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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5·18 광주학살의 진실, '악의 평범성'에 대하여
 
강준만   기사입력  2003/06/03 [14:44]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광주민주화항쟁 기념탑
5·18이 다시 돌아왔다. 만 23년! 모든 게 다 밝혀졌는가? 그렇진 않다. 행방불명자만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70명이지만, 무연고 행방불명자만 하더라도 5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정은, <땅 속에서도 천대받는 광주항쟁 행방불명자들>, {월간 말}, 2003년 2월, 89쪽.) 어디 그것뿐인가. 지금도 묻혀진 진실들이 수없이 많다.

아직도 새로운 증언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예컨대, 지난해 5·18 시민법정에서는 80년 당시 경기도 포천군 주한 미군 험프리 공군기지에서 공병대 상사로 근무했던 앨런 바필드(여. 48. 미국 볼티모어)가 보낸 비디오 테이프와 편지가 공개되었다. 바필드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광주항쟁이 시작되자 주한 미군 4만여 명이 비상경계태세에 들어갔으며 폭동진압 훈련도 받았다. 폭동진압 훈련은 일반 시민이 대상이었고 당시 내가 근무했던 부대로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광주에서 사망한 시민은 2천5백 명이나 됐다. 광주의 상황이 악화되면 추가로 미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5·18 시민법정 지상중개: "광주항쟁 때 주한미군 진압훈련 받았다">, {노동일보}, 2002년 5월 20일, 9면에서 재인용.)

이는 모든 진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선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걸 말해주는 건 아닐까?

나는 최근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이라는 책을 냈다. 1970년대편과는 달리 3권이 아닌 4권이 되었는데,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5·18 광주항쟁 때문이었다. 신군부의 병사들이 광주에서 무자비한 학살을 저지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직 제대로 된 탐구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에서도 그 점을 적잖이 다루었지만, 여기에선 그 책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 가능한 한 중복이 되지 않는 선에서 그 문제를 좀 다른 각도에서 심도 있게 다뤄보고자 한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의 참상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우선 언어의 한계부터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충근의 다음과 같은 한탄이 가슴에 와 닿는다.

http://jabo.co.kr/zboard/
▲ 광주항쟁 당시 민간인 학살 사진
"광주항쟁을 취재하면서 내 자신이 기자로서 갖추어야 할 표현력의 부족을 얼마나 한탄했는지 모른다. 글이나 말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사실도 그때 뼈저리게 체험했다. …… 기자로서는 이 같은 행위를 적절히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만행, 폭거, 무차별공격 등의 단어는 너무 밋밋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단어는 '인간사냥'이었다.(이 용어는 당시 계엄사의 언론검열로 신문에 활자화되지 않았으나 광주사태의 참상을 전하는 표현 중에 쭉 인용되고 있다). 또 젊은 여자, 그것도 옷맵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얼핏 떠올랐으나 그것 역시 광주 상황을 전하기에는 적절치 못하였다."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풀빛, 1999), 96∼97쪽에서 재인용.)

관객의 부재 속에 연출된 '지상의 지옥'

광주항쟁 기간 동안 공수부대원들이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건 순간 미쳤기 때문이라고나 할 수 있겠지만, 붙잡혀 온 시민들을 대상으로 저지른 만행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① 워커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②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털이 만들기', ③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 요리', ④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⑤ 두 사람을 마주 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⑥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게 하기, ⑦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⑧ 송곳으로 맨살 후벼파기, ⑨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⑩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넣기 등과 같은 악행들을 저질렀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편,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풀빛, 1990), 814, 917, 1011, 1452∼1453, 1483쪽;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샘물, 1988, 제2판 1999), 156∼157쪽;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풀빛, 1999), 259∼262쪽.)

상무대에서건 그 어디에서건 붙잡혀 온 시민들에 대해 신군부의 병사들이 저지른 악행은 문자 그대로 '지상의 지옥'이었다.(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편,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풀빛, 1990), 927쪽.) 광주항쟁 기간의 광주는 더 말해 무엇하랴. 지난해 5·18 민중항쟁유족회가 5·18 부상자들의 병력을 조사한 결과, 1980년 이후 114명이 정신질환을 앓았으며 29명은 이미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는 건 무얼 의미하겠는가? (안관옥, <고문.발포 충격 114명 정신질환 10명 목숨 끊어>, {한겨레}, 2002년 5월 18일, 15면.)

