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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률 수렁에 빠진 <왕과나>, 캐릭터가 없다
[방송비평] 지나친 도식적 설정, 궁중암투 중심의 '여인천하' 닮아가나
 
하재근   기사입력  2007/10/12 [00:54]

<왕과나>의 전략이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3능3무 소리는 이제 듣기도 싫다. 툭하면 운명 운명 운명에 자귀노파와 처선 양모는 누가 어떤 자식을 낳게 될 지도 다 안다. 모든 건 미리 정해져있다. 그리고 알 사람은 다 안다. 이런 설정이야 흔한 것이긴 하지만 <왕과나>에선 너무 반복적으로 나온다. 아무리 우리나라 정통사극의 한 갈래가 궁중암투 중심의 주말극 짝퉁 스타일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한다.
 
내가 여성을 비하하는 건 아니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점치고 빌고 하는 것은 예로부터 여성 특히 주부들의 영역이었다. 사랑채가 아닌 안채의 영역이었던 거다.(이것이 옳다는 건 절대로 아니다. 객관적으로 그랬다. 지금도 어쨌든 무속과 기복신앙은 주부들이 많이 주도한다.) 드라마 시청률도 주부들이 주도한다.
 
<왕과나>의 지나친 무속적 설정이 답답한 건 모처럼 힘 있게 시작했던 사극이 안채 안에서 벌어지는 주부들의 한담꺼리로 작아지는 것 같아서다. 그래도 크게 나쁠 건 없다. 그런 드라마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왕과나>의 호기롭던 도입부를 상기하면 아깝다. 이 드라마는 다른 식으로 풀 수도 있었다.
 
<왕과나> 1편에서 조치겸의 캐릭터는 강력했다. 그에겐 의지가 있었다. 김처선의 생부도 그랬다. 그 둘이 부딪히는 힘이 화면 밖까지 뿜어져 나왔다. 조치겸이 갑자기 충신이 될 양자타령을 하고 3능3무 타령을 하면서 맥이 빠지고 있다. 의지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매운 건 안채의 치정과 무속이다.
 
정작 김처선이 힘이 없다. 힘이 없으면 애잔함이라도 있는가? 그것도 없다. 설정만으로 보면 처선의 사랑은 가슴이 다 타버리는 비극적인 사랑이지만 처선이 윤씨를 업고 가는 클라이막스에서 조차 별다른 울림이 없다.
 
▲사극 <왕과나>가 강한 캐릭터없이 궁중암투극으로 변질되고 있다.     © SBS
 
성종은 무신경 한량이다. 이 여자가 안 되면 다른 여자 찾으면 그만이다. 여자가 자길 안 받아주니까 '찡찡'대기만 한다. 윤씨 처자는 또 무슨 심사로 성종을 밀쳐내는지 도무지 감정선이 공감이 안 된다. 물론 대쪽 같은 성품에 툭하면 놀아난다는 성종 얘기 듣고 이건 아니다 싶고, 또 자신이 마치 왕의 씨를 받기 위한 대상물처럼 취급되는 것에 모멸감도 느껴지고 등등의 속내를 유추할 수 있지만 드라마는 퍼즐이 아니지 않은가. 감정이 안 움직인다.
 
내시들은 또 왜 그리 치졸한가. 아무리 처선이 견제를 받는다고 해도 그렇지. 현직 내시부수장의 양자를 능멸하는 내시들의 태도는 도무지 설득력이 없다. 지금까지 동료들조차 무시하는 왕재수 캐릭터로 그려졌던 정한수를 위해 동료들이 갑자기 내시부 수장의 양자에게 보복한다는 설정도 황당하고. 그 일차원적인 표정은 또 무엇이며 개똥은 왜 나오나.
 
전형을 넘어 도식의 극치다. 도식적인 표정 도식적인 고난. 지난 번 판의금부사 댁 자제의 악역 캐릭터가 워낙 도식적이라 앞으로 이런 도식성은 자제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피력했었는데 거침없이 한 길로 달리고 있다.
 
윤씨 처자 목욕씬 나올 때까지만 해도 봐주려고 했다. 김재형식 사극에 의례히 나오는 여자 목욕씬이 짜증나지만 어차피 한번은 참고 봐줘야 할 입장료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이번에 성종과 윤씨가 합궁에 이르기까지의 절차를 나열하는 장면은 너무했다.
 
이걸 좋게 보면 우리 전통문화를 미시적으로 복원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데, 영화 <스캔들>에서완 달리 <왕과나>의 그것에선 우리 문화에 대한 존중감보다 순전히 그것을 최대한 자극적으로 우려내서 시청률 극대화에 이용해 먹겠다는 식의 상업적인 정념밖에 안 느껴졌다. ‘내가 이 정도까지 해주는데 니들이 안 보고 배겨?’ 이렇게 나오면 까칠한 시청자는 기분이 나빠진다.

▲인물들의 강한 개성없이 평범하고 진부한 내용으로 전락하고 있는 <왕과나>의 한 장면     © SBS
 
이게 뭔가 이게. 저 성종의 해맑은 표정은 또 뭔가. 저 표정이 가장 강하나 제 여자 얼굴도 못 볼 만큼 가장 약했던 남자가 평생 동안 연모했던,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에 상처를 준 비극적인 정인을 드디어 만나는 표정인가? 알고 보니 성종은 아메바였나? 이러고 윤씨 만나러 갔다가 퇴짜 맞고 또 다른 여자 찾는다. 이게 뭐냐고요.
 
이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등장인물들의 정념이 하도 작고 작아 심지어는 1회 때 보인 조치겸의 무한한 권력욕이 가장 위대한 정념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런 드라마가 없으란 법은 없는데 잘 시작했다가 왜 이렇게 삼천포로 빠지나.
이산에서 정후겸이 뭐라더라, 할 일은 했으나 신하로서의 도리는 잃지 않았다, 뭐 이런 식의 대사를 한다. 그건 최악의 악인은 아니란 뜻이다. 적을 물리치기 위해 나랏일을 말아먹진 않겠다, 이런 얘긴데, 등장인물들이 이 정도 해줘야 작품의 품격이 살아난다.
 
<왕과나>는 조치겸의 권력욕이 가장 위대해보일 정도니 말 다했다. 나머진 운명의 끈에 몸을 맡긴 가련한 아메바들인가? 아메바들의 희로애락이 사람의 깊은 감정을 울릴 리가 없지 않은가. 그저 말초신경만 자극할 뿐이다. 좀 있으면 ‘메야’하면서 지지고 볶기 시작하지나 않을런지. <왕과나>가 수렁에 빠졌다. 1회 때 봤던 그 드라마가 아니다.
 
나의 <왕과나>를 돌려줘~ 
* 필자는 문화평론가이며 <학벌없는사회> 사무처장을 역임했습니다. 블로그는 http://ooljiana.tistory.com, 저서에 [서울대학교 학생선발지침 - 자유화 파탄, 대학 평준화로 뒤집기]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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