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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의 주민등록증, 그리고 지문 날인
 
지오리포트   기사입력  2002/06/22 [02:13]

밥을 먹을 때나 혹은 길을 걸을 때나 너나없이 축구 이야기를 화제로 올리는 나날이다. 그리고 축구를 화제로 삼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히딩크'다.

신문, 방송, 그리고 인터넷에서도 연일 히딩크 감독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이미 방송되었고, 히딩크식 경영기법을 배우려고 한다는 기업들의 발빠른 움직임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더욱 뜨겁다. 히딩크 감독은 최고의 감독이라는 찬사와 함께 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글들이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 있다. 가히 '히딩크 신드롬'이라고 부를 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동상을 만들자는 주장도 있고, 대표팀의 축구가 열리는 도시마다 그의 이름을 붙이는 건물과 거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히딩크 신드롬'을 보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어 펜을 들었다. 히딩크 감독이나 '붉은 악마'에게 '딴지'를 걸려고 쓴 글이 아니다. 이 글은 축구나 히딩크 감독에 대한 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얼굴'에 대한 글이다.

1. '경영인' 히딩크

히딩크 감독의 경영기법을 분석하는 갖가지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히딩크를 통해 학연이나 지연 등 기존의 축구계가 지니고 있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부터 이제 박종환식 '파시즘적인 축구문화'는 끝났다는 분석까지. 여러 네티즌들의 분석은 흥미로움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얼굴'을 돌아보게 만드는 글들도 많다.

이런 가운데 내 눈을 잡아끄는 것은 대기업들도 히딩크의 리더십을 분석하고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서 다음달에 열리는 하계 세미나에 히딩크를 초청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고 하는 소식이 들려온다.

히딩크의 '정체성'은 축구 감독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토록 많은 경영학 박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대기업들이 그의 리더십을 분석하고 또 공부하는 것일까.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의 눈에 보이는 히딩크 감독이나 그가 한국 축구에 도입한 새로운 경영 기법이란 어떤 것일까.



▲ 네덜란드의 신문 'De Telegraaf' 인터넷판에 실린 기사. 히딩크의 한국 이름 '희동구'를 붙일 정도로 히딩크에 대한 한국인들의 믿음이 크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축구만큼 세계화되어 있는 것도 그리 많지 없지만, 축구에는 엄연히 선진국과 후진국이 존재한다. 축구 후진국에서는 세계축구의 흐름과 기술, 그리고 실전 경험이 풍부한 감독(경영인)을 영입하여 단기간에 축구 선진국을 따라잡으려고 한다. 여기서 감독의 국적(國籍)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축구 후진국에 온 선진국의 감독은 새로운 훈련 방법을 도입한다. 그 훈련 방법은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오랜 세월 선진국 축구 시장에서 검증된 것으로 '과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훈련 방법이다. 실전적이며 효율적이며 체계적이다. 이런 훈련 과정을 거치면서 선수들을 선발해나간다. 선수 선발 과정(새로운 노동자의 선발 과정)에는 반드시 어떤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은 기존 질서 즉 학연, 지연, 나이에 따른 위계, '냄비 언론'에 의해 만들어진 명성 등의 기준이 아니라 축구 선진국에서 요구되는 속도와 운동량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준이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팀 선수들에게 '멀티플레이어'가 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을 잘 알려져 있다. 상대팀의 전략과 전술에 따라 재빠르게 변형된 시스템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고정된 포지션이 아니라 갖가지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가 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마치 산업사회에서 요구되었던 고정된 노동형태를 수행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많은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정보사회의 노동자처럼.

또한, 히딩크 감독은 선발 선수를 확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선수들간의 경쟁을 유발했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축구 팬들은 누가 선발로 출장할 것인지 알 수 없다며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사회학자들이 말하는 유연성(柔軟性)이 엄청나게 커졌다. 그리고 또 하나 이런 경쟁을 통해 히딩크 감독의 선수 선발권이나, 선수들의 감독에 대한 복종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해졌다.

히딩크 감독에 의해 수행된 한국 국가대표팀의 '구조 조정' 즉 선수들의 선발과 훈련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중이며 그의 말대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그는 월드컵이 개막한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전술을 선보여 축구 팬들뿐만 아니라 축구 전문가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고 있다. 이탈리아전 후반전에 수비수 3명을 모두 발빠른 공격수로 교체함으로써 동점골을 넣을 수 獵?상황을 만들어내고 끝내 승리를 거둔 것은 아마도 그만이 펼칠 수 있는 공격적인 전술일 것이다.

거듭되는 승리를 통해 축구 감독으로서의 히딩크도 그 어느 때보다 주가를 높이고 있다. 말 그대로 주가(株價)다. 한국 축구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세계 축구 시장의 소비자들에게 뚜렷하게 알림으로써 히딩크는 감독(전문경영인)으로서 그 스스로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이 되고 있다. 아마도 대기업들이 히딩크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경영인'으로서의 히딩크일 것이다.

2. 히딩크의 주민등록증과 여권

여러 가지 히딩크 신드롬이 있지만, '히딩크의 주민등록증'을 들고 응원하는 모습도 바로 '히딩크 신드롬'의 현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월드컵이 개막하기 전부터 인터넷에서 떠돌던 '히딩크의 운명'이라는 유머에서처럼 축구 팬들은 히딩크가 한국인으로 '귀화(歸化)'하여 계속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히딩크를 '한국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실제로 법무부에서는 그에게 명예 국적을 부여할 모양이다.