한(恨) 맺힌 피의 바다 위에 정권을 세운 5공은 내내 상습적으로 악독한 고문을 자행한 '고문 정권'이기도 했다. 광주학살과 고문의 공통점은 둘 다 '관객의 부재' 상황에서 자행되었다는 점이다. 고문은 아무도 보지 않는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광주도 마찬가지로 '밀실'이었다. '관객의 부재'라는 개념으로 광주시민들이 겪은 고통을 설명한 최정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5·18의 경우 군부는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였고 광주 밖에서는 아무도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군부는 관객석을 봉쇄하고 광주에만 제한된 폭력극장을 만들었고 관객이 없는 이상 비폭력은 아무런 전술적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 관객의 부재는 공수부대의 폭력이 부당함을 호소하고자 하는 광주시민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군부의 언론통제는 광주시민들을 지원할 타 지역 국민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폭력적 대결 외에 비폭력의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시민들이 MBC를 세 차례나 공격하고 결국은 불지르려 하고 KBS에도 방화하게 된 이유는 바로 관객의 배제에 따르는 수많은 덧없는 희생 그리고 목숨을 걸고 투쟁해야 하는 고뇌와 고독에 따른 좌절감의 표출이었다. 방송국에 방화한 것은 단순히 언론의 자유를 위해 군사독재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못된 방송국을 처벌한다는 추상적 이상을 실현한 것이 아니었다."(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풀빛, 1999), 159쪽.)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80만 시민을 '밀실'에 유폐시킨 건 이해하겠는데, 그 후에 일어난 '광주의 고립'과 더 나아가 '호남의 고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과연 이 나라 다수 국민은 광주의 아픔을 이해하고 광주에 대해 조금이라도 미안해 하긴 하는 건가?

나의 답은 부정적이다. 광주의 진실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수 한국인은 그걸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호남 몰표'를 무조건 욕하면서 자신이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라고 자기 자신을 속인다. 아니면 뭘 몰라서 그러는 사람들도 있을 게다. 나는 나의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책이 그런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파시스트적인 개인들'이 따로 있는가?

신군부의 병사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 인간들은 특별한 인간들이었을까? 타고난 성품이 잔인한 인간들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놓고 우리보다 앞서 고민한 서양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나치에 가담해 유태인 학살에 참여한 인간형을 '권위주의적 성격'(authoritarian personality)을 가진 사람들로 규정하고 이들을 특별한 종류의 인간 집단으로 보았다. '잠재적으로 파시스트적인 개인들'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한길사, 1998), 42쪽.)

그러나 지크문트 바우만은 아도르노의 주장이 평범한 인간들도 나치스가 자행한 잔혹한 행동을 할 가능성을 배제한 논리라고 비판하였으며, 존 스타이너도 아도르노가 상황적(사회적·문화적·제도적) 요소들의 영향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한길사, 1998), 42쪽.)

어빈 스타웁은 잠재적인 폭력적 성격은 특정한 부류의 사람에게만 잠재해 있는 것 아니라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통된 특징의 하나라고 보았으며, 바우만도 잔인성은 특수한 성격이나 특정한 집단의 인간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상황적 요인에 의하여 발동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한길사, 1998), 43쪽.)

필립 짐바르도가 스탠퍼드 교도소에서 행한 사회심리적 실험 결과는 가학적 성격 타입이 아닌 사람들도 상황이 바뀌면서 쉽게 가학적 행태를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비가학적 성격 타입의 사람들로 하여금 죄수들을 통제하는 임무를 맡겼더니 이들도 잔인성, 모욕, 비인간화의 행태를 보이며 통제하기 시작했고 그 정도는 급속도로 상승했다는 것이다.(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한길사, 1998), 44쪽.)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1963년에 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 책은 1960년 5월 24일에 붙잡혀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에 관한 이야기다. {뉴요커}라는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이 재판과정을 취재한 아렌트는 이 책에서 아이히만이 유태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이진우, <근본악과 세계애의 사상: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이진우·태정호 옮김, {인간의 조건}(한길사, 1996), 29쪽.)

그러한 '사고력의 결여'는 어떻게 발생하며 무엇이 그 '결여'를 메워주는가? 히틀러의 병사들에게 '명예'는 곧 '충성'이었고 '충성'은 곧 '명예'였다. 또 히틀러 일당들은 사람을 죽이는 일에 역사적이고 웅대한 의미를 부여하게끔 병사들을 세뇌시켰다. 2천 년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엄청난 일이라는 걸 주입시켰다. 그리하여 병사들이 "내가 사람을 죽이다니!"라는 생각을 갖기보다는 "내 어깨에 걸린 역사적 책무가 참으로 무겁도다!"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Hannah Arendt, {Eichmann in Jerusalem: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New York: Penguin Books, 1963, 1985), 105∼106쪽.)


