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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무엇에 기댈 것인가?
정치과학의 기대치를 찾아서
 
박선협   기사입력  2003/08/21 [09:46]

정치인은 정치생명을 영위하기 위해서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화무상한 정치판국에 적응해 나가지 않을 수 없다. 보다 튀는 정치생활을 바란다면, 행운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처럼 생각된다. 정치 그것이 우연이나 운, 불운 등에 좌우되는 것으로 여겨져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혼란국면의 연속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혹은 어의없이 따분하고 답답한 복잡성의 진흙구덩에다 시지부지한 판도라의 상자인양 생각되기도 한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이전투구泥田鬪狗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만일, 그대가 그런 흙탕물에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확신할 수가 있다면 그대는 매우 행운아라고 할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결정적인 정치 진흙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비참한 정쟁이나 혁명을 되풀이 해왔다. 절망에서 탄생한 무시무시한 혁명이 몇 갠가의 왕조와 정권을 붕괴시켜 왔다.

정치가 그 때마다 폭이 좁아져 정치를 유지하는 것이 점점 곤란해지게 되면 정치인들은 부지부식간에 불안에 빠진다. 그리하여 이윽고는 긴장의 실타래가 뚝 그치고 만다. 그렇게 되면 폭력에 호소하는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나 혁명은 도대체 무엇을 우리들에게 안겨 줄 것인가.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혁명이란 '낡은 독재자'를 끄집어내린 자리에 그 몇 배나 되는 힘을 가진 '새로운 독재자'를 밀어 올리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정치를 근본적으로 개혁시킨다던가, 사회의 체제를 바꿔 놓은 곳에서 평화스런 나날을 기대한다는 것은 도저히 바랄 수 없게 된다. 권력의 칼자루를 쥔자만이 이득을 보는 것이다.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흔들림 없는 안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국민이 안정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치인은 무엇인가의 형태로 사회에 공헌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의 질량을 얻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대신 그들이 손에 쥔 것은 혼돈에 빠진 세계다.

그렇다면, 이러한 혼란상태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어떤 정치인은 가정家庭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정치인은 경제적 자본의 성질에서 오는 것이라 말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정치가 나쁘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자신에 원인이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정치인이나 일반인도 있다.

진정한 원인은, 이들 어느 것도 아니다. 불안으로부터 오는 것과 같은 혼란상태는 정치에 관한 정보나 인간에 관한 정보가 무질서하게 헷갈리는 곳에 있다. 정계政界라는 광대한 바다를 항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나침반도, 해도海圖도 없다면 누구든 얼떨떨 흔들리고 만다. 허다한 정보가 정치생활 한 가운데서 소용돌이치는 이 정치사회에서는 정치인의 그 본령本領을 보다 깊이 이해하는 것이 그래서 필요하게 된다.

정치생명을 효과적으로 지탱해 나감에 있어 반드시 유리한 정사政事나 평화라는 안전판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에 대한 이해가 보잘 것이 없게되면 정치를 구성하고 있는 이러한 요소를 이해할 수는 없게 된다. 만일, 정치가 혼란상태의 연속이고, 억측과 정치동향에 따라 어떻게든 변혁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치란 혼돈의 조종술操縱術인 것으로 비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현실문제로서 정치가 차지하는 비율은 다른 어떤 비율보다도 큰 것이다. '인생의 3분지 1은 잠을 자는 것이기 때문에 수면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인생의 3분지 1이상의 시간을 정치에 지불하고 있다. 거기에 정치가 없다면 침대마저 살 수가 없다.

그렇게 본다면 역시 수면보다 정치 쪽이 훨씬 중요한 것이 아닐까. 연애나 스포츠, 엔터테인맨트 등,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외에도 다양하게 널려 있으나 에너지의 대부분을 주입하고 있는 것은 누가 뭐라던 우선 정치라는 것에 점수를 주게 될 것이다.

정치는 바라거나 바라지 않거나, 우리들이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가 싫다는 것은 인생이 싫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정치심리학'에서는 조금이라도 국민정신에 이상이 보이게 되면, 과거의 연애체험이나 유아체험을 조사해 보았다. 그러나 보다 현대적이며 훌륭한 방법이 있음이 드러났다. 그것은, 그 국민의 안정도와 정치적 감각상태를 조사하는 일이었다. 한 나라의 평화의 '밸런스'가 붕괴되자 광기狂氣가 싹텄다.

만일 우리가 국가적인 광기를 진단하고 이것을 극복하려 한다면 훌륭한 정신병원을 짓는 것보다, 국민의 정치감각을 둘러싼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선결이다.

인생을 구성하는 것의 70%는 직업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남은 30% 중 10%가 가정, 10%가 정치, 그리고 최후의 10%가 레져다. 결국 정치, 경제적인 활동(수입을 얻기 위한 노동)이 인생의 80%를 차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보아, 사람은 직업을 잃게 되면, 정신적으로 쾌적한 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 그 증거가 되는 사실은 어디서나 볼 수가 있다.

*  안정된 상태가 보증될까 어떨까라는 걱정
*  가치있는 정치적 위상이 보장될까 말까라는 걱정
*  다른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라는 걱정

이 세 가지가 정치적 인생의 불안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정치 포지션이 없는 사람이나 목적이 없는 사람은 무엇인가에 맞닥뜨리게 되면 노이로제에 걸린다던가 광기에 빠지게 된다.

