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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당신들은 80년대에 뭘했소?
현실맞서다 스러져간 이들에게 보내는 민청련 마지막 의장의 80년대 회고
 
김성환   기사입력  2004/11/25 [18:04]
얼마 전 일찍이 세상을 하직한 한 선배의 10주기 기념식과 함께 10주년을 기념하는 작은 문집이 나왔다. 그 사람의 이름은 이범영. 10년 전 돌아가실 때의 직함은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의장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단체와는 관련이 없었고, 내가 그 선배와 만나서 함께 활동한 공간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라는 단체였다. 약칭 민청련이라고 불린 이 단체는 1983년에 만들어졌는데 단체 이름보다는 초대 의장 김근태와 그에 대한 고문사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반대로 마지막 의장이 나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작년에 이 단체 창립 20주년 행사가 있었는데 그때의 소회를 적은 글로 이번 호에 대신할까 한다. 20년 세월이면 이제 역사의 대상이 될 법도 하지 않은가.
 
현실과 맞서다 스러져간 이들… 회한과 후회만 남은 20대
 
나는 1981년 9월, 대학 4학년 2학기 중에 교내 시위를 주동해서 학교에서 제적당하고 검찰에 구속되었다. 교내 시위라고 해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올라가 옥상에 올라가 유인물을 뿌리며 “전두환 독재정권 타도”를 한 10여분 외쳤을 뿐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커서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당시 학생운동의 ‘정규코스’는 감옥 갔다 와서 ‘현장’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때 말하는 현장이 어디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마도 지금 한나라당 의원인 김문수일 것이다.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을 이끌면서 학생운동가들의 노동현장으로의 이전을 가장 적극적으로 독려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의 탄압 서슬이 퍼렇던 1983년에 감옥에서 나온 나는 ‘현장’으로 가지 않았다. 내가 생겨 먹은 모습이 워낙 노동자답지 않아 위장취업이 쉽지 않을 것 같아서이기도 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노동자 계급이 ‘기본 계급’이고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그들에게서만 나온다는 지극히 일차원적인 좌파 이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보다 더 직접적인 정치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마침 그런 생각을 공유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서 만든 것이 바로 민청련이었다. 그래서 감옥서 나오자마자 민청련 창립에 참여했고 80년대 내내, 내 나이의 20대를 그곳에서 활동하며 보냈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흔하디 흔한 가정법 하나.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도 똑같이 민청련 활동에 투신할까? 지금으로서 내 대답은 단연코 “아니오”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시 살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다.
 
민청련 초창기 전업 활동가들이 받는 돈은 아마도 ‘기본급’이 월 10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에 결혼하면 5만원 보태주고, 애 하나 낳을 때마다 또 5만 원씩 보태주었다. 단 배우자가 직업을 가지고 있을 경우 다시 5만 원을 삭감하는 규정도 있었다. 그래서 미혼자나 갓 결혼한 사람의 경우 대충 10만 원 내지 15만 원 받았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당시에 이 돈의 실질가치는 지금보다 훨씬 높았지만 절대금액에서 형편 없이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돈 갖고 먹고 살았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다만 졸업하고 직장 다니던 친구들을 만나면 밥값과 술값은 그들이 내는 것이 불문율이었고 내게 필요한 돈은 교통비 정도였으니 못 버틸 것도 없었다. 나중에 결혼하게 되었을 때 만약 나의 아내가 돈을 벌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결혼과 함께 운동을 그만두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나는 아내 등을 처먹은 ‘등처가였다.
 
뭐 치사하게 돈 얘기 하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학생운동할 때 내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하나의 배신감을 털어놓고 싶다. 지금은 안 그렇다고들 하지만,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우리 ‘과’에는 부잣집 자식도 있고 가난한 집 자식도 있었다. 아마도 반반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4학년 때 ‘디’ 치고 ‘빵’에 갔다 온 다음에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니 대체로 가난한 집 아이들은 운동판에 살아남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운동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더 급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건 단지 나의 ‘감’이 그랬다는 것이지 무슨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혹 나의 오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애초부터 가난했기에 ‘운동’을 선택함으로써 참으로 쓰디쓴 맛을 봐야 했다. 나는 대학에 들어오기 전까지 서울 변두리의 가축 우리를 개조한 허름한 집에서 살았으며, 당시 우리 부모님은 동네 버스종점에 신문가판대를 차려놓고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대학에 합격했을 때 부모님이 기뻐한 정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나는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당장 신문가판대를 그만두게 하고 내가 돈을 벌기 시작했다. 장학금을 학내와 학외 두 군데서 받고, 일주일에 두 번 가는 과외 아르바이트를 두 ‘탕’ 뛰니까 내가 번 돈만으로도 우리 식구들이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런 사실상의 가장인 내가 어느날 갑자기 아무 예고도 없이 감옥으로 가버린 것이다. 우리 집이 어떻게 됐겠는가. 폭삭 망해버렸다.
 
