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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을 영어로 알리는 것은 우리말을 지키는 것"
영문판 한글언어문화사전 출판은 서정수 한양대 명예교수
 
대자보   기사입력  2003/06/07 [10:47]

6년간의 작업, 2천 여 쪽, 그리고 영문판으로 사전이 나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대형출판사에 출판했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사전은 이러한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더군다나 이 사전이 정년퇴직을 넘긴 원로 국문학자의 손에 출판이 되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머리를 갸우뚱 할 것이다. 국문학자가 무슨 영문판을, 혹시 '감수'만 한 것은 아닌지? 엄청난 자금이 들어갈 사전을 무슨 돈으로 출판할 수 있었는지?

이런 의문을 갖고 잠실 교통회관 근처의 서정수 명예교수(한양대 국어국문학)의 사무실로 방문해 사전출판의 경위와 의의를 묻는 자리를 가졌다.

서교수의 연구실은 일반적인 원로학자의 연구실과는 다른 풍경이다. 보통의 원로학자, 특히 인문계통의 교수연구실은 고전 등의 책으로 둘러싸여 책냄새가 물씬 풍기며 산수화 등이 걸려있는 등 단아하고 고전적인 풍취를 풍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서교수의 연구실은 크게 반으로 나뉘어 출입구 앞은 일반 사무실 같이 책상위에는 컴퓨터와 프린터 등의 관련기계들이 놓여져 있고, 그 안으로 서교수의 연구공간이 있다. 서교수의 책상 위에도 당연히 컴퓨터가 놓여져 있다.

70대의 서교수의 첫 인상은 보통의 '노인'분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약간 마른 체격에 형형한 눈빛, 논리적이면서 정열적으로 말씀하시는 인상은 마치 30대 청년의 인상과 다를 바 없었다.

먼저 한 질문은 아무래도 건강문제,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일을 해야 건강하다"며 허허 웃으신다.

영문판 '한국언어문화사전'의 출판 때문에 왔지만,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컴퓨터 활용부터 물어보았다.

컴퓨터는 많이 활용하십니까?
- 지금은 많이 일반화됐지만 나는 87년부터 컴퓨터를 이용해 강의안 및 저술에 활용했다. 삼보컴퓨터의 보석글부터 시작해 아래아한글 등 컴퓨터를 일찍부터 이용했고, 1990년 '국어정보학회' 창간호에 '컴퓨터는 나의 애인'이라는 글을 올려 동료학자들에게 컴퓨터 활용을 소개하기도 했다.

보통의 인문학 계열의 학자들은 '기계치'에 가까운데 기계에 밝으신 이유는?
- 사실 나는 1956년도에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자연과학도였다. 이후 미국유학을 준비하다가 5.16쿠데타로 미국유학의 길을 접고 64년부터 68년까지 연세어학당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우리말을 가르쳤다. 그 때 외솔 최현배 선생의 영향도 있고 해서 연세대학원으로 진학해서 오늘날까지 국문학만 한길을 판 것이다.

서교수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이른바 '비정통파'인 셈이다. 요즘은 학제간의 교류가 당연하거나 필수적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자연과학도가 인문학, 그것도 정수인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 한다는 것은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비전공자로서 국문학 전공을 한다는 것이 어렵고 불이익도 많았을텐데?
- 불이익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뒤늦은 공부 때문에 시간이 아까워서 연구에만 집중했다. 다만 연세어학당에서 외국인을 가르칠 때 우리말을 과학적으로 다듬고 체계화 한 교재가 있었으면 했는데 당시로서는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이 유일했다. 아울러 한영사전이라 해봐야 일본의 사전을 그대로 번역한 비전문가들이 만든 것이어서 별 도움이 안됐다.
마침 당시 미국의 촘스키 등이 '변형문법이론' 등을 발표하여 이를 국내에 소개하고 우리말의 문법을 다듬는데 활용했다. 이를 토대로 '우리말본'을 개정한 '국어문법'을 집필 저술할 수 있었다.(참고로 서교수의 '국어문법'은 1996년 '학술원상'을 수상한 명저이다)

영문판 '한국언어문화사전'을 출판한 동기는?
- 앞서도 언급했지만 외국인을 가르칠 때 일본식 사전으로는 우리말의 특성이나 내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어서 늘 아쉬움을 느껴 사전작업에 착수했다. 우리가 정관사와 부정관사를 제대로 구분 못하듯, 외국인들은 ‘-이’ ‘-가’ 같은 조사를 어려워한다. 이런 조사와 어미의 의미와 쓰임을 상세하게 풀이한 것도 다른 사전에선 볼 수 없는 특징이다.
특히 한영사전의 경우 '가정'이란 말의 용례를 찾아보면 가나다순으로 따져 '가정 교육, 가정 법원, 가정 부인, 가정 사정' 등으로 나타나는 데, 이 사전은 더 잘 쓰이는 순서로 놓고 비슷한 용례로 묶어 '가정 부인, 가정 주부, 가정 사정, 가정 형편' 등으로 배열했다.

영문판 '한국언어문화사전'은 서교수 필생의 사업이라 할 수 있다. 64년 연세어학당에서 청년의 몸으로 외국인을 가르치면서 느꼈던 문제를 이제는 고희의 나이에 완성했으니 어찌보면 40년의 세월이 걸린셈이다.

