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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진영의 ‘뉴라이트’ 비판, 문제있다
[진단] 일방적인 비판이 아닌 이념지형에 대한 정밀화와 세련화가 필요
 
황진태   기사입력  2006/12/03 [00:37]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 논의는 의미 있다
 
몇 달 전 정동영 의원이 독일에 잠시 체류하다 귀국해서 하는 말이 '신중도'였다. 독일 정치에 밝은 독자라면 신중도에서 '노이떼 미떼(Neue mitte: 새로운 중도)'가 불현듯 떠올랐을 것이다. 노이떼 미떼는 90년대 후반 독일 사민당이 기민당을 상대로 이른바 새로운 중도를 표방한 선거전략이다. 그런데 단어가 머금고 있는 독일 정치지형의 맥락은 삭박하고 드러난 큼직한 핵석만을 보자면 결국 정동영의 신중도 발언은 내년 대선을 앞둔 또 다시 헤쳐 모여라는 정치공학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정당의 이데올로기적 위치와 투표형태     © 황진태
7,80년대 비교정치분석을 보면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는 경제학의 전제를 훔쳐서 정당의 이데올로기적 위치와 투표형태를 다음과 같은 정규분포(normal distribution) 그래프를 통해서 설명했다. X축은 이념지형을 나타내는데 왼쪽으로 갈수록 진보성향을 오른쪽으로 갈수록 보수를 나타내며, Y축은 유권자의 수, N값으로 ‘거칠게’ 전제해보자. 결국 각 정당이 평균이라고 할 수 있는 m에 위치한 유권자들을 얼마나 많이 포섭하느냐에 따라서 선거의 승패가 갈리는 것이다. 

물론 혹자는 투표선택요인에 있어서 경제학 이론을 들이댄 로체스터 학파의 주장처럼 유권자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제인이 아니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후에 이 이론을 비판하며 나온 인지심리학적 이론에서의 ‘제한적 합리성’이라는 전제 또한 기자가 보기에는 한국정치에서는 마뜩치가 않다. 마치 선거기간만 되면 ‘유권자는 왕이다’는 감언이설과 포개어지지 않은가. 정치인들의 머릿속에는 유권자를 ‘경제인’이든 ‘제한적 합리성’이란 감언이설을 통하여 단순히 머릿수로 밖에는 셀 줄을 모를 테니 말이다. 

현재 열린우리당의 향방을 둘러싼 논란을 보더라도 태생적으로 열린우리당 창당 뿌리의 자기부정은 앞으로 당명은 바뀌겠지만, 똑같은 메주가 다시 메주가 되는 영겁회귀일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콩이냐 메주냐를 갖고서 요란하게 그리고 진중하게 싸우고 있으니 여의도 밖의 시민들은 황당할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내각제가 아닌 대통령제에, 대통령선거도 단순다수제의 직접선거로 인한 양당제에 유리한 정치지형에서 진보는 뚜벅뚜벅 걷고 있다. 현실정치에서의 투표행위가 제대로 반영되는 시스템의 교체는 여전히 장기적인 과제이나 시간만 죽친다고 해서 시스템의 교체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리라. 진정 유권자가 ‘제한적 합리성’이나마 고민을 해보게 하려면 여전히 보수, 진보정당이든 혹은 그 사이를 헤매고 있는 저 정규분포 그래프의 m에서 방황하는 유권자들의 성향에 맞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이념적 분화가 선행되어야만 시스템의 교체가 가능해질 것이다.

아직 담론의 각질화(角質化)를 경험하지도, 거버넌스(governance) 논의에서도 ‘관료성향이 강한’ 거버넌스 수준조차도 착근되지 못한 한국에서 이념의 다양성의 과잉화는 아직은 ‘미덕’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자 한다. 혹자는 단순히 보수/진보의 시위가 증가했으니까 과잉이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시위는 보수의 경우에도 극우와 보수를 분별하는 깔때기 역할보다는 한 곳에 모아놓는 비빔밥 그릇을 하고 있으므로 오히려 다양성을 지우는 기능을 한다고 보아야 유의미하리라. 

교과서 포럼을 둘러싼 진보매체의 보도행태도 문제

이러한 방향을 긍정한다면 최근에 뉴라이트 계열의 교과서포럼에 대해서도 포럼자체의 주장에는 비판하지만 뉴라이트 전체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이들 극우/보수진영이 지금까지 해오던 행태를 똑같이 따라하는 것에 불과하다. 현재 진보적 매체에서의 교과서 포럼관련 보도행태는 뉴라이트를 싸잡아 비판하는 점에서 좀 더 고민을 했으면 바람이다. 이러한 고민의 선상에서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깔때기 용도’로 다음의 성명을 인용한다.

뉴라이트 계열인 자유주의연대(이하 자유주의연대, 자유주의교육운동연합, 뉴라이트싱크넷,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자유네티즌협의회폴리젠)에서는 뉴라이트 홈페이지(new-right.com)를 통하여 11월 30일에 ‘교과서포럼 사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은 성명의 핵심이다.