나는 1986년 11월 29일 결혼했다. 그날은 마침 신민당이 전국을 돌며 벌이던 직선제 개헌운동 현판식이 서울에서 벌어진 날이어서 하루 종일 온 시내가 최루탄으로 범벅이 됐다. 얼마 전 돌아가신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님께서 주례를 서주시기로 했는데 홍제동 성당에 연금당해서 결국 내 결혼식이 있던 혜화동 성당에는 못 오셨다. 할 수 없이 혜화동 본당 신부가 긴급으로 주례신부가 돼 주었는데 내 이름 석자를 더듬거릴 정도로 얼렁뚱땅 ‘땜빵’이었다. 민청련 회원들은 다들 집회에 나가 결혼식은 썰렁했다. 나중에 집회 끝나고 피로연 때 몰려왔는데 그들이 옷에 묻혀온 최루탄 가루 때문에 때 아닌 눈물 바다가 되기도 했다.
 
당시 내가 가진 건 진짜 그거 두 쪽 밖에 없었다. 결혼 전날 어느 선배가 이발하고 목욕이라도 하고 가라고 10만원 짜리 수표 한 장을 준 기억이 난다. 축의금 들어온 돈 박박 긁어서 400만 원을 마련해 하남시에 셋방 얻어서 살기 시작했다. 아내는 나에게 정말 축복이었다. 그러니 생각해보라. 다시 인생을 시작해 똑같이 운동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지금 아내와 같은 사람을 만날 확률은 복권에 당첨될 정도로 희박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다시 살아도 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나의 경우엔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몸으로 때우던 운동
 
내 대답이 “아니오”인 이유는 또 있다. 사실 이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이다. 민청련 세대가 모두 기억하고 있듯이 80년대는 논쟁의 시대, 사상투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뜨거웠던 논쟁이 지나고 나서 남은 것이 별로 없다. 회한만이 남아 있다.
 
민청련이 출범하고 나서 가장 논쟁의 화두가 됐던 문제는 이른바 ‘현장론’이었다. 당시 운동권을 풍미하던 현장론의 요점은 ‘학생운동만으로는 안 된다,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것을 공개적으로 표방한 쪽이 서노련이었고 민청련은 그들로부터 ‘쁘띠부르주아적 정치꾼’이라는 비아냥을 숱하게 들어야 했다.
 
지금 와서 보면 그건 하나의 ‘교조’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교조주의의 원본은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대학 다닐 때부터 ‘비밀 써클’의 커리큘럼 자체가 마르크스주의 학습으로 짜여 있었다. 교재는 대개 일본의 진보적 학자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해석한 책들이었다. 원본은 구경한 적이 없었다. 왜냐 하면 ‘연구’를 위한 써클이 아니었으니까. 요점만 이해하고 빨리 실천에 옮기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원전만 제대로 읽었어도 뭔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근대사를 보면서 개화파들이 서구 문명 ‘원본’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본을 통해 번안된 서구를 받아들임으로써 비극이 발생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정작 우리가 개화파와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물론 ‘원전’에 충실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당시를 풍미했던 CA파, 이른바 제헌의회파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역사에서 전개된 혁명의 과정을 그대로 한국에 도입해 재현하자는 그들의 주장은 지금에 와서 보면 또 얼마나 황당한가. 당시 내 동기 중에 그쪽에서 유명한 이론가가 있었는데 그가 늘 하던 말이 “공부 좀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말하는 공부는 ‘레닌 저작집’을 학습하라는 것이었다.
 
레닌 바람이 지나가고 나니 김일성 바람이 불어 왔다. 당시 갑자기 등장한 주체주의자들과 곧잘 밤을 새워 토론하곤 했다. 그때도 그들이 내린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공부 좀 하라”는 것. 물론 북한 쪽에서 나온 ‘원전’을 읽으라는 것이었다.
 
우스운 건 어느쪽이든 ‘공부하라’고 할 때 그 ‘공부’는 ‘원전에 대한 맹종’과 동의어였다는 것이다. 원전에 대한 의문 표시나 이의 제기는 용납되지 않았다. 누가 그걸 막은 것이 아니라 그런 문화 자체가 없었다. 운동이 무슨 봉건시대 훈고학도 아닐 터인데, 참 답답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한때 나는 정말로 학습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했다. 외부의 것을 달달 외워 한국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학습’이 아니라 원전을 꼼꼼하게 읽고 비판적으로 소화해내는 진짜 연구다운 연구를 해보고 싶었다. 때마침 국내 출판사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완역돼 나오기도 했었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우선은 마르크스 저작의 방대한 양에 질려버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상황이 한가하게 책이나 보고 있게 내버려두지를 않았다. 북한 원전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다른 역사 사료들을 다 뒤져봐야 하는 것이었기에 금새 한계를 느꼈다.
 
그러니 다시 그때 상황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내 능력으로는 제대로 공부하면서 활동하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충족될 수 없을 것 같다.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 헌신’
 
마지막으로 내 대답이 “아니오”인 이유는 내 한 몸을 던질 만큼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난 내가 지난 날 온 몸을 던져 헌신할 정도로 철저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항상 현실과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해왔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함께 활동하다 먼저 가신 두 선배 생각난다. 한 분은 김병곤 선배이고 또 한분은 앞에서 말한 이범영 선배이다.
 
