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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몸을 부모와 남친이 허락해야 된다?
'상품'이 아닌 '작품'으로 누드에 자유를 주어야!
 
틈새   기사입력  2003/09/04 [14:31]

얼마 전, 사진작가 조선희의 작품집에서 나는 그 유명한(!) 성현아의 누드 사진을 보았다. 사진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연예인들의 다양한 표정과 솔직한 모습들을 잡아낸 작가의 재주에 감탄하고 있던 사이, 불현듯 나타난 그녀는 반드시 전해야할 말이 있다는 듯, 지면 위에 똑바로 서서 자신의 젖가슴에 가위를 들이대고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성적 판타지에 머릿속이 온통 사로잡힌 뭇 남성들은 혹여 그녀의 사진을 은밀히 즐기며 가학적 이미지의 환상에 사로잡혔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러나, 오히려 그녀의 그 사진이 자신의 젖가슴을 제거함으로써 단순한 성적 판타지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고자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할 말 많은 몸은 하나의 '서비스'로써 '은밀히' 제공됨으로써 하나의 '상품' 으로만 전락하고 말았다. 가슴이 아팠다.

"상민이한테는 허락 받았냐? 그럼 됐다"

▲이혜영     © 하퍼스바자
이혜영의 누드집 발간 기자회견.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혜영이 답한다.

"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상민이한테는 허락받았냐? 그럼 됐다' 하시더라구요"
기가 막힌다. 왜 이혜영이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데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며, 심지어 '허락'의 조건이 '이상민의 허락 여부'가 되어야 하는가.

게다가 이상민의 말을 왜곡해 '이상민이 "내 신부 몸매 같이 감상하자"'고 했다며 마음대로 갖다 붙인 스포츠 찌라시의 카피에 이르러서는 철저하게 남성들의 '내 여자 소유 관념'과 관음적 시선들에 꽁꽁 묶여 있는 '누드'에 대한 인식에 눈물이 나올 지경이다.

누드는 오랜 세월 동안 중요한 예술의 소재가 되어 왔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이 옷을 만들어 입은 일이라는 성경의 구절은 인간이 옷을 만들어 입음으로써 자연과 함께 하던 순수성에서 벗어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자연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지은 인간은 옷을 입고, 자신을 위장한 채, 자연을 정복하면서 타락해갔다.

'위장한 자신', '껍데기로 쌓인 자신'을 한꺼풀 벗겨내는 '벗은 몸'은 그래서 완벽한 곡선미와 육체미 따위로 재단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러나 '누드'에 대한 '기준'이 생기면서 '누드'는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고야,  < 옷 벗은 마야부인>     © 고야

'아름다운 몸'의 기준이 생기고, 재단된 '아름다운 몸' 만이 '타인에게 보여질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벗은 몸'에는 '위장의 껍질'이 덮여진다.

표현에 제한이 생긴다. '아름다움'을 위해 육체에 붙은 살과 털들이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수정되거나 심지어 삭제된다. 그렇게 다시 왜곡의 작업을 거쳐 '정제된 몸' 만이 정정당당하고 고귀한 '작품'으로서 멋진 전시장에서 공공연히 타인에게 전시되고, 교과서에까지 실릴 자격을 얻는 것이다.

이 기준에서 벗어날수록, 그것은 성적 판타지의 대상이 되고 '외설'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의미를 부여하고, 아름답게 정제한 '그림'은 주로 '존경받는 위치' 에 서게 되지만 육체를 그림보다 훨씬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진'은 그림보다 인정받기 어렵다.

여기에 더하여, '못생긴' 육체는 아예 자격을 박탈당하며, 여성의 육체 '사진'은 쉽게 상품화되고, '관음적 시선'과, 제 발 저리는 나랏님들의 '청소년 보호를 위한 경계와 구분'에 갇혀 '성인용'으로, '접근금지' 용으로, 급기야 '천한 것'으로 취급받게 되는 것이다.

누드에 대한 시선을 확장하라!

똑같은 벌거벗은 몸이 어떤 경우는 '고귀한 작품' 이 되고, 어떤 경우는 '은밀한 것' 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철저히 관음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목적만으로 여성의 몸의 일부만을 과장되게 확장하여 의도적으로 제작한 소위 '포르노' 사진이 아닌 바에야, 솔직하게 몸을 드러낸 누드 사진은 이제 보다 자유로워져야 한다.

이제 누드 사진은, '육체에 대한 상품화' 또는 '상품화할 가치가 있는 육체' 의 족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상품화의 굴레와 아름다움의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남자의 육체도, 여자의 육체도, 똥배도, 털들도, 쳐진 살들도, 주름들도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이제 누드 사진은, '관음적 시선'과 '은밀한 장소'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훌륭한 누드화가 전시회장에서 전시되고, 교과서에 실리듯, 보다 많은 이의 '벗은 몸'을 솔직하게 드러낸 좋은 누드 작품 사진도 은밀히 혼자 감상하고 돌려보는 성인용 사이트나 동영상 서비스에서 벗어나 보다 떳떳하게, '상품'이 아닌 '작품'의 위치에 서야 한다.
경계와 구분, 그리고 이로 인한 '갇혀버린 시선'은 오히려 누드 사진에 대한 불온한 상상만을 순환 재생하고 있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열심히 작업에 충실하여 결과물을 내놓은 이혜영은 기자회견장에서 "허락은 받았냐"는 골수 빠진 질문과, 되려 이상민을 걱정하는 허튼 눈빛들과, 자신의 사진에 대한 수많은 관음적 시선들을 제치고 이렇게 말했다.
"남자들보다 여자 분들이 더 많이 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나는 결국 이혜영의 누드 사진집 또한 '상품'으로 제작되고, 오로지 그것으로만 취급받을 것이 못내 안타깝다.

이 기회에, 지금 쏟아져 나오는 연예인들의 누드 사진들이 '잘 빠진 몸매'와 상품화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가장하지 않은 본래의 몸'으로써 보다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소개되고, 보여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문화연대에서 발행한 주간문화정책뉴스레터 '문화사회' http://culture.jinbo.net/ 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 필자는 문화사회 편집위원 틈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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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9/04 [14:3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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