1) 5.16은 결과적으로 산업화를 성공시킨 세력의 탄생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재해석될 수는 있어도 쿠데타였다는 그 집권과정의 문제점이 가려져서는 안 되며,
2) 4.19는 헌법전문에 그 중요성이 적시돼 있듯이 당연히 혁명으로 표기되어야 하며,
3) 유신체제로 인한 민주주의의 시련과 희생은 엄정히 기록되어야 하며,
4) 민주화운동으로서의 5.18의 의미를 결코 평가절하해서는 안 되며,
5) 전두환 정권 탄생과정의 반민주성이 또렷이 서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교과서포럼에 대한 이들의 부연설명을 들어보면 “교과서포럼은 우리들의 자매단체다. 그러나 조사 결과, 이번 사태는 교과서포럼 구성원들의 다수의견과도 배치되는 일부 소수자들의 사견이 충분한 내부 의견수렴과정 없이 마치 조직의 입장인양 유포된 데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이번 시안은 결코 뉴라이트의 공식입장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 정도 성명이라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진보진영의 비판에 있어서 최소한 싸잡아 비판 하는 것은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건강한 보수의 도래를 기대하기 위해서라도 실제로 이러한 뉴라이트 내부의 스펙트럼에 대해서 한 가지 색깔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포스트모던 담론이 기존의 담론을 모두 해체한 것과 유사한 또 하나의 담론폭력일 뿐이다. 

이번 교과서 포럼 논란이전에 지난 겨울 <교수신문>에서 장상환-이영훈 교수의 근대화 논쟁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경제 교과서 논쟁이 진행 중이다. 기자가 이영훈을 필두로 한 낙성대 연구소의 주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교과서 포럼 논란으로 인하여 이러한 ‘의미 있는 논쟁’까지 싸잡아 융단폭격을 맞는 것은 어느 측에나 아쉬울 수밖에 없다고 본다.

사실 ‘담론의 각질화’를 우려한다는 이러한 지적은 이미 20여 년 전 하버마스와 료따르의 논쟁에서 료따르가 우려했었던 바이지만 이후의 후속연구를 통해서 (사실 이들 논쟁 자체가 각질화를 초래할 수 있었으나) 결국 (두 석학의 용어를 존중하자면) 협의 혹은 합의의 진전을 보았었다. 하버마스-료따르 논쟁이 있은 지 몇 년 후에 한국사회에서는 NL/PD, 사회구성체론 논쟁이 벌어졌었다. 최근에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북한 핵실험과 관련하여 여전히 이들 간에 내부논쟁이 치열하기도 했지만 NL과 PD의 변증의 미덕 혹은 협의가 가능함을 최근에 진보적 싱크탱크의 인적요소의 구성을 보거나 이들의 동선을 통해서 점칠 수 있다. 

회색인에게 자신만의 색깔을 줄 수 있는 담론의 성숙화를

마무리를 짓자. 주지하다시피 사민당의 ‘노이떼 미떼’ 전략은 선거의 참패로 귀결됐다. 정동영 의원의 신중도 언급이든지 열린우리당에서 현재 불씨를 당기고 있는 신당창당 논의든지 결국에는 내년 대선을 두고서 펼쳐지는 회색정치 속에서 메주냐 콩이냐를 갖고 싸우는 것에 불과한 소모성 정치공학 담론이다. 이미 열린우리당의 역사적 한계는 태생적이었다.

다만 이러한 현실정치의 메주가 메주가 되는 영겁회귀를 중단하고 본질적인 시스템의 교체가 선행되기 위해서는 이념지형에 대한 정밀화와 세련화가 필요하며 때마침 교과서 포럼을 빌미로 한국사회의 토론문화가 성숙되는 계기로 발전되길 바라는 게 이 글의 요지다. 다행히도 몇 년 전에 강준만 교수가 종간된 저널룩 <인물과사상>을 통해서 창비사단의 무딘 창끝에 대한 질책을 뒤늦게나마 수용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백낙청 교수가 계간 <창작과비평>을 통해서 실명비판을 제안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징후다.

다시 정규분포 그래프를 보자. 그래프 중간의 언덕에서 방황하는 회색인들에게 경제인이든 제한적 합리성이든 간에 자신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는 담론의 성숙을 경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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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12/03 [00:3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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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2008/11/17 [22:50] 수정 | 삭제
  • 누가 진보 진영이라 하는가?
    진보로 포장한 좌파 김정일이의 나팔수인 빨갱이 집단이라고 하는것이 바른 표현이다. 그들의 과거사가 그랬고 현재가 그 일을하고 있으며 그들의 목적은 정부를 전복하여 대한 민국을 김정일이에게 통채로 갖다 받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 아닌가? 해방 직후부터 하던 그 일을 지금도 하고 있는 것이 진보라는 포장을 하고 정부 뒤집어 엎는 일에 몰두한 그들을 진보라고?.....진보는 무슨 얼어 죽을 진보!.........누가 지어준 이름이 아니라 본색을 감추기 위한 자칭 진보가 아니였든가?
  • 오늘은왠지 2006/12/04 [20:10] 수정 | 삭제
  • 미안한 이야기지만 이글 쓰신분도 도끼빗님의 "퇴행하는 한국어, 절망적인 지성인들의 글쓰기 실력"이란 글을 꼭 읽으셔야 겟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