본래 정치현장은 결코 따분한 세계가 아니다. 할만한 가치가 있는 애국전선愛國前線 그것이다. 국민의 인정認定이 활동의 가치를 증명해 주게 된다. 충분할까 어떨까와는 별도로 인정에 의하여 정치생활에 필요한 가치를 향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정치안정이 보장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안정상태의 보장은 상호'이해理解 Understood'를 전제로 탄생된다. 반대로 불안정한 상태는 서로를 알 수 없다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사람이 정치에 대해 불안정하다고 느끼는 것은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안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인식에서 온다.

정치를 그런대로 이해하고 있는 정치인은 늘 안정감을 가지고 있다. 그에 대하여 알아야 할 것을 알지 못하는 정치인은 '운運'에 기댈 수밖에 없다.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어떨까를 알 수 없게 된다면 정치인은 불안에 떨게 된다. 거기에서 걱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불안정한 상태에 대해서도 이를 수 있는 말인 것이다.

'불안정'이란 지식이 결여된 곳에 존재한다. 반대로 안정은 지식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무슨 정쟁이 일어나더라도 걱정없다고 생각하고 언제나 지킬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안정이다. 확실한 정치지식을 결여한 안정은 '위선'이라고 칭한다.

'운運'이란 '가능성'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운에 기대한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에 기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치행보 그것이 확실한 지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지 않는데, 어떻게 정치편력에 관한 지식의 황금률을 손에 넣을 수가 있을 것인가. 정치활동 그 자체가 혼란상태에 빠져 있는데 정치인생의 일부인 정치게임이 어찌 혼란에 구겨들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살아 남는 것이 미지의 분야라 한다면 정치도 미지의 분야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정치가 미지의 분야에 놓이게 되면, 사람들은 비판적으로 변한다던가, 절망한다던가 깊은 의심에 젖어들게 마련이다.

정치를 휘어잡고, 유지하고, 그 위에 향상을 바라고 나아가 완전한 안정을 희망하기로 든다면, 정치인생의 '룰'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정치현실을 꽤 많이 알고 있다'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완전한 안정에 이어지지 않는다. 결국 정치라는 것을 아무리 잘 알고 있다하더라도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전술한바와 같은 불안정한 요소가 끼어 드는 것이다.

정치의 기본이 되는 '룰'을 아는 것이 정치활동에 안정을 가져오는 비결이다. 정치의 뿌리에 숨쉬는 룰을 몸에 지니는 것이 정치생명에도 안정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 글은 '정치에 관한 과학'이다. 이 글은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동서고금 처음으로 시도되는 칼럼이다. 이전에도 이것에 비견되는 시도가 세계 각지에서 나타난 적이 있으나, 어느 것도 실패하고 말았다. 어떤 시도도 정치적 안정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자신있고 가능하다고 자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도도 인간의 정치행각을 보다 훌륭한 것으로 바꾸어 주지 못하고, 인간의 정치적 지성을 높이는 것마저 달성하지 못했다. 이 칼럼은 전혀 새로운 정치과학이다.

이 글은 다른 이론처럼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라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10년간이나 괴로운 정치수행을 적립할 것 등을 요구한다던가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인간의 혼란을 아는 것이 목적인 것인데 인간이 아닌 여우를 사용하는 실험을 행한다던가, 여우에 관한 광대한 연구자료를 요구한다던가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글은 확실하게 인간의 정치행동패턴을 바꾸고, 개혁할 수 있는 과학이다. 또한 자기자신을 완전하게 컨트롤하기 위한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만남에 의해 인간의 지능은 향상된다. 이 글이 인간의 재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킨다는 사실은 엄밀한 임상테스트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다.

나아가, 이 칼럼과의 만남을 통해 정치적 인간의 정사政事에 관한 반응시간을 빠르게 하고, 태도를 청춘 정치인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다. 이러한 훌륭한 효과는 더욱 많이 있으나 그것들을 전부 줄 새운다면 그것만으로 여러 권의 책이 되고 말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글이 정치인생의 기본적인 '룰'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어, 구차스런 혼란의 와중에서 신'질서'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정치의 과학'이란 무엇인가? 정치의 과학이란 정치인생에 보기 좋은 질서를 가져다주는 과학에 다름 아니라고 정의定義할 수 있다. 우연의 사건이나 행운이란 정치인생의 밑바닥에 있는 원리를 이해하면 모두 컨트롤할 수가 있게 된다.

지금까지 설명해 온 것에서 알 수 있는바와 같이, 무엇인가 비아냥 거리는 눈으로 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정치에 뛰어들어 어느 정도의 정치력을 유지하여 나가는데는 헤아릴 수 없는 우연의 사건들과 부딪치게 된다는 것은 용이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이러한 우연의 사건은 너무 막연하기 때문에 컨트롤 할 수가 없는 것으로 생각이 들어 전혀 손쓸 수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정치에 관한 가변성과 우연성을 줄이는 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바라던 대로의 정치적 친구나 네트웤을 널리 사귀고 보급할 수가 있다던가, 자기의 주변과 관련된 프로파간다를 생각하는 방향대로 응용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의 정치적 흥미나 지성 등도 포함하여 본래 갖추고 있는 본인의 정치적 능력을 백 %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정치인생처럼 아름다운 것이 세상에 다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가? 자! 그렇다면, 정치과학이 어떻게 정치의 우연성을 줄여 나가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정치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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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8/21 [09:4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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