▲ 히딩크의 인기가 치솟음에 따라, 벌써 네티즌 사이에는 히딩크의 주민등록증이 등장하는가 하면, 고스톱 판에는 벌써 '히딩크 고스톱'이 등장했다는 소식이 있다.    

그런데, 여러 나라에 있는 프로 리그에서와 달리 월드컵의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선수들은 반드시 그 나라의 국적이 있어야 하는 데 비해, 감독들에게는 이런 국적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이주노동자'처럼 축구 선진국에서 활동하던 축구 후진국 선수들은 어찌할 수 없이 자국의 대표가 되지 않으면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없다. 그러나 감독은 그렇지 않다. 감독은 자국의 대표가 아니더라도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한국(히딩크), 일본(트루시에), 중국(밀루티노비치), 세네갈(메추), 카메룬(셰퍼), 에콰도르(고메스), 잉글랜드(에릭손), 파라과이(말디니) 등이 외국인 감독을 거느리고 있었다. 선수들은 자기 나라의 국적을 지녀야 하지만, 감독은 그렇지 않아도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것은 피파(FIFA)가, 축구가 세계화됨으로써 더 많은 축구 시장이 형성되기를 바라기 때문일 아닐까. 잉글랜드가 조금 예외적이지만, 이들 외국인 감독들은 축구 후진국에 선진국의 기술(선수 선발과 훈련, 전술 등)을 전파하는 전문인들이다.

  
▲ 축구 경기장에서 '붉은 악마'들이 히딩크를 귀화시키자는 의미로 히딩크의 주민등록증 피켓을 만들어 흔들고 있다.  

이들 감독에게 각 나라가 자기 나라의 국적을 '강요'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본인의 의사가 있다면 모를까, 이들 '전문인'들에게 국적이란 크게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다. 만약 월드컵에는 자국의 감독만이 출전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다면 사정은 달라지겠지만.

히딩크 감독도 자신이 한국 국적을 취득할 '필요성'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굿데이> 2002년 6월 19일자 '히딩크, 스페인전은 이번 대회 하이라이트'라는 인터뷰 기사에서 기자가 "경기장 스탠드에 '히딩크를 대통령으로'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는데"라고 질문을 던지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참 재미있고 유쾌한 농담이었다. 명예시민권을 준다는 얘기가 있는데 난 전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는 여권을 갖고 있어서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그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축구 팬으로서는 서운한 답변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 축구 팬들의 열렬한 '짝사랑'과는 상관없이 히딩크는 히딩크다운 답변을 한 것이며 그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여권인 것이다.

어찌 되었든 히딩크 감독이 한국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국적을 취득한다는 것이 '주민등록증'을 만드?것으로 의식된다. 히딩크의 주민등록증을 들고 응원에 나선 '붉은 악마'의 행동은 바로 이런 의식을 외적으로 표현한 것일 터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우리 나라의 신분등록제도에서는 특이한 점이 많다. 모든 성인에게 강제적으로 거주지에 등록하게 하고, 고유하고 불변하는 번호를 발급하며, 주민등록증이라는 신분증을 강제로 발급한다. 또한, 이 신분증은 항시 지참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으려면 열 손가락 모두 지문을 찍어야 한다.

조금 비약하고자 한다.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외신에 잘 등장하지 않는 나라이다. 별다른 사고도, 쟁정도 없는 무척 안정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등장할 때가 있다. 어떤 ‘법안’과 관련했을 때이다.
안락사, 마약, 동성연애자…

그런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가장 진보적인 제도, 또는 법안을 만들어내는 나라가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에서는 그 어떤 담론보다도 한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바로 히딩크의 고향, 네덜란드이다.

다시 주민등록증 문제로 돌아간다.
홍석만의 "지문날인 이래서 거부한다"라는 글에 따르면 범죄인이 아니라 일반인들 모두에게 열 손가락의 지문 날인을 강제하는 나라는 우리 나라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개인의 선택을 종교보다 더 존중하는 네덜란드 태생의 히딩크. 그가 과연 귀화하려는 뜻을 굳히고, 언젠가 동사무소에 갔을 때를 상상해 보자.
귀화인 히딩크, 또는 ‘희동구’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열 손가락 지문 날인이다..

마약을 복용하는 것조차, 한 개인의 선택으로 존중하는 나라, 네덜란드에서 자라난 히딩크가 지문 날인을 요구 받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가 과연 지문 날인을 하고, 동사무소 담당 직원이 건넨 티슈 한 장으로 손가락 끝에 묻은 먹물을 닦으려 할까….

골키퍼 외에 그 어떤 수비수도 없는, 텅 빈 그라운드에서 상대방의 골을 향해 가는 공격수는 흔히 그 무인지경의 순간에 턱없는 슛을 날린다.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다.
그 공격수처럼, 내 상상력의 ‘정강이’에 너무 힘이 들어간 건 아닐까… 그래서 내 글의 마무리가 이렇듯 ‘비약’으로 끝나는 것일까…

[관련기사]김주영, 주민등록증을 찢으면 왜 안되는데? 대자보 83호

시나위가 부르는 <주민등록증> http://my.dreamwiz.com/idcard2001/music/sinawe.wma
지문날인 반대연대 http://finger.or.kr/
주민등록증을 찢어라 홈페이지 http://my.dreamwiz.com/idcard2001/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지구촌을 여는 인터넷 신문 지오리포트 http://georeport.co.kr/ "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 본 기사는  안찬수 기자(transpoet@hananet.net)가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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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6/22 [02:1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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