학살 집행자들의 심리

학살은 제법 정교한 분업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셈이다. 크게 나누어, 명령을 내리는 자, 세뇌를 하는 자, 집행하는 자는 각기 다른 위치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심리적 '방어기제'를 갖게 될 것이다. 명령을 내리는 자와 세뇌를 하는 자는 사람을 죽이는 일의 끔찍한 현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조치하시오'라는 우아한 말 한 마디, 또는 '국가와 영광을 잊지 마라'는 애국적인 말 한 마디만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그들의 손엔 피 대신 향기로운 술잔이 들려있을 것이다. 피로 목욕을 하는 병사들은 그 순간 명예와 충성과 역사적 책무와 국가의 영광이라는 주문만 외우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심리적 과정은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여러 가지 다른 장치들이 개입된다.  학살을 저지르는 인간들의 심리 상태에 대해 이삼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학살의 집행자 또는 하수인들은 자신들이 잔혹 행위에 개입해 있는 그 현실의 어처구니없음(absurdity in realities)을 어떤 형태로든 어느 정도는 인식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자기부정하고 그 부정된 공백을 환상으로 메우려 한다. 이 과정에서 창조되는 것이 곧 '위조된 세계'(counterfeit universe)이다. 여기에는 현실과의 정직한 대면을 부정하기 위한 여러 가지 도구들이 등장한다. 그 중의 하나가 베트남전쟁의 경우 군인들이 애용한 헤로인과 마리화나 등의 마약복용(pot-smoking)이었다. 독일군들은 유태인수용소에서 술과 고전음악을 즐겼으며 수용된 여성들에 대한 변태적인 성적 학대를 즐겼다. 이런 수단들을 통해서 학살의 하수인들은 스스로 '심리적 불감' 상태(psychic numbing)를 불러일으키며 정신적 공황을 메우려고 했다."(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한길사, 1998), 65쪽.)

이삼성은 '심리적 불감'은 학살과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자신들의 현실을 비현실화(derealization)하는 심리적 과정과 연결돼 있으며, 이 과정에는 크고 작은 이데올로기와 도구들이 동원된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치스의 경우는 '새로운 독일적 냉혹성'(new spirit of German coldness)을 영웅시하는 이데올로기도 한몫을 했다. 고전음악을 즐기는 것과 같은 심미적(審美的) 행위도 학살과 죽음이라는 현실과 그 하수인에게 불가피하게 따르는 죄의식을 초월해 보다 효과적이고 냉혹한 학살기계로 자신들을 적응시키는 데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것들은 다같이 현실의 초월을 돕는 비현실화의 도구였던 셈이다.
학살의 하수인들은 다른 한편으로 자기합리화의 메커니즘을 극대 활용한다. 현실에서 직면하는 어처구니없는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부조리한 행위들을 넘어서서 그것들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다른 높은 차원의 목표와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부조리한 행위에 개입해 있는 자신을 용서하려 한다. 한국전쟁 당시 거창에서 무고한 700여 명의 양민을 학살한 이른바 국군부대의 지휘관들은 법정에서 상관의 명령에 대한 복종의 근엄한 가치와 국가안보의 절대성을 들먹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고위직을 차지하며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베트남에서 많은 미국 군인들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하고 있는 일이 '웃기는 일'(ridiculous)이라는 것을 한편으로는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나에게는 웃기는 일로 보이더라도 거기에는 무언가 수긍할 만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이러한 심리적 과정에는 두 가지의 모순된 인식간에 부단한 갈등이 있고 그래서 일종의 정신분열의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한길사, 1998), 66쪽.)


인간의 '쓰레기화'를 획책한 신군부

▲ 광주민주화항쟁 당시 피시를 들고 시위하는 모습
광주학살의 경우도 이와 비슷했다. 이미 광주학살 3개월 전인 1980년 2월부터 특전사는 '충정명령'이라는 강력한 폭동진압 훈련에 돌입했다. 말이 좋아 훈련이지, 이건 '인간폭탄 만들기' 훈련이었다. 영외 거주는 말할 것도 없고 외출과 외박이 전면 금지된 상황에서 전 장병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가혹한 지옥훈련을 받으면서 까닭 모를 적개심과 분노를 키워가고 있었다. 병행된 정신교육 훈련은 장병들이 그래야만 할 이유를 제공했다. 그 주요 내용은 "시위 군중의 배후에는 빨갱이가 도사리고 있다.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때리고 짓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채의석, {99일간의 진실: 어느 해직 기자의 뒤늦은 고백}(개마고원, 2000), 32∼33쪽.)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은 광주에 배치 받기 전 3일 동안이나 식량배급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되기 직전에는 소주를 공급받았다. 물론 이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Report From Kwangju (Washington, DIC.: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 Rights in Korea, 1980), p. 6; 최영진, {한국지역주의와 정체성의 정치}(오름, 1999), 286∼287쪽에서 재인용;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편,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풀빛, 1990), 1304쪽.)

실제로 광주항쟁 기간 동안 술에 취한 상태에서 또는 배고픔으로 인한 분노로 또는 가혹한 지옥훈련과 학대와 다를 바 없는 악조건의 대기 상태에 대한 적개심으로 사람을 죽인 공수부대원들이 많았다. 이러한 조건은 신군부의 우두머리들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공수부대원들이 내뱉은 월남 이야기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기는 월남의 전쟁터다'라는 생각을 가지려고 애를 썼다. 5월 20일 전남대 강의실로 끌려간 강길조의 증언이다.

