대상이 일치하지 않으니 그에 대한 가치평가를 운운하기도 어색하다.
 
이밖에도 자의적인 해석, 의도적인 날조는 계속된다. 전향을 거부하다 죽음을 맞은 장기수들이 남파간첩 이었다는 사실을 의문사위가 숨기다 (중앙기자의) '추궁에 못이겨 억지로' 말한 것처럼 쓴 대목은 악의적인 날조에 해당한다. 의문사위측에서 즉각 반박했듯, 의문사위에 진정된 사건개요는 홈페이지에 접속만 하면 누구나 볼 수 있고, 이 사건을 기각했던 1기 의문사위의 결정문이 이미 공개되어 1분만 인터넷을 뒤지면 드러날 사실을 뭐하러 숨기겠는가?
 
또, 1기에서 기각한 사건을 2기에서 인정한 이유가 어떻게 사람들의 색깔로 바로 연결되는가? 백보 양보해서 결정문에 영향을 끼친 위원들의 성향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정 주문에 이른 논리적 추론 과정을 살펴본 뒤에 문제삼을 일이다. 다른 사법, 준사법 기관에 대한 그간 중앙의 태도를 보면, 그들의 기이한 편파성은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대법원의 경우, 법현실의 변화에 따라 이전 판례를 폐기하고 새로운 판례로 변경하는 것은 흔하고도 정상적인 행위이다.

중앙 기자가 대법 전원합의체에서 변경된 판례를 분석하며 대법관들의 색깔과 연결시키는 것을 본 적이 없다면 내가 과문한 것인가? 준사법 절차인 의문사위의 진정처리와 결정도 사실상 대법원과 다를 바 없다. 이전 결정을 뒤집을 만한 증거나 법현실의 변화가 있으면, 그걸 바로잡는 결정을 내리는 게 당연하다. 특히 의문사위는 과거청산기구이다. 과거청산이란 법적 안정성과 정의가 충돌할 때, 실체적 정의를 우선시하는 하겠다는 입법자의 결단에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 정의에 부합하는 증거가 발견되었음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런 의문사위는 존립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미 2년 전에 자사 지면을 통해 보도한 사실을 이제 와서 새삼스레 확인했다고 사기 치거나, 논리에서 밀리자 조사관들의 전력을 공격하는 주막강아지보다 못한 '짓거리' 등등.... 진부하다못해 신물이 날 정도로 비열했고 지금도 그러한 어떤 집단을 연상케 한다. 기사를 이렇게 제멋대로 쓰려면 취재는 왜 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럴 바에야 아예 자기가 나서서 사건을 만들고, 자기가 자신에게 보도자료 날리고, 그 보도자료를 받아서 자신이 기사 쓰면 되는 것 아닌가?


▲중앙일보 의문사위 관련기사는 이미 2002년 1월 19일에 보도한 것이다.     © 중앙일보 PDF

 두 번째 문제는 색깔론과 관련된다. 색깔론을 들먹이는 자들에게 보편적 인권을 이야기해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다만, 대다수 상식적인 이들만이라도 그 폐해를 잊지 않기를 바라기에 굳이 이 재미없는 주제를 반복한다.
 
빨갱이 사냥을 빌미로 한 제주 4.3사건시기 서북청년단의 만행이나 전쟁기 민간인학살과 같은 적나라한 물리적 폭력은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색깔론은 여전히 살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아니 어쩌면 물리적 폭력과의 연계가 끊어진 지금에야 색깔론은 그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이 대중민주주의시대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소수가 다수결을 결정원리로 하는 사회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중을 자기편에 묶어두어야 한다. 물리적 수단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는 상황에서 동원할 만한 수단은 인위적인 적, 역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혐오스러운 공공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이질적인 개인들이 적 앞에서 단일한 국민으로 통합되었듯, 지배세력은 낙인찍고 배제된 자들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하여 제 편에 다중을 묶어두는 것이다. 무지개빛 칼라를 자랑하던 대중들도 색깔론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 흑백으로 바뀌고 그 중간 어드메쯤 경계가 그어진다. 민주주의가 그 강점이 다중(여론)의 압력에 있으며, 그 약점 역시 다수의 뜻, 정서에 있다고 본다면 지나친 말일까? 흩어진 대중이 하나가 되는 것은 적을 앞에 둔 때이고, 지배세력은 통일적인 여론 동원을 위해 낙인찍힌 자들을 희생양으로 요구한다. 그러므로, 낙인찍힌 자들은 결국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주주의의 운명과 결부된 문제인 것이다.
 
