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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익과 공무원 시험문제집을 든 젊은 그대에게
인문사회과학서적의 기피는 보수화와 비례, 대학생 지적토대 재건 시급
 
황진태   기사입력  2006/07/13 [00:03]
들어가며

지난 대선부터 5ㆍ31지방선거까지 그간 2,30대의 보수화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이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대학사회 현장취재를 통하여 나름대로 이러한 보수화의 원인을 짚어보면 무엇보다도 'FTA 쓰나미'가 들어 닥치기도 전에 한국경제의 신자유주의로의 체질개선과 경제불황이 포개어진 여파가 대학에도 침투했고, 이는 한총련 탈퇴와 비운동권 출신이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는 사례에서 보듯이 대학생들이 '이상'보다는 '현실'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먹고살기의 힘겨움을 이해하면서도 이러한 힘겨움이 그들의 탈정치화, 냉소적 사회 무관심, 보수화되는 태도에 대한 전면적인 면죄부를 줄 수만은 없다. 필자는 이러한 보수화에 대해서 대학생들의 인문사회과학서적 기피가 한 이유라고 보고 이를 중심으로 한국 대학생의 빈약한 사회의식을 이번 졸고를 통해서 점검해보고자 한다.

토익, 토플 그런데 인문사회과학 책은?

개강 직후 동국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학부모에게 보내는 단체편지를 보냈다. "우리 대학은 수년 전부터 소리 없는 개혁을 시행해 오고 있습니다. … 도서관의 불빛은 24시간 꺼지지 않고 있습니다." 솔직히 깨놓고 말하자. 과연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빛 아래서 학생들이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토익, 토플 교재 혹은 공무원 시험 대비 문제집이 아니던가. "소리 없는 개혁"의 실상은 신자유주의를 신조로 한 자본의 전략과 침투를 당한 대학을 만드는 "소리 없는 반동", 즉,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신자유주의 기획(project)이 인문사회과학을 쓸모없는 학문으로 만드는 학풍(?)을 대학에 투사(project)시킨 결과다. 

24시간 꺼지지 않는다는 도서관에 어학 부문 서가를 찾아봤는데 처참하다. '공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도서관에 이를 이용하는 학생들은 마치 비치된 도서를 자신의 '사유물'로 착각하였는지 토익, 토플 문제집들은 연필, 볼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실로 폐품 한 수레로 가득 차 있었다. 멀쩡한 문제집을 찾아보려 했으나, 양심은 도망갔고, 이기주의만이 도서관의 대기를 가득 채울 뿐이다.     

반면에 이러한 이기주의를 떨치고 가족을 넘어서 사회를 생각하고, 연대를 고민케 하는 인문사회과학 관련 서적들은 손때 없이 상태가 좋다. 필자가 보통 졸고나 논문을 쓸 때 참고문헌을 빌리면 몇 년 전에 발간된 책인데도 불구하고 먼지만 쌓였을 뿐 대출 한번 안한 '새책'인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정치관련 서적의 경우에는 정치외교학과 학생들의 독서 수준을 대략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강의와 관련된 책이 아니라면 자발적으로 독서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본다.

<당대비평>, <아웃사이더>, <인물과사상> 등 그나마 대학생들이 쉽게 읽을 만한 사회계간지조차도 최근 잇따른 폐간소식이 들려오는 것은 대중문화를 한껏 향유하는 데는 과감한 씀씀이를 보이면서 일 년에 네 번, 권당 만원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는 핑계는 곧, 대학생들의 지적게으름으로 귀결된다. 