"공수대원들은 상당수가 월남전 얘기를 입에 올리기를 잘했는데, 그중 한 명은 대검을 빼어들고, '이 대검은 월남에서 베트콩 여자 유방을 사십 개 이상 자른 기념 칼이다' 라고 자랑하며 그 대검으로 앞 사람의 더벅머리를 탁 쳤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면서 스포츠 머리처럼 되었다."(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편,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풀빛, 1990), 1451쪽.)

물론 신군부의 병사들이 만든 그러한 '위조된 세계'는 전두환 일당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위조된 세계'를 만들어 학살극을 벌이지 않고선 집권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일단 '위조된 세계'를 갖게 되면 병사들은 곧 '쓰레기'로 변하게 돼 있다.

이삼성의 말이다.
"이 위조된 세계에서 군인들은 다른 인간들을 아무렇게나 다루고 또 죽일 수 있는 '쓰레기'(garbage)로 취급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군인들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쓰레기로 되어간다."(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한길사, 1998), 69쪽.)

신군부의 우두머리들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쓰레기화'된 병사들의 학살 행위에 '국가안보'라는 영광스러운 이데올로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이 훨씬 더 나쁜 인간들이다. 신군부는 공수특전부대 사령관 정호용 등 살인마 66명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등 자기들끼리 훈장을 나눠 갖는 잔치판을 벌였다. 이들에게 광주학살은 작전명 그대로 그야말로 '화려한 휴가'였던 셈이다.(임철우, <5·18 정치폭력의 잔학성>, 변주나·박원순 편, {치유되지 않은 5월: 20년 후 광주민중항쟁 피해자 실상 및 대책}(다해, 2000), 95쪽.)

일제 군국주의 병사들의 심리

지옥훈련을 받느라 박박 기던 신군부의 병사들에겐 폭력행사 과정에서 우월적 지위의 향유로 인한 광기(狂氣)도 작동했을 것이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이나 필리핀에서의 일본군의 포악한 행동거지에 대해서도, 그 책임의 소재는 어떻든 간에 '직접적인' 하수인은 일반 사병이었다는 뼈아픈 사실에서 눈길을 돌려서는 안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비루한' 인민이며 영내에서는 이등병이지만, 일단 바깥에 나가게 되면 황군(皇軍)으로서의 궁극적 가치와 이어짐으로써 무한한 우월적 지위에 서게 된다. 시민생활에서, 그리고 군대생활에서 압박을 이양해야 할 곳을 갖지 못한 대중들이 일단 우월적 지위에 서게 될 때,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던 모든 중압으로부터 일거에 해방되려고 하는 폭발적인 충동에 쫓기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만행은 그런 난무(亂舞)의 슬픈 기념비가 아니었을까(물론 전쟁 말기의 패전 심리나 복수심에서 나온 폭행은 또다른 문제이다)."(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한길사, 1997), 62쪽.)

신군부의 우두머리들이 누리고 싶어했던 '우월적 지위'는 헌법을 유린하고 정권을 찬탈하는 것으로 나타난 반면, 그 병사들은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그 우두머리들이 병사들을 어떻게 훈련시키고 세뇌시켰겠는가.
당연히 이른바 '억압 위양의 원리'도 작동했을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 원리를 "일상생활에서의 상위자로부터의 억압을 하위자에게 순서대로 떠넘김으로써 전체의 정신적인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그런 체계"라고 정의하면서 이는 일본의 사회체제에 내재하는 정신구조의 하나라고 말한다.(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한길사, 1997), 158쪽.)

한국도 별로 다를 게 없다. 신군부의 우두머리들이 획책한 '충정훈련'에서의 지옥훈련은 그러한 억압이 반드시 누구에겐가 위양될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 훈련을 떠나서도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할 신군부의 마피아적 특성은 평상시 그러한 '억압 위양의 원리'를 포함한 것이었다. 자기들만의 배타적인 이익을 누리기 위해 내부적으로 강한 위계질서와 의리를 내세우는 집단은 그로 인해 억압된 폭력성을 반드시 외부로 방출하게끔 되어 있으며, 이러한 원리는 신군부의 장교들이 지휘하는 병사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사적인 일'의 윤리성이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것과의 합일화에 있다는 … 논리는 한번 뒤집어보게 되면 국가적인 것의 내부에 사적인 이해가 무제한으로 침입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 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한길사, 1997), 51쪽.)바로 이게 1980년 봄 광주는 물론 서울에서도 일어난 역사적 반동의 심리적 기반이었다.

