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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문화대혁명 '사인방' 요문원, 서거했다
지난해 말 서거, 중국보도통제로 발표안돼, 문혁파 모두 역사속으로
 
최별   기사입력  2006/01/09 [17:39]
70년대 문화대혁명 시절 최고의 선전선동가였으며 ‘4인방’의 마지막 생존자인 요문원(姚文元, Yao Wenyuan)이 일흔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중국 언론 및 외신이 9일 일제히 보도했다. 요는 지난해 연말 12월 23일 사망했으나 중국 당국이 2주가 지난 다음에야 사망소식만 간단히 전했다고 언론은 덧붙였다. 다음은 영국 <가디언>지가 전한 그의 부고 소식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문화혁명의 4인방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요문원. 12월 23일 사망했으나 중국 당국이 2주가 지난 뒤 사망소식을 전했다.     
요는 당시 마오저뚱(모택동)과 부인 장칭(江靑)을 보위해 류소기 총서기 등 공산당의 늙은 지도부를 밀어내는데 글로써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그는 상하이의 고풍스런 빌라에 머물며 저작활동을 계속해왔다. 1965년 11월 쓴 유명한 ‘해서파관’ 서평을 쓴 곳도 여기다. 
 
이 글에서 요는 1959년 베이징시 부시장이었던 우한(Wu han)이 썼던 희곡이 마오에게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펑더후이(팽덕회, Peng Dehuai)를 해고하도록 음모론을 제기한 것이었다고 주장했었다. 당시 펑은 58년부터 시작된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을 재난이라고 비난했었다.
 
요의 서평은 모 주석 반대파들을 겨냥한 것이었고, 뜻하지 않은 일격에 놀란 공산당 지도부는 우한을 비호하려 했다. 결국 이듬해 모택동은 이를 구실로 당지도부를 상대로 '문화대혁명'이라는 전면전을 펼쳤다. 그리고 요는 모택동의 천거를 받아 문화대혁명 그룹에 합류했다.
 
모택동 “최고의 문필가”라 극찬
 
모택동이 1976년 사망하고 ‘4인방’이 체포되지 않았다면, 요는 행정 경험이 전혀 없으면서도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혁명이 실패하고 장칭의 이미지를 평가절하(지록위마,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는 모습으로) 하는 만평이 인기를 끌었다. 이 만화는 지도부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을 풍자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비판 만화에는 ‘4인방’의 2인자인 장춘교(張春橋, Zhang Chunqiao, 작년 5월 13일 사망)이 노트를 펼쳐 들고 있는 요에게 지시하는 풍자묘사도 있다. 장춘교가 “누구든 감히 사슴이라고 하면 혼내주겠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또 한명의 ‘4인방’인 王洪文(Wang Hongwen)이 곁에 호위를 서고 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혁명 뒤 나온 거의 모든 ‘4인방’ 비난 언급들은 항상 요를 문혁의 골격을 쓴 인물로 평가절하 하고 있다.
 
요가 당시 혁명을 어찌 묘사했든지, 4인방의 당시 급진적 견해는 그들을 따르던 젊은 그룹들에게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 발걸음이 너무 느리다고 받아들여졌다. 
 
요는 저장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봉자(姚蓬子, Yao Pengzi) 역시 상하이에서 좌익 문필가였고 공산당 당원이었다. 1934년 요의 부친은 첫 국공내전기간 국민당 정부에 붙들려 감옥살이를 했다. 당시 공산당에서 탈퇴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중일전쟁(37~45년)기간 공산당 문학그룹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아들 요는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기 한 해 전인 1948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필력이 없었지만 선전기구에서 활동했다. 그의 첫 기회는 1954년 찾아왔다. 당내 최고의 필력을 자랑하던 Hu Feng이 더 큰 ‘문화적 자유’를 요구했다가 마오에게 ‘반혁명’ 비난을 샀기 때문이다.
 
요는 Hu Feng을 따르던 이였지만 Hu를 비난하는 태도를 보였고, 이 때문에 상하이 공산당 기관지 편집장이었던 장춘교의 눈에 들었다. 3년 뒤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서서히 키우기 시작했던 ‘백화제방 백가쟁명-사상의자유를 허용한 운동’기간에 요는 소설가 Yao Xueyin을 비판하는 논설을 썼다. 당시 Yao Xueyin는 공산당을 너무 교조적이라고 비판했었다.
 