월드컵에 관한 정보력, 대추리 사태와 FTA에 대해서는 반비례

얼마 전 기자는 <한겨레>에 "진작부터 타오른 이번 독일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시민들은 내전을 방불케 한 대추리 사태와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는 매정하리만치 싸늘하게 눈을 감고 있다. 시민사회는 언제부턴가 26돌을 맞은 5·18 광주민주화항쟁 기념식처럼 '끝나버린 내전'으로 다시는 우리에게 오지 않을 '기념식'으로만 기억하며 현재진행형인 내전을 인식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 나는 이러한 역사적 무감각이야말로 두렵다"며 '87년 체제의 위기'를 경고했었지만 87년 6월 항쟁을 경험한 8, 90년대 학번의 비판에 앞서서 항쟁을 경험하지 못한 앞으로 10년, 20년 그 이후의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N세대 학번들의 사회적 무관심이야말로 실로 두렵다.

필자는 이들 N세대들이 월드컵에서 유럽의 어떤 선수가 어느 리그를 뛰고 있다든가, 연봉이 어느 정도인 지를 술술 꿰는 정보력에 한번 놀라고, 더불어 대추리 사태의 이면을 꿰고 있기는커녕 포털매체와 보수언론의 왜곡된 피상적 보도만을 접하고서 덩달아 대추리 주민을 비난하는 태도에서 더 큰 놀라움을 겪었다. 이러한 역사적 무감각에 대한 몇 가지 일화를 더 살펴보자. 

사례 1 : 오늘날 대학생에게 4·19혁명 기념일은 소풍가는 날?

4·19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대학에서는 의례 4·19혁명 기념 등반대회를 어김없이 개최한다. 그런데 이 혁명의 의미를 요즘 학생들에게는 심히 퇴색되었음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얼마 전 정치외교학과의 강의실에 붙어있는 한 대자보에는 정치외교학과가 4·19혁명 기념일 등반대회에 참여할 것인가 아니면 그 날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을 갈 것인가를 두고서  '아주 민주적인 방법'인 투표를 거쳐서 압도적인 득표결과로 '소풍'을 가게 되었다고 떳떳하게 씌어져 있었다. 민주적인 절차를 이용했으니 비난하기도 뭣하지만 나는 왜 부끄러움을 느꼈을까.

꽃도 피고 날씨도 화창하고 소풍가는 건 자유다. 그런데 막연하게 추측해서 사회에 대한 고민이 가장 절실할 것으로 예상되는 정치외교학과 학생들이 다른 날도 아니고 4·19 혁명 기념 등반 대신에 '소풍'을 간다는 발상은 사회과학도로서의 존재의식에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4·19혁명의 의미를 훼손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개념 없는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학교측도 이럴 바에는 휴강을 하면서까지 산에 올라갈 게 아니라 차라리 강의를 하는 것이 낫겠다. 민주화 선열을 생각하면 참으로 무지 아니 무식해 보이는 처사다.     

사례 2: 강정구 교수의 썰렁한 천막강의와 이명박 시장의 성공적인 강연

또한 동국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강정구 교수 사태가 전혀 진척이 없는 것은 학생들의 무관심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천막강의 이벤트의 목적은 학교측의 직위해제 철회다. 이 철회를 유도하는 가장 핵심적인 강수는 학생들의 여론인데 천막강의 현장에서 사회학과 학생들을 제외한 타 학과 학생들의 저조한 참여와 싸늘한 반응을 보건데 과연 학생들에게 '여론'이란 단어조차라도 머릿속에 남아있는지 의문이 든다.

토익과 토플 문제집으로 머리를 싸매며 졸업해서 먹고살기 힘들다는 건 공감하지만 그래서 학교 안에 돌아가는 모순에 대하여 맹점을 형성하는 핑계로 둘러댈 수는 없다. 보수단체회원들의 방해로 천막강의가 무산되었다는 것은 다분히 핑계였다. 만약 교내 재학생 수 천 명 중에서 단 백 명만이라도 본교가 '학문의 전당', '진리의 수호자'라는 대학의 존재를 망각하는 자살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상기했더라면 아니 '구경삼아'서라도 모였다면 몇몇 안 되는 보수단체회원들의 깽판 때문에 강의가 쉽게 무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 천막강의 일정이었던 열린우리당 임종인 의원의 천막강의 당일 같은 시각, 이명박 서울시장의 강연을 보려고 중강당을 가득 메워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당혹을 넘어 절망감에 휩싸였다.