신군부의 그런 반동적 행위를 가능케 한 한국적 토양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본의 경우는 어떠했던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주장에 대한 이삼성의 해설을 들어보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의 군국주의와 그것이 해외에서 보여준 야만적 폭력성의 근원을 인간과 인간간의, 집단과 집단간의, 그리고 민족과 민족간의 관계에 대한 수평적 윤리체계가 일본의 전통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천황을 정점으로 하고 그 천황이 이끄는 국가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수직적 위계의 질서의식과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수직적으로 연결하는 비민주적이고 전제적인 역사적 제도가 일본인들의 윤리와 사회의식에 초래한 왜곡된 심리구조에서 천황과 국가와 군의 군국주의적 침략과 야만에 일본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종사한 근원을 찾았다. 천황을 정점으로 수직적으로 조직된 역사적 제도와 그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고 유지시키는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군국주의에 동원되어 충실히 봉사한 일본인 일반의 사회심리의 일치 속에서 일본 군국주의라는 불행의 근거를 찾았던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또한 그러한 수직적 윤리의식 구조에서는 '사적인 것'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개인의 자율적 윤리의식이 존재할 공간도 없게 된다. 초국가주의의 특성은 바로 개인들의 '사적인 영역'을 국가적인 것에 종속시키고 그 둘 사이의 구별을 지워버리는 논리이기도 하다."(이삼성,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한길사, 1998), 77∼78쪽.)

하나회의 마피아적 특성과 광주학살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에 대해 너무 자학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본이 매우 심하긴 하지만, 일본만 그런 건 아니다. 광주학살은 한국이 일본을 지배했더라면 일본군 못지 않게 한국군이 잔인하게 굴 수 있다는 걸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었다. 동족에게 그렇게 잔인한 인간들이 일본인들에게는 어떻게 굴었을지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가 광주학살과 관련해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사조직 하나회의 마피아적 특성일 것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보안사령관이었던 강창성이 조사한 결과, 하나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밝혀졌다.

"하나회는 ① 정규육사 출신을 매기별로 정원제를 유지하여 가입시키되, 약 5% 수준인 10여 명 내외로 하고, ② 회원의 다수는 영남 출신이 점하고, 여타지역 출신은 상징적으로 가입시키며, ③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조직하되, 가입시 조직에 신명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케 하고, ④ 고위층으로부터 활동비를 지급받거나 재벌로부터 자금을 수령하며, ⑤ 회원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진급 및 보직상의 특혜라고 하는데, 당시 육군에는 인사 정체가 심화되어 정규육사 출신들은 의부복무기간 5년이 끝나고 장기복무에 들어가게 되면 매기별 현역 총원의 1/2씩만 상위계급으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회에의 가입은 군부 내에서의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대왕사, 1993), 321쪽.)

당시 보안사 수사관이었던 백동림은 하나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평소 육사 출신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귀감이 되는 사람들로서, 그 언행에 있어 정정당당하고, 정직하고, 정의롭고, 명예롭다는 신조를 갖고 이를 큰 긍지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군율이 엄하고 지휘체제가 일사불란해야 하고 군기가 생명이라는 군대 내에 마치 간첩조직 같이 서로 차단된 점조직으로 구성된 불법적인 조직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조직은 조직 방법과 조직 목적, 그리고 행동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선서 내용과 그 구성원의 행태가 그 유명한 범죄조직인 마피아 조직과 너무나 흡사하여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특히 이들 조직원은 회장인 전두환 대령 앞에서 오른손을 들고 '만일 서약을 어겼을 때는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다'는 선서를 했다. …… 이들은 자기들끼리 계획적으로 진급과 요직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진급 담당 요직을 점거하고 심지어 돈을 받고 진급시키기도 하면서 서로 보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부정을 거침없이 자행하여 조사관들 모두가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백동림, {멍청한 군상들: 전 보안사 베테랑 수사관의 자전적 수사 실화}(도서출판 답게, 1995), 76∼77쪽.)

하나회의 이런 마피아적 특성은 세 가지 점에서 광주학살과 관련돼 있다.
첫째, 신군부의 마피아적 특성은 최규하 정부를 얼어붙게 만들어 광주학살이라는 역사적 대범죄의 들러리로 전락하게 했다. 눈곱만큼이라도 견제를 한 게 아니라 오히려 거들었다는 말이다. 일개 육군 대령이 대통령을 잡아넣겠다고 큰소리를 치는 등 속된 말로 '개판'을 쳤는데 마피아적 근성이 없고선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당시 한 청와대 비서관의 증언이다.

"全장군이 중정부장에 취임한 4월 중순경의 일이었습니다. 청와대 신관의 어느 방에서 우연히 흘러나오는 소리를 엿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군부의 실세로 일컬어지던 권정달씨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권씨는 누구에겐가 '崔통(崔대통령을 지칭)한테 그만두라고 그래. 그만두지 않으면 잡아넣겠어'라고 소리를 치는 거예요. 아무리 군인세상이고, 난장판이라고 하지만 일개 육군 대령이 청와대 안에 들어와서 대통령을 잡아넣겠다고 소리를 치는 데는 정말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청와대가 아니라 감옥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밥맛도 완전히 떨어지더군요."(이도성, <전두환의 정치무대 데뷔>, {남산의 부장들 3}(동아일보사, 1993), 20쪽)

둘째, 신군부가 마피아적 특성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군부 내의 다른 목소리가 광주학살에 대한 이견을 제시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마피아 조직에서 보스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는 조직원을 본 적이 있는가? 더욱 중요한 건 그 파급 효과였다.

