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목동에 위치한 서울 출입국관리사무소는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려는 이들로 연일 만원이다. 평소에 불과 서너 건에 이르던 국적 포기신청이 이처럼 급증한 이유는, 올 6월 초 시행을 앞두고 있는 개정 국적법의 존재 때문이다.
이번 국적법 개정안의 골자는, 미국·캐나다 등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출생한 사람들이 외국 국적을 취득하여 이중국적을 유지하다가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병역을 회피하는 행태에 제동을 걸겠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병역의무를 마치기 전에는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법률을 개정한 것이다.
서울출입국관리소에서 지난 2~10일 사이의 국적 포기자 386명에 대해서 밝힌 분석자료를 보면 주목할 점이 적지 않다. 그 중 하나는, 최근 국적을 포기한 이들의 97%가 미국을 자신의 모국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국적 포기자의 부모 직업이 대부분 교수, 연구원, 상사 주재원, 기타 등이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국적포기자의 98% 이상이 남성이었으며, 99% 이상이 20세 미만 연령이었다.
위 분석자료를 보면 이른바 '한국사회의 지도층'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미국 편향과 애호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적포기자의 성비(性比)와 연령이 잘 가르쳐주듯이 국적포기가 '병역 기피'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음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한국사회의 여론주도층 혹은 식자층(識者層)이 지니고 있는 애국심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를 온몸으로 방증한다 하겠다. 납세와 군역(軍役)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사회지도층'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임은 긴 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한국 사회의 지도층'이 자신들이 누릴 권리에만 민감하고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의무에는 매우 둔감함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에 재학 중이던 귀족의 자제들이 대부분 장교로 복무하였고, 그 중 상당수가 불귀의 객이 된 역사적 사실은, 이들 앞에 무색할 따름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하고 국방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가진 것도 배운 것도 그리 많지 않은 서민들이었다.
한편 '병역기피'를 원인으로 한 국적 포기가 잇따르면서 비난 여론이 폭등하자 이들에 대한 대응책 마련도 발빠르게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우선 이번 국적법 개정안을 발의한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이 '병역 기피 국적포기자'를 기존 '재외동포' 개념에서 완전히 제외시켜 '외국인'으로 취급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홍 의원이 구상하고 있는 법안이 시행되면 '병역 기피 국적포기자'는 기존에 재외동포가 내국인에 준해 받던 갖가지 혜택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한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의 느낌이 있지만 이러한 일각의 움직임은 매우 고무적이다. 어떤 사회라도 그 구성원들이 의무는 등한시한 채 권리만을 주장한다면 정상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지도층이 사회적 의무를 방기하고 자신들의 사익을 추구하는 데만 골몰하는 사회의 미래는 더욱 암담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건국이래 한국사회에서 사회지도층들의 이른바 '노블리지 오브리제(noblesse oblige: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이 가져야 할 도덕적 의무)'는 천연기념물이 된 지 오래다. 그리고 이는 한국사회 전체의 비극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는 진리가 한국사회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할 것이다. 사회지도층의 자제들이 탈법 등을 저질러 군대에 가지 않는다면 그 빈자리는 서민의 자제들이 채워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편집위원 * 필자는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에서 정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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