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그녀의 한국화, 금분으로 공작새 날개를 빚다
[전시회] 한국화의 새로운 발견, 소희 권시숙 제1회 개인전 열어
 
김영조   기사입력  2008/12/16 [19:08]
▲ 금분으로 그린 소희 권시숙의 작품 화(和) Ⅰ     © 권시숙

한국화(韓國畵)란 무엇인가? 한국화는 사전에 “한국의 전통적 기법과 양식에 의해 다루어진 회화”라고 풀이되어 있다. 예전엔 서양화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쓰이던 동양화라는 이름을 일제(日帝)에 의해 타율적으로 조성된 용어라 하여 이를 주체적 입장에서 이름을 고쳐 최근에 쓰기 시작했다.
 
그 한국화를 우리는 얼마나 감상하고, 얼마나 아는가? 그저 김홍도, 신윤복의 이름만 아는 정도는 아닐까? 많은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귀를 자른 네덜란드의 빈센트 반 고흐는 알아도 조선시대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화가, 자신의 이름 북(北) 자를 파자하여 스스로 “칠칠이(七七이)”라고 불렀던 최북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그 한국화 전시회를 감상할 기회가 생겼다.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운곡 강장원 선생에게서 공부한 소희 권시숙의 제1회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들어가자 느낀 건 차분하면서도 시원스러운 또 아름다운 화폭 그것이었다. 환한 웃음으로 맞아준 소희 권시숙, 그녀의 그런 성품이 바로 작품의 바탕이 된 건 아닐까?
 
▲ 소희 권시숙의 작품 "추곡(秋谷) Ⅰ"     © 권시숙

작품은 먼저 폭포가 있는 산수화부터 시작하여, 산사와 소나무, 시골집 그리고 전혀 다른 도회풍의 작품들도 아울러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금분으로 정성을 다해 공작새 한 쌍을 그린 “화(和) Ⅰ”과 연꽃 위에 실잠자리가 앉은 “향원익청(香遠益淸)”이었다. 아직 완숙의 경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림에서 느끼는 풋풋한 맛은 일품이다.
 
미술평론가 신항섭 씨는 소희의 그림에 다음과 같은 평가를 들려준다. 
 
“섬 등대를 소재로 한 풍경과 공작새를 제재로 하는 일련의 작품은 수묵농채를 구사한다. 이렇듯이 그는 전통적인 수묵화의 법도에서 자유롭다. 한마디로 그 자신이 보고 느끼고 배운 사실을 솔직하게 표현하겠다는 의지의 소산이다. 무엇보다도 채색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시각적인 아름다움과 더불어 감정표현이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묵농채의 작품은 시각적인 인상이 한층 강렬하면서도 깊이가 있다.” 
 
그녀에게 한국화를 그리게 된 계기를 물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때 그림 그렸지만 미대를 가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딸이 그림을 그려주길 바랐다. 그래서 딸과 함께 홍익대 앞의 한 학원을 찾았는데 이때 한국화의 붓 터치가 참 좋았다. 그래서 한국화를 제대로 가르쳐줄 선생님을 찾다가 목우회 화보에 올려진 운곡 선생님의 그림에 푹 빠져버렸다.  
 
그래서 부산에서 전화로 선생님께 허락을 받았는데 서울에 계신 선생님 화실에 처음 왔을 때 본 누드 붓 크로키도 정말 맘에 들었다. 그 뒤 선생님의 가르침은 오늘의 나를 있게 만든 바탕이었다. 선생님을 통해서 한국화를 그리면서 높은 그리고 깊은 세계가 나타났고 갈수록 점점 더 깊이 매료되었다.”라고 대답한다. 
 
▲ 소희 권시숙의 작품 "자갈치 소견(所見)"     © 권시숙
 
▲ 소희 권시숙의 작품 "영도 소견(所見)"     © 권시숙

하지만, 그녀의 한국화 작업은 단지 그녀만의 선택이 아니라 남편 김종규(53) 씨의 적극적인 외조 덕이었다고 운곡 선생은 귀띔해준다. 거주지 부산을 떠나 멀리 서울까지 와 운곡 선생에게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준 배우자가 없었더라면 가능한 일이 아녔다는 얘기다. 
 
소희 그녀는 종가의 종부란다. 종부라면 집 밖의 일에 관심을 쏟을 여유가 없다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시부모가 돌아가시고 나서 자신 만의 삶을 추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남편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고 한다.  
 
“한국화로 어떤 세계를 표현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해본다. 그녀는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편안함을 느끼고 싶다. 또 내 그림을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들이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린다. 전시회 동안 주부들이 많이 찾아오고 그림을 보면서 같은 느낌이 들길 바란다.”라고 말한다. 
 
▲ 소희 권시숙의 작품 "향원익청(香遠益淸)"     © 권시숙

이때 옆에 함께 했던 그녀의 스승 운곡 선생이 그녀의 말을 거들고 나선다. 
 
“소희는 가끔 방황할 때도 있지만 부처님 앞에서 맘을 다스린 듯 그림을 그린다. 언젠가는 내게 ‘수묵도 좋지만 군청색의 담채도 참 좋아요. 저는 언제나 그걸 그려볼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 그 뒤 열심히 하더니 한풀이하듯 군청색을 쓴 채색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소희의 모습을 보면 마치 주야장천(晝夜長川) 긴긴 밤 밤새워 바느질하는 침선장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제자의 아름다움을 정말 아름답게 표현해주는 운곡 선생의 마음이 참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녀는 예전 재즈 피아노 연주회를 한 적도 있었던 사람이란다. 피아노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섭렵한 뒤 빠진 것이 한국화다. 과연 그녀는 한국화에 완전히 정착할 수가 있을 것인가? 혹독한 가르침을 마다치 않는 운곡 선생에게서 울면서 버티면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운곡 선생은 마지막까지도 제자 소희의 작품에 한마디 거든다.  
 
“소희의 그림엔 관음보살의 현신이라는 연꽃 그림이 있는데 그에는 자비사상 곧 사랑이 들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애정이 없는 그림은 차갑다. 다시 말하면 그림에선 사랑이 우러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소희는 아마 그런 그림으로 갈 것이다.” 
 
그러면서 운곡 선생은 “화가는 화폭에서 지팡이를 짚고 쓰러지면 죽음이다.”라는 말이 있다며 소희는 편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인데 한국화를 선택했다면 철두철미한 정진이 필요함을 염두에 두라고 제자에게 당부했다.
   
▲ 자신의 작품 '화(和) Ⅰ" 를 설명하는 소희 권시숙     © 김영조

소희 권시숙은 지난 12월 10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오는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그녀의 고향 부산 국제신문 문화센터 제1전시실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권시숙 그녀에게 한국화란 무엇일까? 마지막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단 한마디였다. “행복입니다.” 그냥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는 뜻이었다. 무념무상의 세계에 푹 빠져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기에 그 어려운 그림으로의 길은 그녀에게 운명인지도 모른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8/12/16 [19:08]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