최규하만 그렇게 당했던 게 아니다. 엊그제까지 육군참모총장을 하던 별 네 개(정승화)도 끌고가 몽둥이 고문에 물 고문까지 가한 게 바로 신군부였다.(정승화,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까치, 1987), 214쪽.) 실세가 아니면 별을 여러 개 단 장성들도 대령들에게 벌벌 기었다. 대한민국 국군의 위계질서는 완전히 개판이 되었고 마피아 단원이냐 아니냐 하는 기준에 따라 위계질서가 재편성되었다.

그렇게 이성이 마비되고 광기까지 설치는 판에서 제 정신 가진 장성들이 옷을 벗거나 그 이상의 보복을 당할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이견 제시를 하기는 어려웠다. 전두환 일당은 이미 1980년 1월 군장성들의 대대적인 물갈이 이후에도 공사석에서 12·12 사태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장성들을 찾아내 내쫓거나 보직을 변경하는 식으로 보복을 가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견을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이계성, {지는 별 뜨는 별: 실록 청와대}(한국문원, 1993), 280쪽)

셋째, 신군부 장교들의 그런 마피아적 특성은 광주학살에 동원된 공수부대원들에게도 충분히 감염되었을 거라는 점이다. 그런 감염을 목적으로 한 게 바로 '충정훈련'이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이야기한 일본 군국주의의 조직적 특성은 유감없이 하나회 마피아가 이끌었던 공수부대에서 그대로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 나는 하나회가 갖는 '악(惡)'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나회에도 나름대로 좋은 뜻이 있었겠지 모든 게 나쁘기만 했겠는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배타적 우월의식을 갖고 있는 폐쇄된 조직은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낼 수 있고 그 결과는 가공할 만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86·88'이라는 마법의 주문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선 '정치의 미학화'가 가동되었다. 그건 유태인 학살에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도 그런 용도로 이용되었다. 요아힘 페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36년의 올림픽 경기는, 제3제국이 개별적으로는 온갖 사나운 모습을 다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시민들에게 복지국가의 엄격한 행복을 베푼다는 기만적인 이미지를 온 세상에 퍼뜨린 선전의 절정이었다. 국가사회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베를린에 유치된 이 경기가, 세계의 손님을 맞아들이는 주인의 입장에서 이용할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열렬히 군비를 확대하는 전쟁을 각오한 나치국가라는 잔인한 이미지에 반하여 평화스럽고 분주한 목가의 모습을 마주세우기 위해 온갖 일을 다하였다. 경기가 시작되기 몇 주 전에 모든 반유대주의적인 증오의 장광설이 중지되었다. 예를 들면 국가사회당의 지역 선전지휘자들은 집 벽과 울타리에 남아 있는 반정권 구호의 흔적을 다 제거하고, 추한 풍자화들이 내걸리지 않도록 하고, 심지어는 '모든 집주인은 앞마당을 흠 없이 꾸며놓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요아힘 C. 페스트, 안인희 옮김, {히틀러 평전 II}(푸른숲, 1998), 918쪽.)

광주학살을 저지른 신군부가 이후 무슨 짓을 했던가를 상기해보라. 놀랍게도 너무 비슷하다. 신군부가 자신들의 만행을 은폐하거나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는 시종일관 국가주의였다. 국가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한 수많은 이벤트와 행사들이 있었지만, 가장 대표적인 건 단연 서울올림픽이었다. 서울올림픽은 1988년 9월에 개최되었지만, 올림픽의 서울 유치가 확정된 건 7년 전인 1981년 9월이었다. 그 해 11월에는 86 아시안게임의 서울 유치도 확정되었다. 아시안게임과 더불어 서울올림픽은 5공 정권이 휘두를 수 있는 '전가의 보도'였다. '86·88'은 이후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더욱 중요한 건 신군부와 5공에 격렬히 반대했던 사람들마저도 '서울올림픽의 영광'에는 힘없이 무너져 내려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한국전으로 잿더미가 되었던 나라에서 올림픽을 치르다니! 그 사실에 감격한 국민 다수의 뜻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제동물'의 탄생과 한국어의 타락

게다가 86년부터 들이닥친 저금리·저유가·저달러의 '3저 호황'은 5공이 끝날 때쯤에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라는 찬탄을 낳게 했다. 중산층의 탐욕이 무럭무럭 자라나 꽃을 피우던 시절이었다. 유시춘의 말마따나,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현대사의 발전에 훨씬 더 좋았을 '신군부'의 5공 시절에도 대다수 국민은 단순히 먹고사는 일이라면 별로 불편할 일이 없었다. 때마침 3저 호황에다 매년 풍년을 구가했기 때문이다. 동족을 살상한 피묻은 손이면 어떻고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은들 어떤가."(유시춘, <386 의원의 '절차 도그마'>, {문화일보}, 2001년 6월 7일, 6면.)

