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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조작 사건의 몸통과 깃털
[변상욱의 기자수첩] 정치와 공안권력 막기 위해서는 강한 문민통제 장치 마련해야
 
변상욱   기사입력  2014/02/21 [22:39]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이른바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의혹으로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당 등 야권은 ‘증거가 조작됐음이 밝혀진 것이고, 국정원이 증거조작의 몸통이며 검찰도 책임이 크다’는 주장이다. 당연히 국정조사를 해야 한다는 것.

반면, 새누리당은 "사실규명부터가 먼저다. 확인도 안 된 걸 가지고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난리치지 마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도 난리쳤지만 무죄로 끝나지 않았냐"라며 맞서고 있다. 
 
중국정부가 검찰 측 증거가 위조된 것이라고 밝힌 사실조회 회신. (노컷뉴스/자료사진)

유우성 씨가 북한에 들어가 보위부 공작원 임무를 부여 받았다는 수사 내용이 논란의 핵심인데 그 증거로 제출된 중국-북한 국경을 오고 간 기록의 진위가 문제이다.

검찰은 화룡시 공안국과 삼합변방검사창의 기록 및 설명을 증거로 제시했고, 화룡시 공안국이 심양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보낸 공문을 증거로 내놓았다.

그런데 중국 영사부가 3건 모두 위조된 것이라고 통보하면서 문제가 터져 나온 것. 중국 영사부는 되려 중국기관의 문서와 도장을 위조한 형사범죄이므로 중국 측이 조사할 수밖에 없고 이에 협조를 바란다고 입장을 밝히고 있다. 무엇이 진상인지 더 캐내볼 일이지만 이런 논란 자체만으로도 황망하기 그지 없다.

◈ 지금이 어느 세상인데?…지금이 그런 세상이지

세상을 놀라게 하고 후에 무죄로 밝혀진 간첩 사건은 무수히 많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민족일보 사건은 5.16 쿠데타 직후 북한의 자금을 받아 친북활동을 했다며 진보진영 언론인들이 군사정권에 의해 사형과 징역형을 받았던 1961년 사건이다. 당시 편집장 이종률 씨는 52년 만인 지난해에야 누명을 벗었다.

동백림 사건은 동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학생·지식인을 비롯한 국내·외 인사 203명이 북한의 지령에 따른 간첩행위와 사회주의 정권 수립 활동에 연루됐다고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사건.

23명에게 간첩죄를 적용했고 작곡가 윤이상 씨와 화가 이응로 씨 등 명망 있는 해외 인사들이 포함돼 충격을 줬다. 그러나 6.8국회의원 부정선거 규탄시위 등 정권비리에 대한 저항을 누르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실체를 왜곡한 사건이라는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결론.

관련자들에게 물·전기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한 사실이 확인됐고 대법원이 사건 일부에 대해 무리한 법적용이라며 파기하고 되돌려 보내자 중앙정보부가 100만원의 예산으로 판검사 매수를 계획한 문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문인간첩단 사건도 있다. 1974년 1월 문인들이 개헌지지 성명 등을 발표하자 보안사가 김우종 교수를 비롯해 이호철, 임헌영, 장병희, 정을병 씨 등 문인 5명을 간첩단이라고 발표한 사건. 당시 김 교수는 일본에서 발행되던 잡지 '한양'지에 글을 쓰고 원고료를 받았는데 이 잡지가 북한의 위장기관지임을 알면서도 글을 썼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고 간첩이 되어 버렸다.

35년 뒤인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조작된 수사 결과를 언론에 알려 문인들에게 '간첩'의 낙인을 찍은 것"이라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장기간 영장 없이 연행해 가두고 잠을 재우지 않으며 발길질과 주먹으로 때려 허위자백을 받아낸 사건.

◈ 맞은 사람은 죽고 때린 사람은 발 뻗고 승진해…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서울시 간첩사건 관련 공증도장(위) 형식은 진본(아래)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진본과 달리 검찰 자료 공증도장은 별도의 공증서가 아닌 공문서 자체에 찍혀 있고, 공증번호와 담당공무원 도장이 없다. 연변자치시 규정과 달리 한글·한자 병행도 지키지 않았다. (노컷뉴스/자료사진)

반체제 유명인사가 아닌 평범한 주민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제주도 강희철 씨 사건. 강 씨는 15살이던 지난 1975년 일본에 사는 부모를 만나기 위해 밀항해 오사카로 갔다. 조총련계 조선고급학교를 졸업해 공장에서 일하다 일본경찰에 밀입국자로 잡혀 강제송환됐다. 부산 군 수사기관에서 고문을 당하며 수사를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저 밀입국자였을 뿐이다. 

