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국의 정치시평 >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미국의 의약품 협상은 대화 아닌 ‘협박’
[한미FTA 역사쓰기14] 미국측 2-3개 수용해도 ‘포지티브 리스트’는 무용
 
김영국   기사입력  2006/10/04 [17:10]



의약품 협상 '생소한 용어'들, "한방에 해결하자"    

한미FTA에 대해 국민 90%가 그 내용을 잘 알지 못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는 盧 정권의 '비밀스런' 추진 과정이 가장 큰 이유이다. 그러나 국민들 또한 향후 자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경제 협정임에도 꽤 무관심한 측면도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한미FTA 협상에 등장하는 각종 용어가 전문적인 게 많아 선뜻 와닿지 않고, 어렵다는 점도 작용했다.

따라서 한미FTA 협상의 내용이나 쟁점 등을 이야기할 때 각 분야별 협상 과정에 등장하는 용어들을 서민의 눈 높이에 맞춰 보다 상세하고 알기 쉽게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의약품 분야는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한미FTA 관련 방송 보도가 1분 30초 동안 어렵고 모르는 용어들로 설명 없는 쟁점만 나열하다-일반인들이 뭐가 뭔지 도통 모를 소리만 하다-끝내는 주마간산(走馬看山)식 보도 행태를 비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특히 월드컵 보도 때 방송사가 보여준 치밀한 분석과 한미FTA 보도를 비교하면서, 어떤 면에선 한미FTA가 국민의 삶에 훨씬 중요한 국가적 사안임에도 방송사의 보도 행태는 무성의한 건지 무능한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란 지적이 많다.

<한미FTA 역사쓰기>는 처음 약속한 대로 경제정책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참여의 장을 새롭게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그동안 알고는 싶었으나 삶에 바빠 미쳐 챙겨보지 못한 모든 이에게 한미FTA는 물론 각 산업 분야의 정책을 공부하고, 판단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따라서 한미FTA 협상의 주요 내용을 다루는 분야는 ‘골치 아픈 건 한방에 해결하자’는 모토로 분량에 관계없이 쟁점들을 최대한 상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신약=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신물질을 이용해 만든 약을 가리킨다. 보통 개발기간 10∼15년, 연구비 5000억∼1조원이 들어가지만, 성공하면 배타적 권리가 확보되고 연간 수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도 있다.
또 신약에는 비용, 효과 면에서 뚜렷이 개선된 것으로 평가되는 '혁신적 신약'과 '일반 신약'으로 나뉘며 가격 산정 기준도 달라진다. 따라서 혁신적 신약으로 인정되면 그만큼 더 높은 가격이 책정된다.

◆제네릭(복제약)= 특허(보통 20년)가 만료된 신약을 똑같이 복제한 약으로 흔히 ‘카피약(복제약)’으로 불린다. 2∼3년 만에 적은 비용으로 만들 수 있으나 6개월 밖에 독점판매권을 갖지 못한다.
현재 우리나라 제약회사의 의약품 중 오리지널 약품은 10여종에 불과하다. 그 외 오리지널 약품은 모두 수입이다. 국내 제약회사가 파는 나머지 2만종 이상은 모두 복제품인 제네릭 약품이다. 제네릭의 국내 판매 비중이 80% 안팎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개량신약= 특허가 만료된 신약의 구조나 용도 등을 일부 변형해 개발한 약품으로 신약과 제네릭의 중간단계로 보면 된다. 보통 개발기간 3∼5년, 연구비 5억∼15억원이 든다.

◆약값은 어떻게 정해지나= 보건복지부가 고시한 '약제 상한금액의 산정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신약의 약가 결정과 약가 재평가시 '선진 7개국(A7)의 평균 공장도 가격(도매 약값)'을 기준으로 삼는다. 선진 7개국(A7)이란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일본을 말한다.

이처럼 우리 나라는 경제력이 월등히 앞서는 국가들만 비교 대상으로 삼고 있어 약가가 높으며, 특히 미국의 특허 의약품 약가는 상당히 높은 편에 속한다. 그런데도 미국은 혁신적 신약의 범위를 더 늘리고 약값도 올리라고 요구하고 있다.  

