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 실린 '여자도 군대가자'라는 '도발적' 기사를 접하며 잠시 혼란에 빠졌다. 이건 휴가철 비수기를 겨냥한 터무니없고 선정적인 기사일 뿐인가, 아니면 언젠가는 논의되어야 할 일이 닥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어떤 경우이든 '여성'과 '병역'에 대해 걸음마 단계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할 계기를 던져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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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16일자 한겨레21 제572호 “여자도 군대가자”표지 | '여성'과 '병역'의 결합은 그동안 자신들만 군대에 갔다 온 것이 억울한 남성들의 술자리 안줏감에나 머물렀을 뿐 남북 대치 상황이 지금보다 험악하던 시절에도 나온 적이 없다. 공식적으로 언급된 적이 거의 없는 이 두 낱말의 짝짓기에 나선 이들은 현재 정치권 일각과 여성계 일부이다. 여성들도 의무적으로 군복을 입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특정한 성의 집단적 푸념 수준에서 일약 공적 담론으로 그 위상이 치솟게 되었다. 여기에는 보수 정치인들과 여성계 일각의 공통된 이해관계가 떠받치고 있다. 한쪽은 탈냉전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직면한 보수 세력의 고민이 여성 징병을 통한 안보의 확대라는 명분으로 표출된 것인 반면 다른 쪽은 남성들과 병역 의무를 나누는 것을 성평등과 연관 짓는 여성계 일부의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두 집단은 서로 동상이몽을 꾸고 있는 듯하지만, 여성이 군대 갔다 오는 것이 당연한 국민적 의무라는 인식에 기대고 있는 점에서는 똑같다. 국민개병제하에서 여성의 군 복무가 당연하지 않느냐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근대 국민국가 이후 모든 국민에겐 병역 의무가 주어졌지만 정작 남성들만 군에 가는 모순이 나타나는 것은 국민의 범주에서 여성은 처음부터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국가-군대-남성의 배타적 결합은 여성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으나 그나마 사정이 달라진 듯 보이는 경우는 국민국가 체제가 위기를 맞을 때이며, 일군의 여성운동가들은 이를 기회로 활용하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경우에서 보듯 여성운동가들은 군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여성의 지위 향상을 가져다준다고 믿기도 했다. 전시체제하에서 여성들이 군수공장에 취업하고 남편이나 자식의 자원입대를 독려하는 것이 여성 지위의 향상으로 비춰진 사정은, 여성을 배제한 국민국가체제의 태생적 모순이 낳은 것이었다. 여성이 침략 전쟁에 휩쓸리는 것이 국민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이웃 나라의 경험은 여성의 의무 복무제 주장의 맹점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참조가 될 만하다. 국민개병제 자체가 예외적인 소수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근대국가의 폭력성을 드러내고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도 군대가자'라는 주장 역시 심각한 폭력성을 숨기고 있다. 이 주장은 군대 자체가 가진 폭력성과 야만성에 대한 고찰도, 양심적 병역거부자 같은 소수의 목소리에 대한 배려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이와 달리 군대의 제도화된 인권유린과 반여성적 속성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군축과 모병제, 반전평화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을 찾고 있으며, '2등 국민'이 싸워야 할 것은 국민국가 체제와 군대 제도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뿌리부터 성차별적이고 불합리한 체제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순응하고 그 제도에 적극적으로 부합하려는 여성의무복무제 주창자들은 이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여성 징병제 논의가 '이프(IF)'지 같은 지식인 여성 매체 등에서 생산되고 있는 것은, 일정한 물적 자본과 지식을 갖춘 이들의 처지와 관련이 있다. 중산 계급 여성들에게 절박한 것은 체제와 제도를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과 겨룰 수 있는 동동한 기회이다. 이들과, 예전 같으면 국민으로 취급하지도 않았을 여성을 동원해서라도 냉전체제를 지키려는 극우 세력의 목소리가 만나는 것은, 여성정치세력화를 위해서라면 한나라당을 위시한 보수정당에 들어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일부 여성운동가들의 행적을 떠올리게 한다. 여성운동가들의 보수정당 입당이든 여성 징병제 논의든 남성들이 벌여놓은 판의 진입 장벽을 낮추려는 작업만으로는 많은 서민여성의 처지에 부응하지 못한다.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도 국민국가 체제에서 여성이 군대에 접근한다 하여 '1등 국민'의 지위로 승격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런 체제에서 여성이 군대에 간다면 성차별이 없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살상 없는 군대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순진한 환상에 불과할 뿐 아니라 오히려 병역 면제를 구실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무수한 차별을 합리화해줄 위험이 크다. 해방 후 꼬박 60년을 내달려온 국민국가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이 필요하거니와 군대의 모병제 전환 후 여성에게도 문을 개방하는 것이 모든 성이 군대의 억압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 숨막히는 현실을 해소하는 길일 것이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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