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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창태 : 중앙일보맨에서 삼성의 언론인으로
[최을영의 시사인물 포커스] 노욕과 노추로 기록될 금창태 사장의 행보
 
최을영   기사입력  2007/07/23 [14:42]
그들, 결국 회사를 떠나다

2007년 6월 26일, 시사저널 파업 기자들은 회사와의 결별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기자들은 ‘시사저널을 사랑하는 분들께 드리는 시사저널 기자들의 마지막 편지’를 발표했다.
 
이 편지에서 기자들은 “오늘이 만약 금창태 사장이 인쇄소에서 삼성 관련 기사를 삭제한 다음날이었다면, 우리 파업 기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백 번을 생각해봐도 대답은 같았습니다. 부당한 것은 부당한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장이 삼성 고위층과의 친분을 들어 기사를 무단으로 삭제하는 언론사, 그곳은 지난 18년 동안 시사저널이 걸어온 길이 아닙니다. 우리 파업 기자들이 자부심처럼 여겨온 독립언론 시사저널의 정신과는 더더욱 거리가 먼 일입니다. ... 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파업 기자들은 시사저널과의 인연을 끊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께 시사저널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동안 우리 파업 기자들을 성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리고 우리 파업 기자의 청춘과 꿈과 자부심이었던 시사저널, 너 또한 안녕. 굿바이, 시사저널.”

이로써 2006년 6월 19일 불거졌던 시사저널 사태는 기자들의 사표와 함께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자본권력에 휘둘리는 우리 언론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로 우리 언론이 해결해야 할 과제를 남겼다.
 
사건의 발단

시사저널 사태는 2006년 6월 19일 발매된 시사저널 870호 60쪽부터 62쪽에 실릴 예정이었던 <2인자 이학수의 힘 너무 세졌다>라는 삼성그룹 관련 기사가 인쇄과정에서 빠지면서 시작되었다. 편집국장의 고유 권한으로, 또는 편집회의를 거쳐 빠졌다면 문제될 것도 없었지만 편집국장과 해당 기자가 모르는 사이 경영진에서 인쇄소에 지시해 기사를 삭제한 것이 문제였다. 2006년 6월 29일 프레시안에 보도된 <그날 시사저널에서는 무슨 일이...>라는 기사를 토대로 그 전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건의 발단은 2006년 6월 15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시사저널 이철현 기자는 <2인자 이학수의 힘 너무 세졌다>란 기사를 쓰고 나서, 삼성 전략기획실에 전화를 걸어 기사내용을 설명했다. 민감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삼성 측의 입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삼성 전략기획실에서는 ‘윗분과 상의해보겠다, 잠시 기다려달라’고 대답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대답이 없자 이철희 기자는 장영희 취재총괄팀장에게 기사를 송고했고, 그로부터 1시간 후 삼성 전략기획실의 간부 2명은 시사저널 편집국을 찾아왔다. 이들은 이철현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이 기자의 기사내용이) 삼성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안이다. 잘 부탁드린다”라고 말했고, 이철현 기자는 “이미 데스크에 넘긴 기사를 뺄 권한은 나에게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때쯤 금창태 사장의 사무실에 삼성 관계자의 전화가 걸려왔다. 누가 전화했는지에 대해 금창태 사장은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는 차장급 인사가 전화를 했다고 한 반면, 시사저널 기자들은 이순동 삼성 전략기획실 부사장이 전화를 했다고 이야기했다. 어찌됐든 전화를 받은 금창태 사장은 이윤삼 편집국장을 불러 이철현 기자의 기사가 사실적 뒷받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며 이를 뺄 것을 요구했다. 당시 금창태 사장은 이철현 기자의 기사도 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금창태 사장은 곧 이철현 기자를 불러 “이학수 부회장은 내게 대학(고려대) 후배다. 서로 도움을 많이 주고받았다. 기사 좀 빼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금창태 사장은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최근 인사도 아니고, 관련 문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익명의 ‘투서’로 기사를 만든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담당 기자에게 ‘보류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1)