자기이익에 따라 분산된 개인을 어떻게 묶어서 이권투쟁에 동원할 것인가 하는 게 지배세력의 관심사라면,  '색깔론'은 가장 저열하지만 그만큼 확실한 동원적 기능을 한다. 색깔론이란, 다시말해 '낙인찍혀 배제되기 싫으면 동의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색깔몰이는 엄연한 여론조작행위다. 자유로운 토론과 자기 결정에 근거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여론조작은 민주적 절차를 무력화하고 파괴한다. 비유하자면 색깔론은 사상의 시장에 등장한 깡패다. 깡패는 대화를 모른다. 대화할 어떤 내용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위협하고 제압하고 '깽판을 칠' 뿐이다. 깡패는 남의 말을 들을 줄 모른다. 들을 귀도 없으니려와 설령 있다해도 그걸 이해할 머리가 없는 까닭이다.
 
색깔론의 동력은 의미도 근원도 모르게 이글거리며 치솟는 어두운 감정이다. 폭주하는 감정은 추방된 자들을 짓밟고 결국엔 그들 자신마저 완전한 무감각 상태로 몰아간다. 이 감정의 핵인 어두움은 그것이 초래한 결과를 통해 그 정치적 의미를 드러낸다. 폭주의 끝에서 이득을 본 자가 바로 낙인을 두드려 깨운 자이고, 그들의 의도대로 출렁이다가 자기 상처를 덧낸 자는 언제나 이쪽과 저쪽으로 갈라진 대중들이다.
 
색깔론은 사상적 소수자들을 박해하는 걸 당연시한다. 그들은 보편적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을뿐더러, 낙인찍힌 자들에 대한 어떠한 긍정과 배려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말과 행위가 아니라, 그 이마에 찍힌 낙인이 그 존재를 압도한다. 간첩은, 아니 간첩이었다면 그가 무슨 선한 일을 했더라도 설사 인간의 본성에 부합한 일을 했더라도 절대로 칭찬해서는 안된다. 그 행위를 평가한 자도 '수상한 자'로 간주되고, 나아가 그 이마에 똑같은 낙인이 찍혀도 감수해야만 한다.
 
낙인은 단순히 오도된 인식이라는 차원을 넘는 하나의 구조이다. 사상의 시장에서 낙인은 어지러이 흩어져 잘 보이지 않는 예외적인 점(critical point)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몇몇 점에 불과한 블랙홀이 그 무한한 식성으로 중력장의 별들을 먹어 치우듯, 사상의 시장에서 낙인도 그러하다. 뽑아내지 않고 계속 방치한다면, 낙인은 사상의 시장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을 것이고, 끝내는 사상의 시장 자체를 먹어치우는 블랙홀이 될 것이다. 결국 민주공화국의 시민들이 낙인과 배제를 용인하고, 낙인찍힌 자들에 대한 학대구조를 방치하는 것은 공화국을 떠받치는 공론 영역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강조하건대, 낙인찍힌 자들을 학대하는 구조를 때려부수어야 한다. 그것은 낙인찍힌 자들에 배려나 시혜와 같은 윤리적 요구가 아니라, 민주공화국 시민의 정치적 의무이다. 민주주의를 누리려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요소를 막아내야 한다. 색깔론이 민주주의를 파괴한다는 것은 중앙기자들만 빼면 누구에게나 자명한 진리가 아니겠는가?
 
이제껏 2일자 중앙기사에 대한 인상과 그 내용상 문제점으로 사실관계 왜곡, 그 전제인 색깔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철지난 '70년대식 핑크 누드' 기사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읽을수록 그 얄팍함에 조소가 강물처럼 괴고, 들여다볼수록 그 적나라한 포즈에 민망했다. 언제까지 이런 기사 따위 들여다보며 철지난 레퍼토리를 반복하고, 그에 발작적으로 대응해야 할지 서글픔부터 앞선다.
 
만인이 그 본질적인 존엄과는 무관한 다른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 혹은 학대받지 않는 세상은 왜 이리 더디게 오는가...
 
[참고기사] 류정민, '중앙일보 ‘사노맹’ 보도는 2년 전 재탕'(미디어오늘, 2004. 7. 16)

* 필자는 인권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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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7/17 [23:0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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