김병곤은 민청련 활동에 나보다 뒤늦게 가담했다. 그는 80년 ‘서울의 봄’ 때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을 주도한 쟁쟁한 활동가였지만 당시는 이미 졸업해서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직장을 그만두고 민청련 활동을 시작했다. 나는 그 점이 오히려 부러웠다. 이미 사회에서 어엿한 직장을 갖고 있던 사람이 그걸 한순간에 때려치우고 전업적 활동가가 된다는 건 대단한 결심이 없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상임위원장을 맡아 김근태 의장을 도우며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조직을 헌신적으로 이끌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그 지긋지긋한 ‘비(판적)지(지)’ 논쟁 속에서 김병곤은 개인적으로 김대중에 대한 비지론에 찬성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단 조직에서 비지로 결정이 내려지자 그 다음에는 두 말 않고 그 결정에 충실하게 따랐다. 당시 운동판에서 그런 인간형은 거의 없었다고 기억한다. 모두가 정견이 다르고, 정파가 다르면 제각기 흩어져 떠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조직의 원칙에 충실하려고 했던만큼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고 그것이 아마도 그 몹쓸 암의 원인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이범영 또한 진정한 활동가였다. 85년도 쯤인가 김근태 의장이 구속되고 민청련 감부들은 모두 ‘잠수’하는 상당히 어려운 시기가 왔다. 그때 어느 시기엔가 지방에서 비밀리에 총회를 열었던 적이 있다. 2박 3일 동안 꼬박 회의와 논쟁만 한 대단한(?) 총회였는데 그때 이범영은 이후 민청련에서는 유명해진 이른바 ‘3차원 헌신론’을 주장했다. 운동의 대의에 찬성한다면 그냥 설렁설렁해서는 안 되며 “육체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3차원에 걸쳐 운동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걸 역설할 때 모두들 분위기가 숙연해졌었다.
 
그리고 이후 이범영은 자신이 천명한 그 원칙을 고집스러울만치 충실하게 지켰다. 세상 살면서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결국 독재정권에는 그리도 굳세게 맞서던 그였지만 암이라는 치명적인 병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나는 이범영이 당시 운동판 상황에서 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간 셈이라고 생각한다.
 
김병곤이나 이범영이나 모두 기골이 장대하다. 자연수명으로 치면 나 같은 사람보다도 훨씬 건강하게 오래 살 체질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원칙을 저버리지 않으려고 ‘현실’과 맞서다 결국 스러지고 말았다. 그러니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건 운동이요, 민청련이다.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그들처럼 철저하게 살 자신이 없다.
 
민청련의 역사적 평가
 
현재 정부는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신청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에 국한돼 있다. 단체나 조직에게 민주화운동을 인정하는 것은 법률적으로 불가능한 모양이다. 하지만 사실 운동의 힘은 개인보다는 조직에서 나왔고 그만큼 조직이나 단체에도 민주화운동 인정이 주어져야 할 것이다. 민청련 운동도 역사적 평가 위에 올바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부가 인정해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운동의 중심에 서서 온몸을 던진 이들이 대중들로부터 정당한 존경과 찬사를 받을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본문은 대자보와 기사제휴협약을 맺은 진보적 월간지 [말](http://www.digitalmal.com)에서 제공한 것으로, 필자는 말지 편집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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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1/25 [18:0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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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숨 2004/12/01 [15:47] 수정 | 삭제
  • 글자체는 참 감동적이고, 글쓴이에 존경을 표한다...그런데 대자보의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제목과 내용이 좀 맞지 않는다. 뉴라이트 운동에 관한 내용이 거의 없지 않은가 말이다..

    대자보 사람들은 한번 휘갈기고, 다시 쳐다보지 않는 모양이다.
  • 굽은 나무 2004/11/26 [23:16] 수정 | 삭제
  • 이글을 읽어내려갈수록 가슴이 울컥거리며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당장에도 80년대의 투쟁과 정신들이 이 산하 도처에 유효하게 요청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운동방식은 시대변화에 추수해야지요. 80년대 동 시대를 살아왔지만 고작 운동이래야 인도불럭 깨트려 몇 번 던지고 최루탄 피해 막걸리집에서 코박고 살아왔던 나들이 더 많았기에 몇 몇 운동권 학생들을 보면 저런 열정과 청년정신이 가슴으로만 그리워하고 말았습니다. 민중을 위하여 헛심 팽기도록 립서비스만 운동을 하고만 내 자신도 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핑겟거리야 시골에 사는 부모님의 노심초사라고 둘러댈 것도 많고 고작 열정이란 것도 사이비의 그것과도 흡사했으니까요.
    이제는 부끄러움과 회한만 남아서 초라니 똥간에 걸터앉은듯 무엔가 불안과 두려움만 눈속에 가슴속에 여울거리며 어른거립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직도 우리 현실에 많이 남아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인터넷이든 길거리든 내 나라를 위하여 내 이웃을 위하여 하나 하나 물질적 정신적 서포트즈가 되는 길이 공동체적 가치란 걸 확신합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