▲편집권 수호 투쟁을 펼치고 있는 시사저널 노조(현재는 참언론실천 시사기자단)가 노동자대회에 참여, 시사저널 사태의 발단과 배후에 삼성이 있음을 알리고 있다..     ©박철홍

얘기가 엇갈리지만 어쨌든 이윤삼 편집국장과 장영희 취재총괄팀장은 기사를 내보내기로 합의했다. 삼성 전략기획실 간부로부터 전화가 계속 걸려왔지만 이들은 기사를 내보내기로 다시 한번 결정했다. 다음날인 6월 16일 오후 3시께 시사저널 모회사인 서울문화사의 심상기 회장이 이철현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기사를 뺄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오후 6시에는 이윤삼 편집국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기사를 뺄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장영희 취재총괄팀장에게도 삼성 전략기획실 간부가 전화를 걸어 “(기사에 거론된) 당사자들이 명예훼손으로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벌일 수 있다. 삼성그룹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안이다. 기사를 뺄 것을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날 밤 10시께 심상기 회장과 금창태 사장 등 시사저널 경영진들이 회의를 벌였고, 6월 17일 오후 1시 현병구 시사저널 광고팀장이 인쇄소에 전화를 걸어 이철현 기자의 기사를 빼라고 지시했다.

이윤삼 편집국장과 이철현 기자는 해당 기사를 뺀 사실을 전해들을 수 없었다. 금창태 사장은 이날 회의 후에 이윤삼 편집국장에게 연락하려고 했으나 “편집국장이 이를(기사를 뺄 것을) 거절하고 연락도 받지 않아 임박한 시점에서 편집인으로서 권한을 행사한 것”이라고 말했다.2)

이윤삼 편집국장을 비롯해 편집국 기자들이 이 사실을 안 것은 17일 오전이었다. 더구나 경영진에게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기자협회를 통해 이 사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6월 19일 이윤삼 편집국장은 기사를 뺀 것에 대한 항의로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20일 이윤삼 편집국장의 사표는 즉각 수리됐다. 이에 시사저널 편집국 직원들은 6월 21일 ‘시사저널 편집권 수호를 위한 편집국 총회의’를 구성하고, 22일부터 매일 오전 9시와 오후 6시에 비상대책회의와 금창태 사장 퇴진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그리고 6월 29일 노조(언론노조 시사저널 분회)를 결성해 사측과 맞서게 된다. 시사저널 사태는 시작됐다.
 
중앙일보맨 금창태

사건이 시작된 초기에 안철흥 시사저널 기자협의회장은 “이번 사건은 삼성이 관련 기사를 빼려고 금 사장에게 로비를 벌였고, 중앙일보와 삼성 출신인 금 사장이 일방적으로 기사를 삭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3) 
그리고 시사저널 편집국 간부와 기자들에게서 이번 사태와 관련해 “기사가 삭제됐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삼성이라는 거대 자본이 언론사 편집권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단적인 면을 보여준 것” “그 연결 고리에는 삼성 출신의 금창태 사장이 있다” “금 사장이 평소 간부들을 모아 놓고 ‘언론이 힘들어지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결국 삼성뿐’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금 사장은 삼성 관련 기사는 반드시 챙겨본 뒤 ‘삼성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안다. 취재기자가 틀렸다’는 식으로 말한다”, 삼성 8000억 원 헌납 건과 관련해서는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는데 잘했다고만 써야지 왜 딴지를 거느냐’, 삼성 통권호 때는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특정 인사를 옹호하면서 기자를 질책하기도 했다”는 발언이 쏟아져 나왔다.4)

모두 금창태 사장의 친정인 중앙일보, 그리고 중앙일보의 소유주였던 삼성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다.