혁신적 신약은 선진 7개국(A7)의 평균 공장도 가격에 일정한 유통 이윤을 붙인 ‘A7 조정 평균값(외국조정평균가)’으로 산정하고, 일반 신약은 기존에 등재되어 있는 동일한 효능의 의약품 가격과 비교하여 산정하는 ‘상대 비교가’로 약값를 정한다. 국내의 기술로 개발한 세계 최초 신약의 경우는 실제 개발에 소요된 비용을 고려하여 상한금액을 정한다.

복제약의 경우에는 보건복지부가 고시한 '신의료기술(미결정행위) 등의 결정 및 조정기준' 안에 있는 '약제 상한금액의 산정기준'에 따라  ‘기 등재된 약의 가격에 일정 비율을 곱해’ 가격이 결정된다.


이에 따라 현재 우리나라 약값 산정의 기본은 'A7 국가의 기준 약가 책자'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준 약가집이 실제 거래하고 있는 가격보다 높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보건의료 관련 시민단체들은 신약의 약가 산정시 경제성 평가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며, 외국의 약가를 참조할 시에는 약가 책자가 아닌 실제로 거래되고 있는 의약품의 가격을 조사하여 '실거래에 근접한 가격'을 기준으로 삼을 것을 주장한다.

◆약값 재평가 제도= 최초 보험 약값이 결정되고 일정 시점이 지난 후 조건 변화에 따라 이를 반영, 다시 가격을 매김으로써 적정 수준의 약값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다. 건강보험의 재정 악화를 줄이고 소비자 부담을 덜기 위해 2002년에 처음 도입됐다.

현행 약값 재평가 방식은 '3년마다' 선진 7개국(A7)의 평균 공장도 가격에 일정한 유통 이윤을 붙인 ‘A7 조정 평균값’으로 이 가격이 한국의 약값보다 싸졌을 경우에만 이에 맞춰 내리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05년 해당 약의 A7조정평균값이 한국보다 비싸더라도 3년 동안 크게 떨어진 경우에는 그 비율만큼 한국에서 약값을 내리는 ‘A7 변동률’ 방식을 적용한 개정안을 추진했다.


‘A7 변동률’ 방식은 초기에는 약값이 비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약값 하락률이 커지는 신약에 불리한 제도여서, 신약 개발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등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반면에 우리 정부가 미국의 통상 압력으로 이런 새로운 제도의 도입을 포기했다면, 약품에 따라서는 국민들이 좀더 싸게 약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정부 관계자는 2006년 3월 3일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서 “2005년 7월부터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함께 약값 재평가 제도 개정안을 추진해 2006년부터 시행할 계획이었으나, 2005년 10월 '한미 통상현안 분기별 회의'에서 미국이 자유무역협정 협상의 걸림돌이 된다며 취소할 것을 요구해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포지티브 리스트 제도/약값 적정화 방안= 보건복지부는 2006년 5월 3일 가격대비 효능이 좋은 약품만 건강보험 적용(급여) 대상에 포함하고, 신약의 약값도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제약회사.수입업자와 직접 협상해 정하는 건강보험 '약값 적정화 방안'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보건복지부는 2006년 7월 26일  '의약품의 건강보험 선별등재방식(Positive list system)'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민건강보험 요양급여의 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입법 예고한데 이어 의약품 가격 산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신의료기술 등의 결정 및 조정 기준’(보건복지부 고시) 개정안도 입안 예고했다.

이에 따라 식품의약품안전청 허가가 떨어진 의약품은 거의 자동적으로 대부분 건강보험 대상에 포함시키는 현행 ‘네거티브 리스트 시스템(Negative List System)’이 폐지되고, 효능이 같을 경우 가격이 싼(비용 대비 효과가 우수한) 의약품만 선별하여 등재해 보험 혜택을 주는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Positive List Systemㆍ선별등재방식)’이 도입된다.

포지티브 시스템은 미국, 프랑스, 스웨덴, 호주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시행하고 있다. OECD 국가의 80%인 24개 국가에서 운영하고 있는 보편적인 제도다.

