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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와 고장 난 라디오
[정문순 칼럼] 같은 발언 되풀이하는 민족해방주의 세력의 자승자박
 
정문순   기사입력  2014/02/19 [21:30]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1심 재판에서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재판부는 이 의원이 조직원들에게 군사 폭동을 지시했다는 검찰 주장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 의원 등이 판결대로 조직을 꾸려 내란 음모를 꾸몄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모의의 내용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재판부가 내란 준비 모임으로 지목한 ‘5월 모임’ 녹취록에는 인터넷을 통해 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참석자의 발언이 나온다. 보온병으로 폭탄 제조가 가능하다고 했던 분보다 무기 개발의 상상력이 떨어지는 셈인데, 무기 제조법을 인터넷에서 배우자고 하는 자들이 내란을 실행에 옮길 역량이 된다고 재판부는 진정 믿었는지 의문이다. 무기를 만들 줄 몰라도 인터넷을 통해서 뚝딱 만들어 내란을 일으킬 수 있다면, 인터넷이야말로 내란 교사의 진원지로 지목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석기 소동은 박근혜 정부가 농담으로 치부될 일을 진지하게 말하는 자들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기회를 박탈하고 되레 가시 면류관을 씌워줌으로써 맷집만 키워주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대선 부정선거 혐의를 덮기 위해서는 그렇게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이런 일에 대한민국 법원도 줏대 없이 동참하는 듯하여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재판이 어떤 식으로 끝나든 명쾌히 풀리지 않을 의문이 있다. 1심도 그랬지만 상급심에서도 이 의원 등의 유·무죄만 판단할 뿐 녹취록에 흐르는 그들의 사고 체계까지 들여다볼 것 같지는 않다. 이 의원을 포함하여 통합진보당은 국정원이 제출한 녹취록의 숱한 오류를 들어 거의 허위에 가까운 것인 양 주장하지만, 녹취록에 담긴 이 의원 등의 사고방식까지 조작되기는 힘들다. 

이 의원 등이 녹취록이나 그에 대한 해명에서 현 시점을 언제나 혁명적이며 ‘대격변기’로 인식하는 공상 수준의 정세 판단과 더불어 일관되게 전제하는 바는, 전쟁을 기정사실화하거나 목전의 두려움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이 의원 등은 문제의 녹취록 내용이 전쟁이 발발할 경우 예비검속을 당할 것에 대한 대응책으로 논의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내란’ 모의를 할 당시 한반도에 전쟁 분위기가 정말로 조성되고 있었을까. 녹취록 내용을 떠나서도, 민족자주를 주창하는 세력의 기본 인식은 휴전 상태인 한반도가 늘상 위태로우며 전운이 감돌고 있다는 데 있다. 이들은 남북 관계가 좋아지든 나빠지든 상관없이 전쟁 위기설을 수십 년 넘게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해 왔다. 한반도가 군사력 밀집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화약고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언제라도 전면전이 터질 만한 예비 전쟁터로 치부하는 것은 일반 시민의 인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이들의 판단대로라면 남한 시민들은 일상적인 생활조차 제대로 영위하기 힘들어야 한다. 언제 전쟁이 날지 모르는 나라에서 자식을 낳아 기르기도 힘들고, 나라를 빠져 나가는 행렬이 쉬지 않아야 한다. 생활필수품은 언제나 동이 나고, 안전한 나라로 몸을 피할 능력이 안되는 이들은 언제든 피난 갈 태세를 갖추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남북이 대치 중인 상태가 60년 넘게 이어지면서 남한 국민들은 이를 평화에 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북한과 통일하지 말고 이대로 그냥 살았으면 좋겠다는 국민 일각의 인식은 남북한 군사적 긴장 상태에 대한 학습과 적응을 말해준다. 더구나 남과 북이 상호의존적인 적대 관계를 유지하는 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 소규모의 충돌은 몰라도 본격적인 전쟁은 남북 권력 모두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은 알지만, 이석기를 포함한 통합진보당과 민족해방주의자들만 모르고 있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안보 장사에 열을 올리는 수구 기득권 집단도 마찬가지로 국민들에게 늘 주입해 온 논리다. 전쟁 위기 담론을 권력 유지와 재생산을 위해 써먹는 것이 다를 뿐 국민의 상식과 동떨어진 판단에 얽매여 있다는 점에서, 서로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는 박근혜 정권과 통합진보당의 묘한 공생관계가 느껴지는 건 왜일까.

전쟁에 대한 과도한 상상력은 남한과 미국의 연례적인 군사훈련을 선전포고나 다름없이 받아들이는 북한의 태도와도 비슷하다. 1990년대 이전까지 과거 역대 정부가 북한에 유엔 동시가입을 제의했을 때 민족해방 계열은 북한의 주장에 맞추어 영구분단 음모라며 반대했다. 이들은 1991년 북한이 자신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유엔에 가입하자 처지가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북한 최고위급 인사가 불구대천의 원수인 주한미군의 주둔을 통일 후에도 용인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탈냉전의 지각변동이 일던 그때, 고립된 민족해방세력은 친북 색깔을 버리고 환골탈태하거나 그럴 역량이 안되면 청산됐어야 했다. 

시대착오적으로 긴 명줄을 타고난 덕분인지 스스로 변모하거나 과거가 될 기회를 놓친 이들이 드리운 그늘은 크다. 다가올 선거에서 진보 후보들은 이석기 혹을 떼기 힘들 텐데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나.  

* 2월 19일 경남도민일보 게재 칼럼을 손본 글입니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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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4/02/19 [21:3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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