▲ 중앙일보맨에서 삼성의 언론인이 된 금창태 사장     © 박철홍
193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금창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중앙일보 공채 1기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업무 추진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입사 2개월 만에 ‘공굴리기 도박단’ 기사로 중앙일보사 특종상을 받았고, 1973년 4월과 6월에는 사내 특종상을 연이어 수상했다. 이후 그는 중앙일보에 대한 애사심을 인정받아 계속 승진했고 경영진으로 합류해 신문본부장 상임이사(1994), 전무이사(1995), 편집인(1996), 부사장 겸 편집인, 인쇄인(1999), 대표이사 사장(1999), 부회장(2001)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이력에서 빠져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편집국장인데, 금창태는 중앙일보에서 편집국장을 하지는 못했다. 1991년 편집국장 내정자로 지명됐지만 노조를 비난한 발언과 독단적인 성품이 문제가 돼 편집국장 임명동의제 이후 처음으로 편집국장에서 낙마했던 것이다. 

이력에서 볼 수 있듯 그는 평생을 중앙일보맨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2003년 시사저널 사장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이때 이미 금창태의 사장 부임에 우려하는 시각이 있었다. 당시 기자협의회는 금창태 사장의 임명 이후 “시사저널의 정체성이 위기를 맞는 것이 아닐지 심각하게 우려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던 것이다.5)  그리고 그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참고로 이상호 MBC 기자는 2006년 8월 열린 ‘삼성과 언론’ 토론회에서 금창태가 이학수 부회장과 관련된 시사저널 기사를 삭제한 것을 두고,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며 “금 사장은 그들에 의해 낙점됐고 부사장, 사장, 부회장까지 오른 전형적으로 삼성이 인정한 인재”라고 말했다.6) 삼성이 실소유주였던 중앙일보에서의 경력은 2006년 시사저널 사태가 불거지면서 다시금 도마 위에 올랐고, 이른바 ‘짝퉁 시사저널’을 만들면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줄소송, 그리고 ‘나를 징계하라’

시사저널 사태가 발생하자 민언련, 한국기자협회를 비롯한 언론단체에서 성명서를 발표해 금창태 사장의 퇴진과 편집권 독립을 촉구했다. 그리고 한겨레21의 고경태 편집장은 2006년 6월 28일자 한겨레21에 <사장님, 그래도 됩니까?>란 편집장 칼럼을 실었다. 모두 금창태의 시사저널 편집권 침해에 대해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금창태는 이 성명과 칼럼을 근거로 한국기자협회의 정일용 회장,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최민희 공동대표, 그리로 한겨레21의 고경태 편집장을 상대로 1억 5000만 원씩, 총 4억 5000만 원의 민·형사 소송을 냈다. 명예훼손이 이유였다.

2006년 7월 6일 금창태는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의 칼럼에 대해 “언론이라면 쌍방 얘기를 듣고 사실을 보도해야 하는데 본인에게는 확인도 거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몰상식한 언론인’ ‘언론 탄압의 표본’으로 나를 비난했다”며 “지난 40년간 언론인으로 살아온 명예가 크게 훼손해 소송을 냈다”고 밝혔다.7) 기자협회와 민언련의 성명도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고 성명을 발표한 것을 문제 삼았다. 아울러 그는 “시사저널 사태를 보도한 미디어오늘과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등도 반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편파적인 기사를 게재했다”며 “2차 법률 검토를 거쳐 법적 대응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8)

이와 관련해 고경태 한겨레21 편집장은, 2006년 7월 13일자 한겨레21에 실린 <상식의 표본>이란 칼럼에서, <사장님, 그래도 됩니까?>란 칼럼이 실린 한겨레21이 발행됐던 6월 26일 저녁 “모레 오전까지 내 사무실로 와서 사과하지 않으면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는 전화를 받았고, 이 말을 들었을 때 “인간적 모멸감이 솔솔 피어 오르락말락했다”며 “설사 오란다고 쪼르르 달려가 석고대죄하리라 믿지는 않으셨겠지요?”라며 당시의 일화를 소개했다.

