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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왜 여성차별을 집요하게 했는가?
[책동네] <캘리번과 마녀>,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착취의 근원 밝혀
 
이인   기사입력  2011/12/09 [10:29]
▲     ©이인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지 좀 이상한 느낌을 받는 학자들은 왜 자본주의 시대가 생겨났는지 궁금해 하며 역사를 뒤지고 들쑤십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생겨나던 때의 수많은 자료들을 모아 자본주의 흐름이 어떻게 불거지게 되었고 사람들의 몸놀림과 욕망, 생활과 관계가 어떻게 변하는지 찬찬히 담아내죠.
 
그렇지만 아무리 꼼꼼한 책이라 하더라도 늘 아쉬움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사책들엔 남자들이 농촌에서 쫓겨나 노동자가 되는 과정만 그려져 있지 그때 ‘여자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잘 다루지 않기 때문이죠. 자본이 더 커지기 위해 기존의 사회를 뒤흔들 때 여자들은 무엇을 겪으며 어떠했는지 묻혀 있었습니다.
 
여성차별을 바탕으로 이뤄진 ‘시초축적’
 
『캘리번과 마녀』는 바로 이 지점을 찬찬히 파헤칩니다. 그리고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밝혀내죠. 자본주의 사회의 여성에 대한 차별은 예전의 형태로 쭉 있었던 게 아니라 자본주의가 돌아갈 수 있도록 그에 맞게 만들어졌다는 걸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가 생겨나면서 가부장제가 새로이 바뀌었고 여성차별을 바탕으로 ‘시초축적’이 이뤄진 것이죠. 자본주의가 노동력을 착취할 때, 여성이 돈을 받지 않고 하는 노동은 바로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밑천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노동을 빼앗아가는 권력에 고분고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역사엔 ‘폭력’이 늘 도사리는 것이죠. 생산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고 날마다 빡세게 일해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던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에서 미친 듯이 노동을 하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게끔 믿으려면 이에 거스르는 여성들을 짓밟고 깔아뭉개야 했죠. 그것이 바로 ‘마녀사냥’의 이유입니다.
 
이 책이 다루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질문은 근대 초입에 일어난 수십만 “마녀들”의 처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자본주의가 여성을 상대로 한 전쟁과 함께 시작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다. 여성주의 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마녀사냥은 재생산 기능에 대한 여성들의 통제력을 파괴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좀 더 억압적인 가부장적 체제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합의가 형성되었다. 33~34쪽
 
여성의 일을 하찮게 여기며 자연스럽게 노동력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자본주의 전까지는 여성과 남성의 일이 딱히 나뉘지 않았으며 나뉘었다 해도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여성의 일은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여자 일에 대한 ‘보상’은 안 하는 걸 당연하게 믿습니다. 노동을 위아래를 구조화시키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은 너무 자연스러워진 것이죠.
 
이런 일이 그저 쉽게 이뤄지지 않죠.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공격이 이뤄졌고 여성들은 자신의 몸을 둘러싼, 특히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빼앗깁니다. 이것을 가장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것이 마녀사냥이죠.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갈 때, 자본주의가 시작되는 길목에서 많은 마녀사냥이 벌어져 애꿎은 여성들을 불에 태워졌고, 여자들은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신체’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전까지의 몸과는 다른 몸이 된 것이죠.
 
▲ 왜 아무렇지 않게 삽시간에 마녀사냥이 일어난 것일까? 영화 <제7의 봉인>     © 이인

마치 인클로저가 농민들로부터 공유지를 박탈한 것처럼 마녀사냥은 여성들로부터 신체를 박탈했다. 따라서 신체는 노동의 생산을 위한 기계로 전락하지 않게 막아 주던 모든 예방 장치에서 ‘해방되었다.’ 화형대의 광경은 공유지에서 둘러쳐진 담장보다 더 무시무시한 장벽을 여성의 신체 주변에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272쪽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려면
 
여자가 당하는 억압은 경제권이 없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에 여자들이 ‘남자들처럼’ 바깥에서 일하면 ‘여성해방’이 이뤄진다고 맑스주의자들은 믿었습니다. 이런 흐름이 20세기에 세차게 일었고 시몬 드 보부아르는『제2의 성』에서 일을 하여 경제독립을 해야 여성이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죠. 하지만 현실은 집 밖으로 나가 일 한다고 해서 여성들의 해방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성노동자들은 집안과 집밖에서 이중으로 착취를 당하며 고생하기 일쑤죠.
 
실비아 페데리치가 30년 동안 묵직하게 파고든 연구라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 생각의 걸음을 새로이 옮기게 됩니다. 바깥에서 돈 벌어오는 것만을 치켜세우지만 사실 이렇게 임금노동이 돌아갈 수 있는 바탕엔 집안에서 돈 한 푼 받지 않은 채 일하는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죠. 자본주의가 돌아가려면 임금을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없으면 자본주의가 무너져 내리는 노동이 있는데, 그것을 여성들이 여태껏 해왔던 것이죠.
 
따라서 집안일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하며, 어떤 노동은 업신여기고 어떤 노동엔 억수로 돈을 떠안기는 노동의 위계가 무너져야만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겠죠. 물론 쉽지 않겠죠. ‘마녀사냥’ 식으로 우리 몸에는 ‘자본주의의 훈육’에 오랫동안 깊이 스며들었으니까요. 그래서 새로운 사회를 꾸리려면 그동안의 자본주의의에 길들여진 자신의 신체와 동선을 뒤집으면서 새로운 ‘신체’와 ‘새로운 관계망’을 꾸려가야 한다는 ‘몫’이 주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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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12/09 [10:2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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