이 사전을 만든 가장 큰 목적은?
- 교포 2세를 비롯, 우리 언어와 문화를 배우려는 외국인들에게 쉬운 영어로 우리의 '언어문화'를 알리기 위해 만들었다. 최근 국제화니 세계화니 해서 외래어가 무분별하게 쓰이고 있다. 사실 한글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우수한 글자이다. 내가 이 사전을 만듦으로서 오히려 우리말을 영어로 알려 거꾸로 우리말을 지킬려는 것이다.

서교수는 '언어문화'라는 것에 유독 힘주어 강조하였다. '언어문화'란?
- 언어란 그 사회문화의 총화이다. 언어란 그 사회의 '정신적 기초'이고, 언어와 결부된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

언어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은?
- 우리말을 쉬운 말로 소화해서 많이 써야한다. 우리말은 한자가 섞여서 고유의 말도 많이 사라지고 아직도 어렵다. 법원이나 관청에 가서 공문(公文)을 들여다봐라. 중학생도 이해해야 하는데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있다.
영국에서는 70년대 중반 '쉬운말쓰기운동'(Plain English Campaign)이 일어나 사실 오늘날의 영어가 전세계로 확산하는데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 그런데 그것도 알고보면 아주 사소한 일에서 출발했다. 한 중학생이 공문이 어렵다고 항의하자 권위주의적인 영국 의회에서 입법발의를 해서 모든 공문은 평이하고 간결하게 쓸 것을 입법화 한 것이다. 사실 영어의 보급은 영미 등 강대국의 언어이기도 하지만, 이 일로 인해 외국인이 영어배우기가 쉬워졌고 그로인해 영어의 보급에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서교수의 학문과 일에 대한 열정은 사전편찬비의 조달에도 나타난다. 워낙 엄청난 규모라 많은 자본이 들었지만, 연구비나 출판비를 탈려면 시간이 오래걸리고 번잡해서 출판작업에 방해가 될까봐 퇴직금을 몽땅 쏟아부었다고 한다. 그 일로 인해 부인에게 쫒겨날 지경이라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누군가는 꼭 해야할 일을 했다는 걸로 위안을 삼는다고 했다.

서교수는 학자로서도 큰 업적을 이뤄냈지만, 상아탑 속의 학자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의 뜨거운 한글사랑은 연구실에만 가둬두질 않았다. 서교수의 명함에는 '한글문화세계화운동본부' 회장, '한글인터넷주소 추진 총연합회' 상임대표, '국어정보학회' 명예회장 등의 직함이 있다. 어찌보면 허명을 줄줄이 늘어놓으면서 생색내기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가만 보면 그것은 모두 한글의 '국제화'와 '세계화'에 연관되어 있는 것이지 일반적으로 폼나고 돈되는 그러한 일들은 전혀 아니다.

최근 서교수는 더욱 바빠졌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시민단체를 이끌면서 한글날의 '국경일' 지정운동을 벌이고 있을뿐더러, 우리말을 'F'로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음성기호의 제정 등 사회활동과 연구활동을 병행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는 남북한 컴퓨터자판 통일문제에도 각별한 정성을 쏟기도 했다.

서교수의 이러한 한글사랑이나 한글운동이 '세계화' 추세에서 복고적 혹은 국수적이란 시각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 세계문화는 개별문화의 총합이다. 우리문화를 발전시킨다는 것은 세계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다. 외래어의 무분별한 남용속에서 '편리성'과 '효율성'을 따지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고유문화의 존속과 발전이 없으면 뿌리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다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더 잘 받아들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문화에 대한 이해와 애정이 있어야 한다.

이같은 서교수의 입장은 90년 국어정보학회를 창립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국어'와 '정보'라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명칭에는 '외래정보문화의 토착화'와 '우리 언어문화의 정보화'라는 취지와 전략이 녹아있었던 것이다. 한글인터넷주소 총연합회 상임대표 일도 "영어로 된 인터넷의 관문을 한글로 열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정보화격차 해소"의 일환인 것이다.

서교수의 일생은 어쩌면 한국현대사의 왜곡과 굴절속에 불행했다고 볼 수 있다. 분단된 나라의 젊은이로 물리학을 전공하고 자연과학도의 꿈을 키우며 미국유학을 준비했다가 5.16 쿠데타로 좌절된 후, 국문학도의 길을 걸으며 학문적 업적까지 이뤘지만, 이제는 '세계화'라는 거친 풍랑속에서 백발이 성성한 몸으로 고유문화의 보존과 한글의 세계화를 위해 고군분투에 여념이 없으시고 계시다. 어찌보면 세계화라는 거대한 해일을 엉성한 제방 위에서 온몸으로 굳건히 버티고 계신 것이다.

그래도 서교수의 삶은 성공적이고 행복하시지 않나해서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다.

지금 행복하십니까?
- 후회되는 인생은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 모자랄 뿐이다.

이제 그 시간을 우리 후학들이, 젊은세대들이 함께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니 잠실에 드리워진 석양이 유난히 빨갛다.
서정수 교수의 건강과 '한글의 세계화'라는 바램을 함께 기원한다.

우리말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방문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한글문화세계화운동본부 http://www.hansebon.or.kr/ (한글인터넷주소 '한세본') 02-412-9441


[서정수 교수의 삶]

1933년 전남 무안군에서 남
서울대 문리과대 물리학과, 연세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현대국어 문법론)
한글 학회 이사, 언어학회 부회장, 국제 한국어 교육학회 회장
주요 논저: 변형생성문법 이론과 국어 동사류의 하위 분류(1968), 동사 "하다"의 문법(1975), 국어 구문론 연구(1983), 국어 문법의 연구 Ⅰ,Ⅱ(1990)
현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국어정보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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