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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3상회의의 진실 속에 숨은 미국
[우리역사 속의 미국이야기 1] 유엔의 남한 단독선거결정과 분단의 시작
 
박제민   기사입력  2006/03/23 [12:24]
연재를 시작하며

우리나라와 미국의 관계를 논하려 한다면 직면하게 되는 장애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중 가장 큰 장애물은 친미수구세력의 '색깔시비'입니다.

강정구 교수와 같은 양심적 지식인의 과학적 논문마저도 몇 마디 욕설과 그에 뒤이은 빨간페인트 칠하기로 간단히 무시당하는 오늘의 현실은 우리사회에서 '미국'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인식시켜줍니다. 이들에게는 과학적 논리도 무용지물이고, 역사적 사실도 모두 휴짓장이 됩니다.

미국에 대해 논하자면 국가보안법이라는 또 다른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이 국가보안법은 논리적인 '법'의 형태로 비논리적 판단을 강요합니다. 이 국가보안법 앞에서는 예속적 한미관계를 증명하는 역사적 사실들은 '이적'으로 둔갑되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마지막 장애물이 있다면 민족의 이익을 중심에 두고 예속적인 한미관계의 역사적 사실을 알리려는 필자와 같은 젊은이들의 '얄팍한 역사인식'과 '부족한 소명의식'일 것입니다.

훌륭한 역사학자들과 교수님들의 저명한 문헌에 비해 보잘 것 없고 그 '짜깁기'에 불과하지만 '우리역사 속의 미국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이유는 젊은 세대로써 민족의 이익을 고수하는 소명의식이 부족했음을 솔직히 인정하기 위함이고 얄팍한 역사인식을 부단한 학습으로 메워 나가기 위함입니다.

이 두 과정의 결과로 '우리역사 속의 미국이야기'를 써나갈 예정이며 작게나마 젊은 세대들의 역사인식에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예속적인 한미관계의 역사적 사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하여 친미수구세력의 색깔시비에도 굴하지 않고, 국가보안법의 강요를 무너뜨리며 올바른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을 세웠으면 합니다.


민족분단의 비극

세계에서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온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약소국들은 식민지로 전락하거나 큰 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말과 글, 심지어 혈통마저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강토와 민족성을 지켜왔다. 우리민족의 우수성은 5천년 유구한 역사의 위대함이며 말과 글, 문화의 우수성이자 오늘날 자주적으로 살아가려는 자주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민족은 이러한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마지막 분단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한은 미국의 신자유주의정책과 예속적 동맹체제 아래에서 신음하고 있으며 북한 역시 미국의 적대정책의 표적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비극적 현실은 모두 민족의 분단에서 비롯된 일이다.

민족이 분단되지 않았다면 마지막 분단국가의 오명을 쓸 일도 없었을 것이고 분단을 기회로 한반도 이남에 군대를 주둔시켜 자국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를 관철시켜온 미국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미국의 예속정책이 없었다면 오늘날 남한이 예속적 한미동맹에 갇혀 신음하는 일 따위도 없었을 것이며 미군 궤도차량에 깔려 숨진 효순, 미선의 억울한 죽음도 없었으리라.

역사학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에는 만약이라는 단어는 없다'고 한다. 이미 흘러버린 역사인 만큼 '만약'은 공염불,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내려는 많은 이들에게는 이 '만약'은 현실을 투영하는 거울이 된다. 즉 현실을 개척하는 역사의 교훈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이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민족분단의 과거사에 대한 이해를 올곧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 사진은 48년 당시 평양에서 열린 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한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김구 선생이 보인다     © 사진으로 보는 남북관계 50년사 제공

민족분단의 원인

많은 이들은 우리나라의 분단이 남북사이에 이념적 대립으로 발생한 것으로 배웠으며 또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이는 해방 후 남북한에서 활동한 정치세력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남한에서는 김구, 김규식과 같은 민족주의 좌파세력, 이승만과 같은 민족주의 우파세력, 한민당과 같은 사대극우세력이 주요 정치활동세력이었던 것에 반해 북한에서는 항일빨치산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세력, 조선독립동맹으로 대표되는 또 다른 공산주의세력 등 공산주의운동계열이 주요 정치활동세력이었다.