사례 3: 빨갱이 교수에 엄단을 친일파에게는 부드러운 이중 잣대를

얼마 전 동국대에서는 친일행위와 군사정권을 찬양한 미당 서정주의 백주년을 기념하는 시 발표회를 가졌고 또한 중앙도서관에는 서정주를 기리는 '미당도서'가 들어서 있으며 도서관 로비에는 개교 백주년을 기념한 동국학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부스를 만들어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생을 초대총장 권상로와 함께 등재하고 있다.

여기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고 무심히 전시부스를 둘러볼 뿐이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화는 한 강의에서 권상로가 노골적인 친일파였다는 사실과 그의 이름조차도 사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당시에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제도권을 벗어난 얄팍한 친일파 관련 역사서적 한 권만이라도 읽었더라면 충분히 이러한 사태에 대한 '문제화(Problematisierung)'를 시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는 교수에 대해서 한없이 엄혹한 조치를 취하면서 친일파에 대해서는 부드러운 학교의 이중 잣대는 이러한 부조리를 보지 못하고 비판하지 못하는 학생들의 무지에 기인함도 크리라.

우선은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벗해야

진중권은 이러한 대학생들의 무관심에 대해서 "일반 학생들이 사회문제 자체에 관심 없는 것이 아니라 담론이 낡아서 접근이 안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학생운동은 활자매체적이고 사회는 정보화 사회다. 학생운동이 낡았다는 느낌은 여기서 온다. 따라서 다른 담론들을 갖고 다가가야 할 것이다. 물론 운동에 관심을 갖는 것은 좋다. 정치적 사회적인 것은 남아있되 패러다임 자체는 바꿔야 한다. 담론들을 업데이트해서 사회문제에 접근해야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디어 이론가 빌렘 플루셔가 말했듯이 "피상성"이 특징인 정보화 사회의 매체들을 통해서 무지한 대학생들이 유식해진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매체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대학생들의 지적 게으름에 대해서 면죄부를 부여할 뿐 핵심을 벗어난다.

오히려 홍세화의 말대로 "한국의 수많은 사회구성원들이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형성하고도 그 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의식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부디 젊은 벗은 이 폐쇄회로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다시금 인문사회과학 책을 벗하길 강조합니다"는 발언이 적실하다.

한국사회에서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존재가 의식을 배반하지 않으려는 존재론적인 체험이다. 토익과 공무원 문제집 등의 시험이 아니라 좁게는 자신의 교양을 넓게는 이 한국사회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또 그 자신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혹은 역류를 시도할 수 없는지를 자각하기 위한 나침반임을 알아야 한다.

한줌의 지식, 사회참여로 정초되어야

물론 이러한 책읽기는 고작해야 한국사회 갈등의 수많은 매듭 중 하나를 푸는 시작일 뿐 학생들의 손에 사회과학서적이 들렸다고 해서 당장 한국사회가 눈부신 진보를 경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겠다. 원론적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이러한 한줌의 지식을 정초삼아 연계망적 지식(cross-linked knowledge)의 구성이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가령 기성정당이 '청년당원'에 대해서 선거기간에만 반짝 동원목적으로 이용하기 혹은 대외적 홍보차원에서 정당 민주주의를 실현했다는 징표로서 통계수치를 채워주는 '페이퍼 당원'이 아니라 '한줌의 지식'을 토대로 삼아 선거기간을 넘어서 일상적으로 젠더, 생태, 정치, 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의사소통이 뒤따라야 한다.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는 이러한 한줌의 지식과 의사소통과의 선순환 모델에 있어서 의사소통의 트래픽을 확장시켜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안수찬이 지적했듯이 진보정치연구소가 "민주노동당에 비판적인 지식인까지 아우를 만한 조직적ㆍ물적 토대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파로 대표되는 당내 주류와의 긴장이 이 연구소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를 해결하거나 아예 이를 초탈"하는 거부터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안수찬, 「2006년 진보, 세 가지 딜레마」,『월간 인물과 사상』 6월호, 183쪽) 

