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위’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싸움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쯤에서 이제 ‘아래’를 보는 시선도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그렇다고 해서 ‘위’를 바라보는 것을 필자는 죄악시하지는 않는다. 필자도 필요에 의해서 ‘위’를 보는 재미에 나름대로 동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근본적인 질문은 이런 것이다. “지금 도대체 누가 이명박을 지지하고 있는가?” 필자는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자주 취해왔기 때문에, 이 질문에 관해서도 필자의 시선은 과거로 향할 수밖에 없다. ‘현재’를 가능하게 만든 ‘과거’를 한번 뒤적여보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필자는 <대자보>에 기고하는 형식으로 ‘과거’를 박물관 속에서 꺼내오는 일을 자주 시도해본 적이 있다. 87년에는 의미심장한 두 가지의 기념비적 역사가 있었다. 6.10 민주항쟁이 그 하나라면,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또 하나의 기념비적 역사에 해당할 것이다. 이 두 가지 기념비적 역사의 교차로에 노태우의 6.29선언이 가로놓여져 있다. 필자가 이 두 가지 기념비적 역사를 계급 대립적 관점에서 독해한다는 사실은, 필자의 글을 자주 접해본 독자라면 이제는 꽤 익숙한 일로 되었을 줄로 안다. 그렇다. 필자는 87년을 단 한번도 ‘미완의 혁명’이라고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이 땅의 소(小)부르주아 계급은 노태우의 6.29선언에 환호했으며, 그 직후에 벌어진 노동자 대투쟁에는 동참하지 않았다. 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동참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따라서 87년 시민혁명은 이 땅의 소(小)부르주아 계급의 입장에서는 이미 그 자체로 ‘완결적인’ 것이었다. 더불어 이 땅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있어서 87년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호사가는 이 땅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있어서야 말로 87년이 ‘미완의 혁명’이 아니겠는가 하는 식의 ‘함세웅’류의 수사를 동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정면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땅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관한 한, 87년이 삶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주지 못했다면, 그것이 미완이든 아니든 간에 ‘혁명’이란 수사를 가져다 붙이기에는 곤란하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수사학을 구사하는 주체를 잘 관찰해 보기를 바란다. ‘미완’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야말로 김대중과 노무현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정치적 트릭이 아니겠는가? 노태우의 6.29선언에 환호했던 ‘중간 계급’들의 수사학이 이른바 ‘미완의 혁명’이란 것이었다. ‘미완의 혁명’이란 간단한 수사학 속에서 우리는 계급 연합적 태도를 유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낼 수가 있다. 함세웅은 그 얼마나 지독한 중세의 수사학자였던가?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나라당과 맞서 싸운다는 명분으로 제출된 ‘미완의 혁명’이란 수사는 노동자, 농민, 빈민을 포함한 서민들의 권력을 신흥 부르주아 계급으로의 상승을 욕망하는 명망가 소(小)부르주아지들에게 안겨다 주었다. 소(小)부르주아지 애벌레들은 대(大)부르주아지 나비로의 상승을 끊임없이 욕망해왔다. ‘미완’은 이 땅의 모든 소(小)부르주아지들이 대(大)부르주아지로 상승할 때에만 그 ‘완성’이 가능한 일로 될 것이다. 자! 여기가 바로 로두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보라! 로두스 섬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는 자기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높이 뛸 수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이 높이뛰기의 욕망이 잉태한 괴물이 바로 노무현과 이명박이다. 노태우의 6.29선언에 대한 환호가 지금은 이명박에 대한 환호와 지지로 연결되고 있다. 이른바 지역적으로 소외받지 않는 수도권의 ‘중간 계급’이 아직까지도 이명박의 버팀목 구실을 하고 있다. 그들이 자기 욕망을 이명박에게 투사하는 것도 이 정도쯤 되면, 이미 지나친 몰입이라는 평가를 들을 만하다. 그대들이 고독한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고 외치는 것은 그대들의 익숙한 습관이다. 20년이나 묵은 습관이라면 ‘익숙하다’는 평가가 ‘적절하지 않다’고 함부로 필자를 타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의 외로움이 지나치게 지루하고 권태롭지 않았던가 하는 질문을 필자는 던지고 싶다. 이명박이 위태위태하다. 이명박이 추락한 직후에, 어쩌면 그대들은 운명적으로 그대 ‘로빈슨 크루소’들이 벗할 ‘프라이데이’를 찾아나서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명박은 ‘미완의 혁명’이라는 수사학이 만들어낸 마지막 괴물이다. 87년 체제의 종착역에서 그대들은 이명박이라는 신화를 가공해낸 것이다. 이명박이 사라지고 나면, 87년 노태우의 6.29선언에 환호했던 그대들의 유흥도 끝이 날 것이다. 87년 체제는 지난 20년 동안 ‘이미 완결된’ 채로 그 감가상각이 진행되어 온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중간 계급’은 더 이상 민주노동당의 표를 ‘리스’하지 못할 것이다. 필연적으로, 민주노동당과 한나라당은 그대들을 향한 ‘적대적 인수합병’을 선언하게 될 것이다. 한나라당을 향해 높이뛰기를 하는 그대들의 관성적인 상승 욕망이 과연 제대로 충족될 수 있을지를 필자는 확신할 수가 없다. 다만 필자는 민주노동당을 향한 ‘하방’(下放)의 길도 열려 있음을 상기시켜 두고 싶을 뿐이다. 민주노동당이 그대들에게 보장해줄 수 있는 것은, 다만 ‘프라이데이’라는 사람의 살가운 냄새 밖에는 없을 듯하다. 자! 이것이 문제의 조건이다. 여기가 로두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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