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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사기> 유협열전을 지은 깊은 뜻은?
[책동네] 박홍규의 <의적, 정의를 훔치다: 박홍규의 세계 의적 이야기>
 
황진태   기사입력  2006/05/25 [20:22]
나는 '재미'가 없다면 무슨 공부든 하기 싫어하는 성미다. 근래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다시 읽고 있는데 여기서도 재미를 기준삼아 <사기>의 백미인 마지막 장 열전부터 거꾸로 읽고 있다. 열전 중에서도 가장 재밌게 읽은 부분이 바로 유협열전(遊俠烈傳)이다. 쉽게 내용을 간추리면 사람을 곤경에서 구해 주고 탐관오리들을 벌하는 협객들의 이야기인데 나는 어렸을 적에 쾌걸 조로나 로빈 후드와 같은 영화, 만화를 보면서 자라온 세대라서인지 몰라도 아직도 협객, 의적이란 단어를 들으면 가슴이 설레 인다.

과거 사람들도 이러한 '설레임'을 나와 같이 공유했는지 사마천 또한 군자의 덕을 지녔던 계차나 원헌을 언급하면서도 유협의 경우, "그들의 행위가 반드시 자기가 한 말은 지키고, 자기의 행동에 책임을 지며, 한 번 승낙한 일은 성의를 다해서 몸을 아끼지 않고, 남의 고난을 돌볼 뿐 자신의 생사는 아예 무시하고 만다"면서 나와 같은 설레임에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열전에 씌어진 "혁대의 고리를 훔친 자는 처형되고 나라를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는 격언도 이러한 협객들의 행동을 합리화 해준다. 사마천 또한 "때로는 그 당시의 법에 거슬리는 일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개인적인 의리에 있어서는 청렴결백하고 겸양하여 칭찬하기에 충분하다"고 옹호했다.

이러한 의적에 대한 옹호는 (의적에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애매하지만) 최근까지 도벽을 버리지 못하고 수갑신세를 졌던 왕년의 대도 조세형을 통해서도 투사되는데 그의 활약상(?)에 묘한 쾌감을 느꼈던 오늘날 대중의 심리는 의적들이 "법에 거슬리는 일"보다 훔친 재산의 주인인 상류계층의 도덕적 해이와 화이트 범죄에 대한 더 큰 반감이리라. 최근에 개봉했던 유전무죄무전유죄(有錢無罪,無錢有罪)로 유명한 지강헌을 소재로 한 영화 <홀리데이> 또한 이러한 대중의 심리가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하는 산물이 아닐까.

어쨌든 80년대 운동권 용어를 빌려서 폭력강도에 대한 '기울기의 기울기' 측면에서 열전에서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 곽해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의로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에 나는 불편하다. 물론 곽해가 루만이 주장한 합법적인 행정체계가 아닌 사적판단에 기대어 사람을 죽인 것에 대해서까지 옹호를 할 수 없겠지만, 그 시대에 그 체계가 베버가 말한 합리적 관료제가 아닌 곽해가 사람을 죽이는 수준의 전근대적 사적판단에 근거했음에 비춰볼 때 메를로 퐁티가 공산주의에 대해서 송두율이 북한에 대해서 사용했던 내재적 방법론이 선차성을 부여받고 곽해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유협열전을 읽기 전에 최근 발간된 영남대 법학과 교수 박홍규가 펴낸 <의적, 정의를 훔치다 : 박홍규의 세계 의적 이야기>를 읽어보면 내가 앞서 말했던 의적에 대한 옹호감은 '세계공통성'을 띠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민중의 관점에서는 정의구현보다는 다음과 같은 박 교수의 말이 협객, 의적의 존재성을 탄탄하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의적은 불의를 바로잡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복수를 하는 사람, 완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는 정의의 대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자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유가나 묵가의 학(學)을 하는 자는 모두 그들을 배척해서 책이나 글에는 올리지 않는다"면서 자신의 <사기>에 유협열전을 적시해놓은 것도 당시 지도층과 더불어 후세에도 가난하고 약한 자에 대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글을 마무리하면서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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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5/25 [20:2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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