군복무를 마치고 취직해 살아가는데 1986년 경찰에 의해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무려 85일 간 폭행, 협박, 고문을 당하다 결국 못 이기고 허위자백을 하고 말았다. 13년 감옥생활을 했고 무죄임이 밝혀지는 데 22년이 걸렸다. 가정은 산산조각 나고 4살배기 어린 아들은 일본에 있는 조부모에게 맡겨졌다. 감옥에서 나온 뒤로도 보안감찰 대상자여서 직장 구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막노동으로 살아가야 했다. 두들겨 패 간첩을 만든 사람들은 포상 받고 진급했다.

김기삼 씨는 한국전력에 재직하던 지난 1980년 12월 안기부 광주분실로 끌려갔다. 전기검침하러 다니면서 남측의 정보를 수집해 북한에 넘기려 한 간첩 혐의이다. 52일간의 가혹행위에 의한 허위 자백으로 법정에 세워져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딱 떨어지는 증거가 없자 검침하면서 수집한 정보를 외우고 있다가 언제고 만나게 될 간첩에게 전하려 했다는 혐의도 만들어 씌웠다. 누명을 벗는데 걸린 세월은 29년. 
 
간첩으로 몰아가다 중도에 그만 둔 사건들도 있다.

1971년 9월 전남 여수 화정면 백야리 외딴 섬에 기관원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다짜고짜 40대의 부면장 김익환 씨와 그의 제수, 조카딸을 끌고 갔다. 이들은 밀실에 갇혀 몽둥이와 발길질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 20대의 여성은 몸에 아무 것도 입지 못한 채 성적인 학대까지 받았다.

'주민이 섬마을에 월북한 간첩이 있다고 제보했는데 바로 너희지?'라며 고정간첩으로 활동했음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발가벗겨 놓고 간첩임을 인정하면 옷을 주겠다고 거짓 자백을 강요했다.

그런데 1주일 동안 그렇게 두들겨 패더니 "어…미안해 진범이 잡혀 버렸어…"하고는 내보냈다. 마을로 돌아왔으나 간첩집안이라고 사람들은 피해 다녔고, 발가벗겨졌던 20대 조카딸은 평생 대인기피증으로 결혼하지 못하고 혼자 살았다.

평범한 어부였던 임 모씨. 1985년 7월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이 간첩 혐의로 보안부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평소 집주인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임씨도 강제연행 됐다. 28시간 넘도록 조사를 받은 뒤 혐의 없다고 풀려났지만 보름 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숨졌다.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가 원인. 26년 만인 2011년 법원은 국가는 유족에게 1억3천여만 원을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우리 현대사를 들추면 수십 건에 이르는 간첩조작 사건들이 드러난다. 이 사건들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정권의 성격에 따라 범공안세력이 정치권력과 결합하며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비리라는 점이다.

대법원 자료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보안법 구속 기소는 1년에 30건까지로 내려갔다가(2006) 이명박 정부 때는 98건까지 올라갔다(2012). 박근혜 대통령 정부 첫 해인 2013년에는 102건으로 더 올라갔다. 냉전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용하며 사회가 이념대결로 치달을 때 집권세력이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국가보안법 위반, 간첩사건들이 증가하는 것이다.

이 사건들 중 다수는 훗날 무죄가 될 것임을 우리는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서울시공무원 간첩사건과 증거조작 의혹 사건도 그런 토양 속에서 발생한 것이다.

공안 수사기관들이 자신들의 책무를 다하고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면 조금만 수상해도 수사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집권기반의 조성. 세력의 확대와 연게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철저한 국가관과 국가질서 수호에 대한 신념에서 비롯되고 거기서 끝나야 한다. 그 국가관과 국가질서에는 우리사회가 민주공화국이고 민주주의는 민주적으로 운용되어야 한다는 대원칙도 들어 있다.

정치권력과 공안세력이 공존해 나가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국가질서 수호 기능을 악용해선 안되고, 그런 위험이 다분하다면 강한 문민통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지금이 바로 그럴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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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2/21 [22:3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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