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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전태일을 지하에서 통곡하게 만들다니
[민주노동당의 힘] 전태일과 경제특구법ba.info/css.html'>
 
이장규   기사입력  2002/11/25 [20:14]
{IMAGE1_LEFT} 누구나 자기 가슴속에 남는 책 한 권쯤은 있을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책은 바로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이다. 20대 초반 그 뜨거웠던 시절에, 복사물 형태로 나돌던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나는 그 동안의 숱한 고민을 접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결정하게 되었다. 비록 전태일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아름다운 이들의 노력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며 살아가는 것이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가 될 것이라는 그 때의 다짐에 얼마나 부합되게 살아왔는지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앞서지만, 지금도 나에게 전태일 평전은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고 눈시울을 붉히는 그런 책이다.

  전태일 32주기 하루 뒤인 지난 11월 14일, 뒤늦게 어제가 전태일이 죽은 날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손때묻은 전태일 평전을 다시 꺼내들고 읽고 있을 때 나는 뉴스에서 어처구니없는 소식을 들었다. 정치개혁이나 반부패입법 등 국민이 진정으로 바라는 법안은 다 제껴두고, 이른바 경제특구에 대한 법률만이 여야합의로 국회에서 통과되었다는 것이다.

  민변이 제출한 법률적 의견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경제특구법은 '우리나라 정부가 제출한 법안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식민법률, 위헌법률'이다. 외국인 투자 유치라는 명목하에 무려 50개가 넘는 법률들이 경제특구법 이 한가지로 간단히 무시된다. 소득세, 법인세, 재산세 등 각종 세금을 감면해 주는 것은 그렇다고 치자. 경제특구에 들어오는 외국인 기업은 환경오염을 규제하기 위한 각종 환경관련법안 34가지를 무시해도 된다. 환경개선분담금, 교통유발분담금, 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 등 10개가 넘는 각종 분담금이 대폭 감면된다.

  장애인과 노령자에 대한 의무고용비율도 전혀 지키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경제특구 내에서는 외국인이 학교 및 병원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할 뿐 아니라 이 학교에는 내국인도 입학할 수 있다. 즉, 초일류 학교와 초일류 병원의 설립을 인정함으로써 고교평준화와 의료시장개방이라는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만 바꿀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 은근슬쩍 변경되고 허용되어 버린다. 대학까지도 설립할 수 있으니 외국의 학위가 주어지는 새로운 초일류대학이 생김으로써 학벌사회의 모순이 더욱 심화될 우려도 있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것은 노동관련 사항이다. '산업평화' 유지조항을 넣음으로써 단체행동권을 제약하고, 파견근로를 '전문직종'(이것의 범위도 불분명하다)까지 확대하면서 기간제한없이 연장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실상 대부분의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대체할 수 있게 된다. 이것만이 아니다.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월차와 생리휴가가 없어지고 주휴도 무급화된다 (즉, 동일한 일당 기준으로 임금의 7분의 1을 깎을 수 있는 것이다. 월차나 생리휴가가 없어지는 것까지 포함하면 거의 20% 정도의 임금삭감 효과이다). 이렇게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아도 괜찮도록 한 것이야말로 이 법안 최대의 독소조항이다. 근로기준법은 근로에 대한 최저기준으로서 모든 노동자들에게 합법적으로 보장된 최소한의 권리임에도, 경제특구에 고용되었다는 이유로 이런 최저기준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은 헌법상의 평등권을 침해한 명백한 위헌조항이다. 법대로라면 경제특구 내의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는 32년 전의 전태일 열사의 절규를 다시 외쳐야 할 판이다.

{IMAGE2_RIGHT}  그래도 외국인 투자유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허구이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기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그들 중 95%는 경제특구에 들어갈 의사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 법에서 규정한 외국인투자기업의 기준은 외국인의 지분이 10% 이상만 되면 된다. 그렇다면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진짜 외국인 기업은 본보기로 몇 개 들어올 뿐, 실제로는 형식적인 외국인 지분만 갖춘 국내기업들이 온갖 특혜를 바라고 거기에 입주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 법에 따르면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업종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한 중소기업보호법의 규정도 무시되므로, 재벌들이 신규업종에 진출하려 할 때 대단히 유용하다. 또한 입주하지 못한 기업들로부터 이른바 '역차별' 문제가 제기되면서 이런 특혜들은 다른 지역으로까지 점차 확대될 것이다. 실제로 국회는 이 법의 적용지역을 대폭 확대하려고 시도했다. 결국 이 법은 외국인 투자확대 효과는 그리 크지도 않으면서 (외국인 지분만 갖춘) 국내기업을 위해 수십 가지가 넘는 특혜를 부여하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며, 국내기업들의 신규투자가 여기에 집중됨으로써 다른 지역은 오히려 신규투자가 대폭 줄어들어 성장기반을 붕괴시킬 위험성까지 존재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법률이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대선으로 쏠린 틈을 타서 여야합의로 슬그머니 통과되어 버렸거니와, 친기업적인 한나라당과 이회창 후보는 말할 것도 없고 소위 '개혁적'이라는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조차 대권경쟁에만 몰두해 있을 뿐 여기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이 없다. 게다가 이른바 '개혁적'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일부 언론들조차 법안통과사실만 보도했을 뿐 이 법안의 내용과 문제점에 대한 어떤 지적도 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근로기준법도 언제든지 무시할 수 있다는 위헌적 법률에 대해 그 어떤 문제제기도 없는 이따위 나라 -- 죽은 전태일이 지하에서 다시 통곡할 일이다.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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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11/25 [20:1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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