남북사이 이념차이는 분단의 원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남북 정치지도자들은 민족통일을 위해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를 통해 민족통일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에 이념이 다른 정치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이 민족분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억지주장에 불과하다.

오히려 남한과 북한에서는 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좌우익이 연합을 실현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1949년)이 탄생했고 남북의 좌우익을 가리지 않고 정당, 단체, 인사들을 포괄한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연석회의'(1948년)가 개최되어 '미소양국 군대의 즉시 철수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전체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이 채택되기까지 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민족이 해방됨과 동시에 남과 북에서는 1945년 10월 현재, 전국 13개 도, 21개 시, 215개 군에 자생적 정권기관인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이 인민위원회는 좌익과 우익이 공동으로 세워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념대립이 민족분단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는 논리를 간단히 부정하게 만들며 오히려 민족의 이익을 위해 단합하고 단결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고>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중 조선관련 내용
 
첫째, 조선 내 각 계층의 모든 민주세력이 참여하는 임시 조선 민주주의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임시정부와의 협의 하에 최고 5년간의 4개국(미, 소, 중, 영)에 의한 후견제 실시여부를 결정할 것.

셋째. 후견 기간에는 전적으로 조선인이 임시정부를 통해 스스로 통치할 수 있게 할 것.

넷째, 조선문제 해결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설립하고 조속히 논의할 것

그렇다면 우리민족이 분단의 길로 접어들게 된 직접적 계기는 무엇인가?

조선의 건국문제가 조선의 내정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민족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희망했다는 점에서 독립국가건설은 우리민족의 몫임과 동시에 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문제이기도 했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임으로 국제적 관례상 일본이 강점하고 있던 조선에 대한 '처리문제', 즉 조선의 건국문제(조선문제)는 국제사회의 의제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조선문제는 우리민족의 몫이었음으로 모스크바 3상 회의는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염원을 보장한 기초 위에 조선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협의되었음은 물론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르자면 조선은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스스로 통치'해 나가면 되었다. 이것은 새 조국건설을 염원하던 조선민중의 염원에 부합하는 조치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은 합의당사자였던 미국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미국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무시하고 유엔에 조선문제를 상정해 버린 것이다.

일사천리로 남한단독선거를 추진한 미국

유엔에 조선문제를 상정한 미국은 더 이상 모스크바 3상회의에 얽매이지 않고 일사천리로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준비해 나갔다.

1947년 9월 23일, 유엔 총회 제2차 대회에서 조선문제를 유엔의 의제로 삼는 결의를 통과시킨 미국은 같은 해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진행된 유엔총회 제 1위원회(또는 정치위원회)에서 조선문제를 논의에 붙이기 시작했다.

이어 11월 14일에는 조선에서 실시될 선거를 관리하는 권한을 갖는 이른바 '유엔조선위원단'을 자신의 영향 하에 있던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국민당 하의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등으로 구성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이듬해인 1948년 2월 26일, 의결권한도 없는 유엔 소총회라는 것을 소집하여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의결시켰다.

미국은 왜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끌고 갔나

미국이 조선문제를 조선민중의 열망을 무시하고, 또 국제적 합의를 깨면서까지 유엔으로 끌고 간 것은 새롭게 건설될 조선의 정부를 자신을 추종하는 예속동맹정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조선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통치하게끔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은 애초에 미국의 입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미국은 이를 반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은 조선의 건국을 지원하기 위해 5년 동안 탁치(탁치라는 용어 대신 후견이라는 말이 쓰이기도 했다, 글쓴이 주)를 하되 조선의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이 탁치문제를 그들과 상의하여 가부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왜곡되어 마치 소련이 탁치를 주장하고 미국이 반대했다는 식으로 보도된 것이다. 오히려 미국이 모스크바 3상회의 협의당시 '30년 동안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는 것이 오늘날 밝혀진 사실이다.