포지티브 리스트 제도 도입에 따라 신약의 약값도 선진 7개국의 평균 공장도 가격을 기준으로 자동 책정되던 방식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제약회사·수입업자와  ‘직접 가격 협상’을 해 결정하기로 했다. 따라서 앞으로 제약업체에서 신약을 만들더라도 경제성 평가 등 종합평가를 거쳐 가격에 비해 효과가 우수하다는 당국의 판단이 있어야만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신의료기술 등의 결정 및 조정 기준' 개정안에 따르면,  신약이 특허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이를 복제한 복제약이 최초로 건강보험에 등재되는 경우, 등재되는 시점에서 해당 신약(오리지널약)의 가격을 20% 인하하고 그에 따라 복제약의 가격도 건강보험에 등재되는 순서에 따라 5번째 약까지는 '인하된 오리지널 약 가격의 80%'로 산정하되 그 이후는 최저가의 90%로 산정키로 했다. 결국 복제약도 현행보다 16% 더 가격이 내려가게 된다.


즉, 특허기간(20년)이 지나면 오리지널 약 가격도 내리고 이에 맞춰 복제약 가격도 인하한다는 계획이다. 또 포지티브 시스템은 복제 의약품을 제외한 신규등재 의약품을 대상으로 경제성 평가 등을 실시하는 것이므로 우리나라 제약사에서 개발·생산하는 의약품은 물론 모든 나라의 의약품에 공평하게 적용된다.  

보건복지부의 '약값 적정화 방안'을 요약하면 △보험약품의 등재 방식을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으로 △보험약품의 가격을 건강보험공단과 제약사간 '직접 협상'으로 △의약품의 보험적용 의무신청에서 제약업체의 자율신청 방식으로 바꾸고, 등재신청을 하지 않은 필수의약품에 대해서는 약제급여조정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강제 등재가 가능'토록 하며 △기존 등재된 의약품은 포지티브 리스트에 등재된 것으로 인정하고 '단계적으로 등재목록을 정비'하며 △특허기간(20년)이 지나면 오리지널 약 가격도 내리고 이에 맞춰 복제약 가격도 인하한다는 것 등이다.  

정부는 이같은 제도의 도입으로 약값을 적정화 해 건강보험 재정 지출도, 환자 부담도 모두 줄여보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한미FTA 본협상에서 미국은 한국 정부의 약값 적정화 방안 '철회'를 핵심 요구사항으로 내걸고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며 협상 중단을 압박하는 등 ‘생쇼’를 벌였다.  

◆미국측의 요구 16가지(싱가포르 막후협상)= 한국과 미국은 2006년 8월 21, 22일 이틀간 싱가포르에서 두 나라 대사관을 하루씩 오가며 한미FTA 의약품 분야 ‘별도 막후협상’인 '의약품·의료기기 작업반 회의(워킹그룹)'를 했다.

싱가포르 막후 협상에서 미 협상단은 우리 정부에 무려 16가지나 되는 '협의 제의 사항'을 요구했다. 이 16개의 요구 항목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한국 정부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사실상 포기하고, 한국에서 미국 다국적 제약사의 독점권한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은 의약품 등재과정의 각 단계마다 신약이 차별받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해 줄 것과 독립적인 이의신청 기구 등의 설치 및 충분한 이의신청 기간을 요구했고,  경제성 평가의 근거, 등재의 이유, 보험가격 설정의 근거 등을 통보해 달라고 요구했으며, 심지어 의약품 가격을 결정할 때 물가인상률을 반영해 달라고까지 주장했다.

특히 ‘의약품 의료기기 위원회’는 국내 약값정책에 미국이 개입하는 또 다른 구조이며, 이로써 미국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설치될 약제급여평가위원회, 보건복지부내 약제급여조정위원회, 독립적 이의신청 기구, 의약품 의료기기 위원회 등으로 3중, 4중의 개입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으로 지나친 요구라는 지적이 많다.