당내 좌파혁명 마오 사망으로 좌절
 
그러면서 요의 글은 마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베이징에서 열린 선전대회에서 상하이를 대표해 참여했고, 이 자리에서 마오의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상하이 당 선전부의 고위직을 차지했다. 그들은 당내 보수그룹 소속원들을 공격했고 수천명의 당원들은 결국 하방(下方)을 당해 인민농장 등에 가서 육체노동에 종사해야 했다.
 
마오는 부인과 함께 1965년 문화혁명을 시작했을 때 요를 최고의 선전요원으로 등용했다. 베이징으로 옮겨가기 전 상하이 당 선전부장이 됐다. 그와 장춘교는 1967년 문화혁명그룹에 당권을 획득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장춘교를 도와 상하이 당권을 획득하려는 상하이코뮨의 요구를 묵살하는 데 힘썼다.
 
그들 사인방은 결국 상하이 당권을 잡았고 1969년 제9차 전인대에서 정치국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오와 함께 새로운 권력투쟁에 돌입했다. 결국 이 투쟁에서 ‘혁명 지속’을 추구한 마오는 ‘경제 혁명’을 내세운 주은래 총리의 도움을 받은 등소평 세력을 패배시켰다.
 
이 때부터 요는 당 선전부에서 일했다. 당 기관지 ‘적기’ 편집을 주도했다. 1975년 요와 장춘교는 논평에서 ‘신 부르조아’들이 당에 스며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요는 이 글에서 중국에 계급이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화 위험이 언제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임금 불평등을 줄이고 집단소유를 늘려 부르조아를 억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1976년 1월 주은래 총리가 사망한 뒤 갈등이 시작됐다. 요는 주 총리 기념 특집판을 4면으로 내기로 한 계획을 바꿔 1면으로 줄였다. 4월 청명절 기간 장례식이 치러졌고 천안문은 주 총리에 대한 추도행렬로 가득찼다. 이들은 당이 너무 좌파 일색으로 간다고 비난했다. 당시 나왔던 시 가운데 하나는 요와 그의 그룹을 ‘늑대와 자칼’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요는 이 시에 격노해 한 논평에서 “반혁명 음모”라고 비판했다.
 
그 뒤 등소평이 일시적으로 퇴진 압력을 받았다. 문혁그룹은 승리하는 듯했으나 겉모양만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당시 군부세력과 소원하게 지냈는데 이것이 결국 마오 사망 뒤 권력투쟁에서 결정적 패인으로 작용했다.
 
정적들 “늑대와 자칼”이라 평가절하
 
마오가 사망한 뒤 그는 군부에 의해 체포됐다. 법정에서 요는 무기력하게 “범죄가 아닌 실수”를 인정했다. 그는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지병으로 일찍 출소했다. 그뒤 그는 문혁이 실패한 회고록을 내려했으나 한 때 그가 지배했던 선전부에 의해 금지당했다.
 
문화혁명은 지금도 중국에서 민감한 사안이다. 요는 12월 23일 사망했으나 당국의 정보통제로 이제야 알려졌으며 그 것도 사망소식만 간단하게 보도됐다.
* 야오원위안 [姚文元(요문원), 1931~ 2005]  약력(네이버 발췌)

 
저장성[浙江省] 출생. 좌익작가 야오펑쯔[姚蓬子]의 아들로 지식계급이다. 1948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상하이[上海]에서 잡지 《맹아(萌芽)》의 편집위원 및 《해방일보》의 주필을 역임하면서 문예비판논문을 발표하였다. 1965년 《문회보(文匯報)》에 우한[吳?]의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과 덩퉈[鄧拓]·랴오모사[廖沫沙]의 《삼가촌찰기(三家村札記)》 등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의 불길을 당겼다. 1966년 중앙문혁소조원(中央文革少組員), 1967년 상하이시(市) 혁명위원회 부주임, 1969년 제9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1973년 제10기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사후인 1976년 10월 '4인방(四人幇)'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1981년 특별법정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
 
*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인터넷저널> (www.injournal.net) 편집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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