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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과혁명과 과소체계의 모순 - 홍윤기의 중도?
[비나리의 초록공명] ‘강한 중도’와 민족주의적 국가주의 경계의 지점
 
우석훈   기사입력  2007/02/26 [10:06]
요즘 철학책과 문학평론을 안 본지 하도 오래 되었더니 송구스러운 얘기지만, 난 홍윤기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기억을 막 더듬어 봤는데,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유럽에 있던 시절 <한겨레>에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유럽통신원이라는 타이틀을 단 사람의 글을 읽은 것 같기도 하고... 그 정도가 내 기억에서 전부이다.

상당히 송구스럽다. 이건 순전히 내 무식의 소치이다.

하여간 요즘 말이 많은 <황해문화>에 실린 "그 후 20년의 사상인식 - 초과혁명과 과소체계의 모순"이라는 글을 드디어 오늘 보았다. 아주 꼼꼼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평소에 죽 읽어내려가는 내 독서습관 치고는 조금 세밀하게 읽은 편이다.

멋진 단어들이 몇 개 나온다. '정초'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 정초라는 말을 우리나라 글에서 읽은 것은 부끄럽게도 처음이다. 이 정초라는 말 가지고 예전에 시도 몇 개를 썼었고, 순전히 이 단어 하나만 가지고 책도 한 권 쓰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 정말 10년 전의 일일 것 같다. 10년 전에 나는 피겨 스케이트를 아주 좋아했었는데, 이 피겨와 마루운동 그리고 도마라는 얘기를 가지고 책을 쓰려고 했던 시절의 기억이 소록소록 나면서...

chronography라는, chonometric가 댓구를 이루는 이 개념은 아직도 나에게는 너무 멋진 개념이다.

홍윤기의 글에서는 내가 알고 있던 정초라는 단어와 약간은 용법이 다른 것 같지만, 어쨌든 87년을 '정초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제목에 나온 초과혁명과 과소체계라는 단어는 홍윤기의 글 내에서는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는 않은데, '과잉성'이라는 단어들과 댓구를 이루면서 등장한다.

초과와 과소라는 단어... 원래 어원은 정신분석학의 용어이다. sur-determination 혹은 불어로는 etayage라고 부르는 것들, 이것을 알뛰세가 중층결정이라는 단어로 가지고 오면서 한동안 유행했던 용어이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소록소록 새롭다.

최근에 철학책을 내가 많이 봤더라면 아주 재밌게 읽었을 글들인데, 사실 바슐라르의 "Tais-toi, Althusser!", 알뛰세, 그만 입닥쳐를 거의 마지막으로 철학책은 안 봐서 이런 개념들에 익숙치 못한 것은 순전히 나의 무식의 소치일 것 같다.

대체적으로 내 식으로 풀어보자면, 87년 이전의 국가주의를 비롯한 많은 주의들이 '과잉'인 상태였는데, 87년은 이것들을 모두 무위로 돌리는 일종의 초과혁명인 셈인데, 이렇게 해서 20년이 지난 지금 '과소체계'라는 것이 생겨났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이 과소체계를 역시 경제학에서 가끔 사용하는 용어대로 번역해보면, "국민경제의 기반"이 약해진 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너무 펀더멘탈이라는 말을 YS 시절에 거시경제학 하던 사람들이 남발해서 요즘은 그 의미가 약간 달라지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fundamental of fundamental이라는 말까지 포함해서 해석해보면, 하여간 국민경제가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약간 철학적인 표현이지만, 홍윤기의 말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바꾼다면, 국민경제의 기반을 "통합"이라는 것을 통해서 강화시켜서 세계화 국면에서 어쨌든 나라는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 그리고 이런 기반에서라야 비로소 평화국가와 사회국가를 이룰 수 있고, 이게 바로 부민덕국이라는 것이다... 아냐? 뭐, 이런 말 같다.

귀찮지만, 결론에 해당하는 긴 문장들을 쳐보자.

"지구시장에서의 경쟁능력과 평화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 국가 내에서의 통합능력이 극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런 현실 비전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진보적 민주주의에 의해 확장된 인간 자유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보수적 성장주의에 의해 그 잠재력이 확인된 대한민국 국가능력에 대한 무한한 확신을 합쳐 평화국가와 사회국가로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부덕민국의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철학자로서의 홍윤기의 철학적 결론은 이런 것 같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 하나는 아마 이런 철학적 테제에 대한 정치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좌파의 급진적 진정성이나 우파의 경직된 정체성이 아니라 문제에 대해 통합적 해결력을 보이는 강한 중도이다."

(무슨 말인지 알기는 하겠는데, 이 마지막 문장을 딱 보는 순간 나는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 "진정성"이라니...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철학자도 있었나?)

글을 읽고 나서 사실 꽤 생각을 해봤다.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서 난리치는 것처럼 그런 '강한 중도'에 대한 선언이라고 그냥 단순한 정치선언문으로 보기는 어려운 복합적인 글이다. 솔직히 그냥 우겨대는 일부 좌파들의 편가르기와 막무가내식 주장보다는 훨씬 나은 글이다.