만약 히틀러 치하의 독일이 독일어를 타락시켰다는 어느 학자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한국인들은 올림픽과 3저 호황을 거치면서 '경제동물'로서의 확고한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내는 독일군 병사들은 가스 발사 단추를 누르던 그 손으로 부모 형제에게 애틋한 가족애를 전하는 편지를 썼다. 이와 같은 모순이 히틀러 치하에서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그렇게 타락한 독일어로 어찌 사랑을 말하며 인권을 말할 것인가? 독일 문학의 쇠퇴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나타나게 되었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을지언정, 광주학살을 거친 한국어가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법하다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게 어떨까?

시인 조병화의 주장에 따르자면, 전두환은 "청렴결백한 통치자, 참신과감한 통치자, 이념투철한 통치자, 정의부동한 통치자, 두뇌명석한 통치자, 인품온유한 통치자"였다. (이영미, <전두환씨에게 바친 문인들의 찬사>, {샘이깊은물}, 1996년 3월호; 김종철,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김종철 사회문화에세이}(개마고원, 1999), 103쪽에서 재인용.)시인 서정주는 그러한 감격을 이기지 못해 87년 1월 18일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지어 전두환의 '평화의 댐' 업적을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7천만 동포의 기대를 얻으셨나니/이 나라가 통일하여 흥산할 발판을 이루시고/쉬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이 민족 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이영미, <전두환씨에게 바친 문인들의 찬사>, {샘이깊은물}, 1996년 3월호; 김종철, {마침내 하나됨을 위하여: 김종철 사회문화에세이}(개마고원, 1999), 103쪽에서 재인용.)

서정주와 조병화는 가벼운 시인이 아니었다. 한국의 시문학을 대표할 만한 반열에 오른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들이 아니다. 그들을 따르고 추앙하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수없이 많다. 그들은 한국 문단을 지배하는 주류다. 그들은 말했다. 시(詩)와 정치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시인으로서의 서정주를 추모하고 우러러보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고.

그래, 맞는 말이다.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낸 독일 병사들도 아름다운 시를 읊었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다. 우리가 독일인들보다 무엇이 못해 그걸 흉내내지 못하랴. 그러나 광주학살 이후 5공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정신이 부패했다는 것까지 부정하지는 말자. 보릿고개의 굶주림을 겪은 우리가 먹고사는 일에 아무런 불편이 없으면 그걸로 족한 것이지, 무엇을 더 바란다고 그 사실마저 부정해야겠는가 말이다.

광주학살과 호남차별

호남차별도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하나회는 두말할 필요 없이 '영남 마피아'였다. 강창성의 조사결과에서도 나타났듯이, 여타지역 출신은 상징적으로 가입시켰을 뿐이다. 영남 마피아가 영남, 예컨대 대구나 부산에서 그런 학살극을 벌일 수 있었을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반드시 그 마피아 단원들의 친인척이나 친구들 가운데 살해당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돼 있다. 그걸 모른 척 외면했을 리 만무했을 것이다.

호남차별에 관한 한 일부 비호남 국민도 면책될 순 없다. 광주학살을 저지른 신군부에게 지지를 보낸 사람들이야말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실감나게 해주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과 학살을 저지른 신군부의 병사들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호남차별을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난 95년 {전라도 죽이기}라는 책을 내면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 책의 부작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호남차별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호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호남차별의 사례들을 가득 담은 책을 내면 이 세 번째 유형의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내게 된 건 실(失)보다는 그래도 득(得)이 클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나는 호남차별에 대해 너무 온건하게 대응하는 것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원치 않을 것 같아 이름은 밝히지 않겠지만, 나는 사적인 자리에서 호남차별 발언이 자유롭게 나오는 걸 견디지 못해 그 자리의 판을 뒤엎고 나와버린 몇 명의 훌륭한 영남인들을 알고 있다. 그렇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사석에서 '전라도 사람들은 어때'라는 식의 모멸적인 발언이 나와도 가만 듣고만 있다(이런 말을 하는 인간들은 꼭 그 자리에 전라도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미리 확인하는 더러운 버릇을 갖고 있다). 그 자리에서는 가만있다가 나중에 글로 그래서야 되겠느냐고 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선 안 된다. 그 자리에서 분노해야 한다.

또 어떤 전라도 사람들은 자기는 공사(公私) 구분을 좋아한다며 호남차별을 저지르는 사람과도 사적으로는 친하게 지낸다. 난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호남차별이 공적(公的) 영역의 일이니까 사적으론 아무 관계가 없다는 이야긴가?