금창태의 줄소송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오마이뉴스에 칼럼을 게재한 서명숙 시사저널 전 편집장을 비롯해 뒤늦게 시사저널 사태를 보도한 MBC <PD수첩>의 담당 PD, <손석희의 시선집중>의 담당 PD 등 금창태는 자신과 관련한 비판적 보도에 대해 줄소송으로 대응했다.

또한 그는 시사저널 기자들에 대해서도 잇따라 대기발령, 출근금지, 자택대기발령을 내리는 등 강도 높은 징계를 내렸다. 2006년 8월 시사저널 경영진은 장영희 취재총괄팀장을 직무정지시켰고, 백승기 사진팀장을 대기발령했다. 김재태 편집장 직무대행에 대해서는 이윤삼 전 편집국장의 이름을 지면에서 빼라는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감봉 3개월의 징계를 내렸고, 경영진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편집회의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간부진들에게 서면경고를 내리기도 했다. 이에 대해 시사저널 기자들은 “나를 징계하라”며 실명으로 된 항의벽보를 내걸었다. 다음은 그 일부분이다.

“당신이 우리들을 모두 몰아내고, 당신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만 편집국을 새로 구성해 책을 만들면, 그건 시사저널이 아니라 주간중앙입니다. ¡¦¡¦ 당신은 17년간 수많은 시사저널 편집국 기자들이 땀 흘려 이룬 시사저널의 이름값을 도둑질하고 있습니다.”(신호철 기자)

“할 말이 없다. 징계도 모자라 인사발령이라니. 젊은 기자들의 인내가 이제 한계에 달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가야 할 사람은 선배들이 아니라 금창태 씨 당신이다. ... 당신의 지시를 거부하고 있고, 당신의 명예를 훼손했으니, 나도 징계하라!”(고제규 기자)9)

 
‘짝퉁 시사저널’의 발행

한편으로는 기자들에 대해 징계를 내리면서 금창태는 2006년 8월 9일 중앙엔터테인먼트&스포츠(JES)·인터넷신문 뷰스앤뉴스 등과 콘텐츠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체결 건에 대해 금창태는 “JES로부터는 시사저널에 부족한 엔터테인먼트와 스포츠 기사를, 뷰스앤뉴스로부터는 정치·경제·사회 기사들을 제공받기로 했다”며 “편집국의 업무를 줄여주고 탐사보도에 중점을 두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10)

이에 대해 시사저널 노조는 이번 계약이 짧게는 노조의 파업에 대비한 지면 대체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길게는 구조조정을 위한 포석이라며 콘텐츠 제휴에 거부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금창태는 이런 우려에 대해 “구조조정이나 파업을 대비한 것이 아니다. 시사저널은 구조조정을 할 필요가 없는 구조다. 기자들이 제공하는 기사보다 비용을 절감하고 질 높은 기사를 얻는 게 목적이다. 기자들은 시사저널을 생명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하라고 해도 파업을 안 할 사람이다”라고 말했다.11)

그러나 기자들이 시사저널을 생명과 같이 생각한다는 것을 아는 금창태는 기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파업을 대비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금창태의 마음속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모르는 일이지만 뉴스 제휴 이후의 행보를 보면 기자들의 파업을 대비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금창태는 2006년 12월 5일과 7일에 걸쳐 비상근 편집위원 16명을 대거 위촉했다. 그리고 실제로 2007년 1월 단체협상 조정 결렬로 벼랑 끝에 내몰린 기자들이 파업을 시작했을 때 금창태는 비상임 편집위원을 독려하고, 원고를 직접 챙기며 기자 없는 시사저널 899호와 900호를 발행했다.