이러한 의사소통의 강조에 대해서 료따르, 푸코 등 포스트모던의 세례를 받은 혹자들은 '계몽의 낡은 전략'으로 비하하지만 그 데카당스적 비난 이후에 명확한 대안이 있는가. 한미 FTA 협상, 대추리 사태, KTX 여승무원 파업 등의 굵직한 사회현안들은 체계의 생활세계 포섭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체계의 대표적 이론가인 파슨스는 생활세계를 체계의 변두리로 쫓아내어 "환경"이라 부르며 폄하했다. 이러한 체계의 강권과 포섭에 대해서 생활세계의 활성화 밖에는 마땅한 대안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면 민중들이 광화문, 시청 광장에서 각자 하나의 촛불이 밝혀지고 그 불빛들이 모여 연대의 별자리를 구축하듯이 이들이 집, 회사, 학교 또는 길거리에서 월드컵 16강의 가능성을 점쳐보는 대화 외에도 다른 범주의 의사소통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확언하건데 인문사회과학서적을 거름으로 삼은 한국 대학생들의 지적토대(Grund)의 재건은 한국사회가 무한계적인 경쟁신화를 조성하는 신자유주의가 바라는 인간상(像)인 탈정치화, 냉소적 사회 무관심, 보수화의 나락(Abgrund)으로 추락하는 것을 적어도 지연시킬 수 있음에서 선차성을 부여받는다. 
 
*본 기사는 민주노동당 정책이론지 <이론과실천> 7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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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7/13 [00:0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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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리 2006/07/15 [09:26] 수정 | 삭제
  • 저도 80년대 학번인데요. 무엇보다 말입니다,
    이 시대 학생들과 그전 세대와 다른 점은 대학생이 엘리트적 신분의 아니란 것입니다.
    그때는 대학졸업이라는 학력이 명백히 기득권이있던 시대였고,
    학생들은 사회정의를 위해서 자신의 그 사회경제적 지위를 희생하겠다는 결단을 했죠.
    그런데 지금 대학졸업장은 그저 또 하나의 증명서일 뿐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로서의 의식이 지금 학생들에겐 없는 거죠.
    대학의 하나의 대중문화입니다.
    지금 대학생들은 지식인이 아닌 대중이라고 보아야 하고 이들에게 어필할 때는 아카데미즘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아이콘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게다가 지금 학생뿐 아니라 사회전체가 보수화되어가는 것에는 지난 민주화운동 세력이 분명 책임이 있죠!
    정치민주화로서 과거 민주화 세력이 새로운 권력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이들이 권력을 얻은 다음에 필연적으로 이루어야 할 경제민주화, 그렇게도 부르짖었던 민중의 생존권 보장! 이거 완전 개무시한 죄 말입니다.
    혹은 하고 싶어도 할 능력이 없는 죄 말입니다.
    그러고도 권력을 쥐고 앉아서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죄 말입니다.
    이렇게 보면 과거의 민주화세력, 지금의 386정치권력의 진정한 철학은 지금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의 뿌리인 미국식 자유주의! 그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양극화와 생존의 불안정이라는 20년 민주정부의 사회경제적 실패 아래에서, 학생들이 지향하는 것이 군부독재도 민주화투쟁의 전력도 아니라는 것은, 차라리 당연한 현상입니다.

    심각한 양극화와 치열한 신자유주의 하에서의 경쟁을 잊고 벗어나 두루 하나되는 일은 다른 국가와의 경쟁, 국제경기 외에 이들 학생에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라는 경멸을 듣지 않으려면,
    젊은이들에게 아니 한국이라는 공동체에 사회경제적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급하죠. 권력교체가 아닌 진정한 민주사회에 대한 비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