조근조근 따져보자면, 결국 "돈 있어야 행복하다는 얘기 아니냐"라고 원론적인 반론을 할 수도 있고, 국가 경쟁력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그런 통합능력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와 직접 민주주의와 다양성 같은 얘기들을 할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좀 심하게 수많은 배신자 중의 하나 아니냐라고 말해버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싹 뭉개버릴 글은 아니다.

중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쓴 글 중에서 자신이 왜 중도를 선택했는지 이렇게 솔직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글은 잘 못봤다. 대체적으로 우리나라 중도들이 요즘 하는 얘기는 한나라당은 싫고, 좌파는 국민들이 싫어할 것이고... 대충 이런 분위기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소신은 그런 마케팅 같은 얘기는 아니라서,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설득력은 있어도 철학적 깊이는 전혀 없는 사람으로 나는 대충 무시하는 편이다.

그러나 홍윤기의 글은 조금 고민스럽게 한다. 이건 단순하게 '대안이 있느냐, 없지 않느냐, 있다면 대안을 내놓아라"하는 무지막지한 얘기들과는 묘절하게 궤적을 달리한다.

내 식으로 해석해보면, 1국 개혁체계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세계화라는 흐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 시스템에서 국민국가가 버티기 위해서는 방법이야 어떻든 통합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게 바로 경쟁력이고, 이 기반 위에서야 비로소 평화니 나발이니 하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국가와 국가, 민족과 민족을 화목하게 만드는 평화능력이야말로 대한민국 경쟁력 제1호 브랜드가 되어야 한다."

하여간 세계적으로는 무조건 중재를 서는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가능하려면 국가 내에서의 화합이 최우선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싸우지 않으려면 중간에 선 사람들, 즉 중도가 양쪽을 확 누를만큼 강해져야 한다, 그래서 "강한 중도"다... 내 말 틀려?

이런 말인 것 같다.

좀 무식하게 해석하면 "뭉치면 산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무식한 말은 아니고, 스위스가 영세중립국을 내세우던 당시에 스위스 극우파들이 내세웠던 말들과 상당히 비슷하다.

몇 가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주르르 흐리기는 하는데... 진보에서 통합으로 넘어오는 순간에 이 담론이 중도나 중간지점 혹은 합리적 보수 같은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극우파 담론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사실 이 글을 읽기 전에는 나도 생각해보지 못한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홍윤기가 극우파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닌데, 이 마지막의 결론은 단순히 "부민덕국"이라는 말이 나와서가 아니라 평화와 통합을 연결시키는 그 과정의 논리가 그렇다.

원래 이게 전형적인 극우파 논리이기는 하다. 잘 단결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국가를 만들고 이를 통해서 세계 평화에 기여하자... 어디서 정말 많이 본 글귀 같지 않나?

헤겔 법철학이 위험한 국가주의와 살짝 경계를 타는 것처럼 홍윤기의 '강한 중도'도 내가 보기에는 민족주의적 국가주의라는 극우파 논리와 위험한 선을 타게 된다. 그런데 홍윤기의 시대 인식에 대한 출발점은 그런게 아니지 않았는가?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점프를 하면서 이 위험한 선을 타게 되는 것인지 그 요소를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중도라는 것이 원래 극우파인지, 아니면 홍윤기가 전개했던 몇 가지 요소 중에 그런 게 들어갔던 것인지, 예를 들면 '국가' 혹은 '경쟁' 등등, 그런 개념에 극우파의 요소들이 뭍어서 들어온 것인지 내 능력으로는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런 얘기와 가장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것을 내 기억 속에서 막 뒤져보았다.

아주 괜찮은 사람으로 소문난 논술학원 강사이며 막 저술활동을 시작하려고 하는 어느 평론가가 황우석 사태에 대해서 했던 얘기가 가장 비슷한 뉘앙스였다. 민주주의와 절차주의 그리고 다양성에서 생태주의까지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황우석 사태만큼은 음모론의 희생자라고 강하게 믿게 된 그 중간에 끼어든 고리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1년 이상 곰곰이 해봤는데, 난 아직 답을 못찾았다.

하여간 내 능력으로 독해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텍스트이기는 한데, 시간이 나면 홍윤기의 어떤 논리 속에서 극우파의 요소들이 갑자기 들어오게 되었는지, 훨씬 더 정성들여서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 글쓴이는 경제학 박사,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성공회대 외래교수, 2.1연구소 소장입니다.

* 저서엔 <88만원 세대>,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 <아픈 아이들의 세대-미세먼지 PM10에 덮인 한국의 미래>, <조직의 재발견>, <괴물의 탄생>, <촌놈들의 제국주의>, <생태 요괴전>, <생태 페다고지>,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등이 있습니다.

*블로그 : http://retire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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