편집위원들이 만들어낸 시사저널 899호는 서명숙 시사저널 전 편집장에 의해 ‘짝퉁 시사저널’로 불리게 된다. 2007년 1월 9일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짝퉁 시사저널’을 고발합니다>란 기사에서 서명숙은 “‘짝퉁 시사저널’에는 짝퉁으로서의 미덕마저 없다. 가짜인데도 진짜인 것처럼 정상 가격으로 유통되기 때문이다. 소비자를 철저히 기만하고, 몸담고 있는 기자들을 능멸하고, 나처럼 오랫동안 그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모욕하는 처사다”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시사저널 노조는 28일 오후 2시 서울 용산 서울문화사 앞에서 파국을 초래하는 시사저널 경영진 규탄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박철홍

그리고 시사저널의 고재열 기자는 시사저널 899호에 실린, 2002년 대선 때 국민통합21 대변인을 했던 김행 편집위원의 <노무현, ‘2012년 혁명’을 꿈꾼다>란 기사에 대해 “이것이 기사라면 파리가 새고 모기가 차세대 전투기다”라며 “나는 이 기사에서 취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 기회가 된다면 꼭 그에게 기사와 잠꼬대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싶다”고 비판했다.12) 

‘짝퉁 시사저널’은 ‘주간중앙’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중앙일보의 전·현직 기자가 쓴 기사 비율이 899호는 53%, 900호는 56%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중앙일보맨 금창태의 인맥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이렇듯 첨예하게 대립했던 시사저널 사태는 그러나 많은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계속됐다.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미디어오늘, 한겨레, 경향신문 등만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보도할 뿐이었다. 조중동을 비롯한 주요 일간지는 물론 한때는 방송조차도 시사저널 사태에 무관심했다.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지낸 서명숙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때 같은 직업에 종사했던 직업인으로서 언론에 묻고 싶다. 대한민국 언론 지형에서 독특한 위상과 입지를 지닌 시사저널이 파업에까지 이른 현 상황이 연예인의 결혼과 이혼보다도 뉴스 가치가 없는 일인가를. ‘호기심 천국’ 언론이 ‘재벌과 언론과 편집권’이라는 흥미로운 주제가 어우러진 이 사안을 왜 한결같이 외면하는가를.

혹 이 사태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삼성그룹, 정치권력보다 훨씬 강력하고 무섭다는 재벌권력을 의식하기 때문인가? 혹 이 사태가 당신들이 IMF 이후 치열한 생존경쟁의 와중에서 상당 부분 포기하거나 의식적으로 잊어버린 편집권 문제를 불편하게 환기시키기 때문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말초적인 선정성과 흥미만을 좇는 당신들의 고질이 불치병 수준으로 악화되었다는 건가?

함께 울어줄 문상객도 찾아주지 않는 적막한 상가에서, 머리 풀어헤치고 곡(哭)한다. 푸르른 내 청춘을 실려 보낸 시사저널이여, 제발 눈을 뜨라고. 어서 일어나 이제껏 걸어온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라고.13)
 
그러나 모든 언론이 무관심하지는 않았고, 기자들 역시 이번 사태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보이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정청래 의원과 한국기자협회가 신문·방송·인터넷언론 기자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 중 81.4%가 “경영진의 기사 삭제는 자본의 논리에 휘둘려 편집권을 침해한 행위”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편집권 독립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을 묻는 질문(복수응답 가능)에 88.3%가 대기업 등 광고주를 선택했고, 경영진이 60.8%를, 이익집단 및 압력단체가 30.3%를, 정치권력이 16.3%를 차지했다.14) 자본권력의 힘은 이미 막강해져 있었던 것이고, 시사저널 사태는 그 일면을 적확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노욕과 노추


1년 넘게 진행되어온 시사저널 사태는 결국 기자들의 퇴사로 일단락되었다. 시사저널 기자들은 새로운 독립매체를 창간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고, 시사저널의 금창태 사장은 새로운 인력을 뽑아 시사저널을 계속 발행하겠다고 한다. 그 사이 금창태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를 했던 고경태 한겨레21 전 편집장은 무혐의 처리됐고, 정일용 한국기자협회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도 패소했다. 또 2007년 4월 금창태가 ‘모욕죄’ 등으로 형사고소를 했던 ‘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시사모) 운영위원 전원이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줄소송에 이은 줄패소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참언론 실천 시사기자단 기자들이 참석자들과 함께 힘찬 새 출발을 다짐하며 건배를 했다.     ©박철홍


시사저널은 어쩌면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금창태 사장은 독립언론 시사저널을 문 닫게 한 장본인으로 후일 기록될지도 모른다. 노욕과 노추가 빚어낸 일로 치부하기에는 불편 부당하지만, 어쨌든 정일용 한국기자협회장의 말을 대신해 글을 마무리하자.