미국은 인종차별이 엄청나게 심한 나라다. 미국 다녀온 유학생들이나 관광객들의 말은 믿지 마시라. 잠시 있다 갈 사람들에게는 차별하고 말 것도 없다. 그런 나라에서조차 몇 사람이 모인 사적인 자리에서 인종차별하는 발언을 했다간 큰 일 난다. 물론 그런 인간들끼리만 모인 자리에서야 무슨 말이든 다하겠지만, 적어도 학교 동창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그랬다간 큰일 난다. 호남을 모멸하는 발언을 듣고 판 엎고 나온 영남인들이 모두 학교 동창들의 모임에서 그랬다고 하길래 하는 말이다.

아무리 착하고 양심적으로 살아도 호남인들을 모멸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은 다시 봐야 한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일일이 논리적으로 설명해줄 것도 없다. 그 자리에서 무섭게 대해야 그런 짓이 없어지지 '오냐, 오냐' 해주면 끝이 없다. 그런 못난 사람들은 충격을 좀 받아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과 독립성과 주체성

한국 유학 경험이 있는 일본의 사회학자 고하리 스스무의 다음과 같은 증언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다.

"언젠가 한국에서 어학 연수중인 제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하숙집 주인인 영남 출신의 아주머니가, '전라도 사람을 조심해라. 호남 사람과는 교제하지 마라'는 말을 해서 난처하다는 내용이 씌어 있었다. 내게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지역감정을 긍정하는 한국인을 만난 적은 없다. 그들은 한결같이 지역감정은 나쁘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상도 등 다른 지역 출신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진심으로 전라도 사람을 욕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전라도 사람들은 머리는 좋지만'이라는 전제를 둔 다음에 '이기적이다', '교활하다', '믿을 수 없다' 라는 식의 말이 이어진다. 특별히 전라도만이 다른 지역 주민과 다른 것도 아니고 똑같은 한민족인데 그렇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백인들이 흑인들을 인종차별하거나 중국에서 한족(漢族)이 티베트 민족을 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렇게 험담하는 소리를 들으면, '한국인이 싫어하는 일본인에게 이런 험담을 들려주어도 되는 것인가'라거나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안에서도 또 하나의 분단 상태에 놓여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한국의 지역주의는 너무나 유치하다. 이렇게 유치한 감정이 한국 사회를 좌우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슬픈 일이다."(고하리 스스무, 고영욱 옮김, {한국과 한국인}(이지북, 2001), 19∼20쪽.)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적어도 광주학살 이후 비호남 사람들이 티끌 만한 양심이라도 있다면 평생 호남인들에게 미안한 생각 갖고 살아도 모자랄 판에 외국인들에게 호남인들 욕이나 하는 짓을 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매우 선량한 영남 서민들의 호남에 대한 몹쓸 생각은 앞서 이야기한 '억압 위양의 원리'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렇게 말한다.

"억압 위양의 원리가 행해지고 있는 세계에서는 계서제의 최하위에 위치한 민중의 불만은 이미 이양할 장소가 없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바깥을 향하게 된다. 비민주주의국가의 민중이 열광적인 배외주의(拜外主義)에 사로잡히기 쉬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 옮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한길사, 1997), 159쪽.)

그렇다. 겨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영남의 날품팔이 노동자조차도 과거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욕했던, 슬픈 코미디를 저지르는 심리의 근원이 바로 거기에 있다. 호남을 욕하고 모멸함으로써 영남 내에서의 최하위 위치를 위로해보고자 하는 '억압 위양의 원리'는 한국 사회 일각에 횡행하고 있는 호남차별 심리의 일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악의 평범성'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아무리 착하고 선하게 살아도 전라도 사람들 어떻다고 흉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외국인 노동자도 그런 식으로 대할 것이고, 강력한 권력이 나타나서 죽으라 하면 죽는시늉 그대로 할 사람들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독립성과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 사실 광주학살을 생각하면 '인간의 존엄성' 운운하는 게 다른 동물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 인간들은 개돼지보다 나을 게 없으면서 뻑하면 '개돼지보다 못한 놈' 운운하면서 개돼지들을 모욕하는 걸까?

그런 미안한 마음을 잠시 뒤로하고 말하자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독립성과 주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게 바로 광주가 우리에게 준 메시지요 교훈이요 진실일 것이다. 한국인 다수에게 그게 있었더라면 5·18 광주학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신군부의 집권도 어림없는 일이었을 게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그 교훈을 실천에 옮길 생각은 하지 않고 있으니 이게 어디 될 말인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과거가 있는 사람이 후안무치(厚顔無恥)를 범하면서 뒤늦게 세상 좋아지니까 이런 열변을 토하는 것에 대해 독자들의 용서를 빈다. 아직도 광주항쟁을 모독하는 인간들이 많다는 점을 유념해 너무 꾸짖지는 말기 바란다.

* 본 기사는 월간 [인물과 사상] http://inmul.co.kr 6월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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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6/03 [14:4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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