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민주화운동의 기수에서 개밥의 도토리로
'노동자의 벗'을 자임한 노무현, 더이상 노동자의 벗이 아니다
 
이장춘   기사입력  2003/01/28 [15:49]
애초부터 노동자가 '개밥의 도토리'는 아니었다. 개밥의 도토리이기는 커녕 오히려 민주화운동, 사회발전의 주력부대라는 당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70년, 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 반독재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 가치를 의미했다. 보수야당, 학생, 시민단체, 일반지식인 할 것 없이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를 떠나서 독재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바로 선이자 정의였다. 그러나 철저히 병영화된 사회적 통제체제 내에서 정의는 뒷골목의 은밀한 속삭임에 불과했다. 모두가 숨죽이며 진실을 알고도 눈 감아야 했었고 민주화운동은 그 자체로 망망대해에 둘러싸인 외로운 섬이었다.

집단화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은 독재권력의 경제적 기반이자 관치금융에 기생하던 천민자본과 독재권력을 물리적으로 지탱하던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사회통제기제를 위협하는 간접적 도발 행위였다. 그러하기에 독재권력은 구사대에 공안기관들을 동원해서 그를 지독히도 짓밟으려고 하였고, 거꾸로 반독재세력들은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민주화운동의 반열에 주저없이 올려 놓았다.

그러하기에 70년대 말을 장식했던 YH, 동일방직, 80년대 원풍모방, 대우어패럴 등 굵직굵직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재야운동은 물론 보수야당까지 그것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했다. 현장활동이라 하여 사회운동 세력들은 직접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노동자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하며 생존권투쟁과 반독재투쟁을 동시에 수행하기도 하였다. 일명 위장취업이 바로 그것이었다.  

87년 군사독재정권이 패배하고 자유주의세력이 권력을 서서히 장악해 나가면서 불길한 조짐들이 점차 현실화 되었다. 6.10 항쟁에 이어 터진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자유주의 세력들로부터 지나친 사회불안은 군부세력을 자극한다며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야당 총재시절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누구보다도 앞장서 옹호했던 보수적 자유주의자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국가이익에 반하는 집단 이기주의'를 엄히 다스리겠다거나,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산업평화 정착과 임금안정이 선행돼야 한다"며 "지난 수년간 되풀이 되어온 고임금 고물가의 악순환을 단절해야 한다"며 노동자들을 코너에 몰기 바빴다. 96년말에는 <고용안정법>이라는 노동악법을 날치기 처리하려다 노동자들의 대대적인 저항에 직면에 철회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한다.

역시 '대중참여경제론'이라는 저서를 통해 사민주의에 가까운 발상을 보여 주었던 개혁적 자유주의자 김대중씨 또한 대통령이 되자 노동자들에 대해 냉정한 얼굴로 돌아선다. 고통분담을 믿었던 노동자들에게 일방적 희생이 강요되었다. 기업부실의 책임은 노동자들의 '도덕적 해이' 탓으로 전가되었고, 생존권 투쟁은 이제 집단이기주의로 격하되었으며, 법에 따른 엄한 처벌만이 되풀이 되었다. 롯데호텔에서는 임신 여성노동자의 복부에 경찰의 발길질이 가해졌고, 정당하게 노조사무실을 들어가겠다던 대우자동차 노조원들을 곤봉으로 피범벅을 만드는 경찰의 만행이 대낮에 버젓이 자행되었다.

물리적 진압도 부족해 형사, 민사 모든 법적 제재수단이 노동자들에게 가해지고 구속자는 김영삼 정권의 1.5배를 넘어섰고, 가진 것 없는 노동자들에게 2,000억원이 넘는 손해배상 처분이 가해졌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권대통령의 평화와 인권은 노동자들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그 정권의 끝 무렵 전태일의 비극은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개혁적 자유주의자 노무현 새 정부가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80년 후반 '노동자의 벗'을 자임하며 노동투쟁의 현장이면 어김없이 나타나 노동자들을 옹호하던 노무현, 노동자들은 민주당 국민경선과정에서 울산에서 1위 당선을 통해, 그리고 대선에서 또한 대대적인 지지를 통해 그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노무현의 마음은 이미 노동자로부터 떠나 있었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정치세력화가 우려된단다. 경제투쟁은 괜찮지만 정치투쟁은 안 된다던 독재자들의 목소리와 닮지 않았는가? 정규직 해고가 어려워 비정규직이 많단다. IMF 체제이후 비정규직 양산은 노동시장 유연화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재벌들의 노동조건 하향평준화를 추구하는 발상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지 않는가? 외자도입을 위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철저히 제한하는 경제자유특구법을 적극 옹호한다. 외국자본에 특혜를 주고 대신 노동자들은 희생시키는 이런 수법이 박정희식 경제발전 방식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70년, 80년대 자유주의 세력들은 노동자들을 위시한 진보진영과 동지적 관계로 독재정권에 저항하였다. 그럼으로써 노동자는 결코 개밥의 도토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그들의 손에 권력이 쥐어지고 마침내 그들이 주류, 기득권 세력으로 편입되면서 세상은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동자와 연대하는 힘겨운 사회변화의 길 대신 재벌, 외국자본과 타협하는 손쉬운 길을 선택하였다. 그럼으로써 기성의 질서에 도전하는 대신 그 속에 녹아 들어가게 되었다.

이제, 동지는 없다. 노동자, 진보세력에겐 오로지 스스로를 지킬 자기 자신 외에는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사회에서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되었다.

* 본문은 진보웹진 진보누리 http://jinbonuri.com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본문에 대한 반론을 환영합니다 / 편집자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3/01/28 [15:49]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