“1월 16일자 제899호 시사저널을 받아보고 또 한번 기가 막혔습니다. 이게 내가 알던 그 시사저널인가, 누가 그러듯 ‘짝퉁 시사저널’인가, 어이가 없었습니다. 꼭 ‘주간00’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떠오른 낱말이 있습니다. ‘노욕’과 ‘노추’입니다. ‘노욕(늙은이의 욕심)’은 누구도 막기 힘들고 ‘노추(늙은이의 추한 모습)’가 풍기는 역한 냄새는 코를 돌리게 한다는 옛말이 틀림이 없었습니다. ... 아무리 의술이 발달했다 해도 ‘인생 칠십 고래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끝마무리를 멋있게 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계신다는 말도 전해들었습니다. 이제 두 분 선배님께(심상기 회장, 금창태 사장) 드리는 말씀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지금 노욕을 부리고 계십니다. 노추를 그만 보이십시오.”15)

[각주]
 

1) 안경숙, 「“기사 문제 있어 유보” vs “친분 들어 삭제 요구”」, 『미디어오늘』, 2006년 6월 22일(인터넷판).
2) 안경숙, 「“금창태 사장 퇴진 운동 벌이겠다”」, 『미디어오늘』, 2006년 6월 22일(인터넷판). 3) 안경숙, 「“금창태 사장 퇴진 운동 벌이겠다”」, 『미디어오늘』, 2006년 6월 22일(인터넷판).

4) 안경숙, 「도대체 어떤 기사이길래…」, 『미디어오늘』, 2006년 6월 22일(인터넷판).

5) 안경숙, 「“금 사장 임명 때부터 예견된 일… 삼성 기사 유난히 간섭”」, 『미디어오늘』, 2006년 6월 28일(인터넷판).
6) 양문석, 「“이상호가 ‘유죄’면 우리도 유죄”」, 『미디어오늘』, 2006년 8월 4일(인터넷판).
7) 김상만, 「금창태 사장, 한겨레21 등 억대 소송」, 『미디어오늘』, 2006년 7월 6일(인터넷판).
8) 김상만, 「금창태 사장, 한겨레21 등 억대 소송」, 『미디어오늘』, 2006년 7월 6일(인터넷판).
9) 김상만, 「시사저널 기자들 “나를 징계하라”」, 『미디어오늘』, 2006년 8월 25일(인터넷판).

10) 김상만, 「시사저널, JES․뷰스앤뉴스와 제휴… 왜?」, 『미디어오늘』, 2006년 8월 11일(인터넷판).
11) 김상만, 「인터뷰 금창태 시사저널 사장 : “이념과잉 벗어나 전문성 높여야 생존”」, 『미디어오늘』, 2006년 8월 17일(인터넷판).
12) 고재열, 「『시사저널』 커버스토리, 이것이 기사면 파리도 새다」, 『오마이뉴스』, 2007년 1월 9일.
13) 서명숙, 「‘짝퉁’ 『시사저널』을 고발합니다」, 『오마이뉴스』, 2007년 1월 9일.
14) 김상만·윤정식, 「기자 81.4% “시사저널 사태, 편집권 침해”」, 『미디어오늘』, 2007년 2월 1일(인터넷판).
15) 정일용, 「『주간00』 같은 『시사저널』, 뭐하는 짓입니까」, 『오마이뉴스』, 2007년 1월 10일.
* 본 기사는 월간 <인물과사상> 8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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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7/23 [14:4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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