미국이 주장한 30년 동안 신탁통치는 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것이었기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3상회의 결정사항대로 조선에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면 당시 남한에 있던 미국판 총독부 '미군정청'은 해체해야 했으며 주한미군도 철수해야 했다. 이는 더 이상 미국이 남한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 조선문제를 아무 권한도 없는 유엔에 끌고 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한 것은 미국이었다.     © 사진으로 보는 남북관계 50년사 제공

결국 미국언론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대해 마치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였고 조선에 찬탁반탁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같은 논쟁을 발판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깨버렸다.

미국에게는 자주독립국이자 통일독립국인 '조선'보다 공산주의 소련을 막는 정치군사적 방패막이자 자국의 하청경제가 되어줄 '남한'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날 남한과 미국의 예속적 동맹관계와 경제적 예속관계는 이렇게 탄생된 것이다.

조선문제, 유엔은 아무런 자격도 없었다

다시 유엔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당시 유엔은 조선문제를 논할 자격이 있었는가? 여기서 자격이란 정치적 자격과 법적 자격을 의미한다.

유엔(UN, 국제연합)은 1945년 10월에 창설되었음으로 1945년 8월에 종결된 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한을 갖고 있지 못했다. 더욱이 2차 세계대전의 전후보상문제, 전후식민지처리문제 등은 모두 교전당사국간의 정치회담 및 강화조약을 통해서 종결되는 것이 원칙이었음으로 유엔에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건국문제를 논할 자격은 더더욱 없었다.

또한 당시 유엔은 오늘날의 유엔과는 다르게 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사실상 미국의 '동맹국포럼'이나 다름없었음으로 정치적으로도 조선문제를 논할 자격이 없었다. 1948년 2월 26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결정한 유엔의 소총회라는 곳은 의결권한도 없는 기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조선문제를 미국의 요구대로 결정해 버렸고 미국판 총독부였던 남한 미군정청은 이 단독선거를 총칼을 앞세워 집행시켰다.

총칼로 무장한 미군정청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여 봉기한 조선민중을 유혈탄압하여 십 수만에 다다르는 사상자를 냈다. 이것이 바로 2·7 구국투쟁과 제주 4·3항쟁이다.

미국의 뜻대로 진행된 남한단독선거는 민족의 정치적, 제도적 분단을 가져왔으며 민족분단, 그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 글쓴이는 한국민권연구소 (www.minkwon.org) 상임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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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3/23 [12:2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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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쎼요 2007/05/27 [03:34] 수정 | 삭제
  • 언뜻 보기엔 상당히 균형 잡힌 시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많이 위험한 내용을 내포한 글입니다. 유엔이 한국에 대한 아무런 결정도 할 수 없는 기구라는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네요 대체 미국, 소련, 영국의 세나라 외상(외무 장관)들이 무슨 권한으로 한 나라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었으며 또 그걸 그리 옹호하는 글쓴이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절차의 중요성이 아니라 그 회담의 결과물의 내용에 따라서 정당성을 역으로 부여하는 궤변이 아닐런지? 2차 대전 승전국들만의 잔치를 정당화하고 기구의 성격이야 어쨋든 국제연합으로의 상정을 무슨 불법적인 일이라도 한 양 이야기하는 합리화의 기저는 무엇인지요?
  • 늘꽃사랑 2006/03/24 [17:47] 수정 | 삭제
  • 공감가는 애기입니다.
    현재의 진보세력 좌파세력이라고 여겨지는 김구선생님이나 장준하선생님, 함석헌선생님도 지금기준으로 본다면 당시 보수우파의 면면이 강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땅에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주의자가 없어진 지금 뭐 같지도 않는 작자들이 보수주의자라고 우겨대니 역사의 아이러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