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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의 침묵이 말해주는 것
[정문순 칼럼] 사법부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책임 묻는 버릇 버려야
 
정문순   기사입력  2007/07/09 [16:37]
성폭력 피해자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건 피해 사실 자체에만 있지 않다. 자신의 피해를 대수롭게 않게 치부하거나 피해자를 되레 탓하거나 비난하는 세상은 피해자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겨준다. 피해자가 세상의 무관심이나 비난을 감당하는 동안 가해자는 세상의 옹호와 두둔 속에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살아갈 수 있다.

가해자가 별 탈 없이 살 수 있는 대가는 오로지 피해자가 치러야 할 몫이다.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밀양 성폭력 사건의 피해 여학생은,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불쑥 나타나 합의를 종용하는 가해자의 부모들에게 충격을 받아 가출해버린 상태라고 한다. 피해자가 대신 짊어진 고통 덕분에 가해자들은 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정상적으로 살고 있었다. 피해자가 고통을 덤으로 받길 원치 않는다면 입 다물고 혼자 속앓이 하는 게 낫다고 세상은 가르치고 있는 꼴이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무관심이나 비난은, 피해자도 책임이 있거나 오히려 성범죄를 유발한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상대의 의사를 배려하고 살피는 것을 남자답지 못함으로 치부하고, 거침없고 공격적인 태도를 남자로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하는 사회라면 성폭력 가해자의 심리에 가까울지언정 성범죄의 위기에서 자신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보이는 여성을 이해할 만한 능력은 없다.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남성의 사고와 태도가 야기하는 성폭력은 그저 과격하거나 정도를 벗어난 성적 행위의 범주로 치부되는 것이 허다하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상정하는 개인은 주체성과 자율성이 충만한 존재다. 위기 상황에서도 개인의 통합된 자아는 분열하지 않으며 이성적 능력과 스스로에 대한 지배권을 발휘한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이는 특정한 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감당할 일이 없는 남성의 처지를 그대로 반영한 것일 뿐이다. 이와 달리 자아존중감의 위기를 일상적으로 겪는 여성은 통합적이고 완전한 자아를 가진 개인이란 존재할 수 없거나 자신과 거리가 먼 것임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성차를 따질 것 없이 인간이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하지 못할 만큼 나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존재임은, 강도를 만난 남성 피해자가 범죄자에게 별반 저항하지 못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이 경우에 법은 자신을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는 피해자 편이다. 피해자가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강도가 꼭 흉기나 물리력으로 자신을 위협하거나 공격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신변의 안전이 보장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데서 오는 무력감과 공포가 피해자를 얼어붙게 한다는 것을 법은 안다.

그러나 똑같이 인간적 존엄성을 침해받는 경우인, 아니 인권 침해 정도가 더 할 수 있는 성범죄의 경우 사회는 판단을 달리한다. 가해자가 흉기를 들었거나 피해자가 방어하지 못할 정도의 폭력을 행사했다는 물증이 없는 한, 성적 자율권을 침해당한 여성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감당해야 한다. 위기 상황에서 자신을 추스르지 못한 것은 본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이 침해당할 위기에 있다는 환경 자체가 피해 여성에게 극도의 절망과 공포를 야기한다는 것은 이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성인 남성이 강도 피해자가 될 수는 없어도 성범죄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드물며, 성범죄 가해자가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이 작용한, 고약한 이중 잣대이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하겠다는 식의, 성폭력 피해자에게 피해의 책임을 묻는 버릇은 한국 사법부가 성범죄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이는 성범죄 사건을 다루는 일간지 기사에서 공기처럼 일상적으로 대하는 부분이다. 최근 서울고법은, 함께 술을 마신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사건 당시 피고인이 힘을 행사한 정도에 대한 피해자의 진술이 모호하고 그 진술조차 원심 법정에서 번복된 점" 등을 종합하여 "피고인이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로 폭행 또는 협박을 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무죄판결을 선고했다. 
 
음주 상태의 여성에게 진술의 일관성을 요구하고 가해자에 대한 항거의 정도를 따지는 것이 성범죄를 대하는 한국 사법부의 수준이다. "항거가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처지는 술을 먹지 않은 상태의 피해자로서도 충족하기 힘든 조건이다. 성폭력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항거가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할 정도의 폭행이나 협박을 받아야 한다면, 피해자한테 자기 신변의 안전조차 챙기지 말라는 것과 같다. 어이없게도, 성폭력 피해자로 인정받고 싶다면 목숨을 걸라는 것이다.

성폭력의 위협 앞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거뜬히 감당할 정도의 확고부동한 이성적 능력을 잃지 않는 존재가 과연 있을 수 있을까. 가해자로부터 별반 폭력이나 협박을 당하지 하더라도 성폭력 위협이라는 환경 자체가 여성으로선 자포자기로 이끌 만큼 위협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임을 체험할 일 없는 남성 사법부는, 여성이 자신의 목숨이 위급한 경우라도 성폭력은 능히 거부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출신의 한 여성 철학자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 여성의 처지가 이해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성폭력 피해자가 되면서 절감했다. 아침 산책길 도중에 성폭력을 당한 그녀는 경찰 조사에서 자신의 피해를 합리적으로(남성이 납득할 수 있게끔) 진술하는 것의 어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왜 있었는지, 가해자의 사정권에 들어서는 것을 왜 피하지 못했는지 남자 경찰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자신이 운동선수라서 아침 조깅이 꼭 필요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다. 피해를 치유하는 고통의 시간을 겪으며 그녀는 자신이 그동안 배웠던 학문이 성폭력 피해자조차 제대로 변호할 수 없는, 남성의 언어로 쌓아올린 구축물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의심한다. 성폭력이라는 극단적인 인격 모멸을 통해 자신의 존엄성이 갈가리 해체되는 고통과 싸워야 했던 그녀는, 인간이 심오하고 통합적인 이성적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배웠던 철학이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학문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성폭력을 통한 인격적 모멸을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는 남성을 대변하는 체제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나약하고 무력하며 낮은 이성적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성폭력 피해자가 당당하게 진술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 자신의 피해를 설명할 때조차 남성 중심의 사고 체계에 기대어야 하는 현실은 많은 피해자를 끝내 침묵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판단하게 만든다. 어렵사리 말문을 연 피해자의 고통을 눈덩이처럼 부풀리게 하고 가해자를 활개 치게 만듦으로써 성폭력의 교사자나 다름없는 역할을 하는 사회에서 피해자들이 기댈 것이 있겠는가.
 
성범죄 신고율 한자릿수라는 통계는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인간적 존엄성의 침해를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는 외침이자, 두 번 죽지 않겠다는 피해자들의 아우성으로 숙연히 받아들여져야 한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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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7/07/09 [16:3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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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망초5 2007/09/17 [00:05] 수정 | 삭제
  • 님들의 블로그에 슬픈 댓글을 달고 다녀 죄송한마음입니다
    에미의심정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짐승의 손에 어여쁜딸을 잃은 에미입니다
    대한송유관공사 인사과장의 직장내성희롱 살인사건을
    사건발생지도 아니고 피의자의 주소지도 아닌 원주경찰서에서
    사건발생지인 양평경찰서로 이첩시키지 않고 초동수사부터
    사건의진실을 왜곡하고 은폐조작한 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아고라 네티즌청원에도 서명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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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심갖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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