이와 관련 보건의료 관련 단체들은 싱가포르 막후 협상에서 미국측 요구 사안을 쟁점별로 분석한 결과 “미국측 요구사항 16개 중 2~3가지만 수용해도 약가는 폭등하고 포지티브제는 무력화 될 것”이라며 “미국의 포지티브 리스트 수용은 '수용이 아니라 아예 무력화려는 것'으로 완전 거짓말임이 드러났다.”고 맹성토했다.

※위 용어들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 "한미FTA 의약품 협상- 용어 해설 및 협상 진행 일지"를 참조.  



☞ 한미FTA 의약품 협상- 용어 해설 및 협상 진행 일지(참여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연대, 2006.9.26)

☞ '의약품 가격 산정 기준' 규정 및 변천사(보건복지부.참정연, 2006.9.26)

 국내 제약산업 및 약제비 현황  

다국적 제약회사의 로비력은 미 정치권과 강한 유착 관계를 형성, 미국 내 약가나 법안 통과에 영향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 FTA의 협상 조항까지 좌지우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다.

또한 미국은 압도적인 의약 강국이자 수출국이다. 미국의 다국적 제약회사인 '화이자'의 한 해 매출(51조)은 국내 1위 제약업체인 동아제약 매출(5335억)의 무려 100배다. 국내 1~5위 제약업체의 한 해 매출액을 다 더해도(약 2조원) 화이자의 4%도 채 안된다. 여기에 미국은 화이자와 맞먹는 매출액을 자랑하는 존슨&존슨(50조) 등 한 해 매출액이 수십조에 이르는 다국적 제약회사가 수두룩하다.

거기에다 2001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다국적 제약회사의 점유율이 해마다 10%씩 늘고 있다. 현재 다국적회사의 시장점유율은 30%를 넘고 로열티 지급방식의 간접적인 점유까지 포함하면 절반은 된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실제로 정부의 통계 자료 분석한 결과 국내 병의원의 상위 100개 처방약 가운데 다국적 제약사의 약값 비중이 전체의 55%였다.

한미FTA가 체결되면 다국적 제약회사의 시장점유율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해외에서는 이미 제약사간 먹어치우기(M&A)마저 활성화 돼 있다.

반면 우리 제약업계는 영세한 규모, 저조한 R&D 투자, 제네릭(복제약) 개발에 의존한 이윤창출로 지탱해 왔다.

그러가 하면 우리나라는 2001년 이후 건강보험 지출 중 약제비가 매년 약 14%씩 증가하고 있다. 증가율이 선진국의 6~7%보다 두 배가 넘는다.

2005년도 건보 총 진료비(24조 8,000억원) 가운데 약제비는 7조 2,289억원으로 29.2%를 차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7.5%의 두 배에 가깝다. 또한 약제비가 2000년의 3조 5천억원에 비해 105%나 증가한 것이다. 그 사이 건보 재정은 적자로 돌아섰다.

2006년 1월 현재 건강보험 적용을 받는 약만 2만2169개에 이르고, 이중 생산이 중단된 약도 4616개에 달한다. 우리나라 건보 급여대상 의약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축에 속한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의약품 비용은 다른 나라보다 두 배 가량 높아 불필요한 지출이 너무 많으며 약가정책도 지나치게 제약회사 봐주기 정책이라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건보 재정을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약값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생긴 것이다.

이런 과도한 약제비 지출은 시판 허가를 받고 보험등재 신청만 하면 대부분 보험약으로 인정해 주는 현재의 '네거티브 리스트 시스템(Negative List System)'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또 비싼 약가와 유통구조, 의사들의 '고가약 위주로 필요 이상'의 처방관행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미FTA 의약품 협상, 어디까지 왔나

백해무익(百害無益). 비단 담배만 그런 게 아니다. 한미FTA 협상 테이블에도 이 말이 딱 어울릴만한 것들이 수북하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의약품 협상이다.

담배는 피우는 사람에게만 해가 되지만, 잘못된 의약품 협상으로 인한 피해는 국민 모두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더 파괴적이다.

현재의 높은 의약품 가격을 낮춰 건강보험 재정 부실도 만회하고, 국민들에게 보다 값싼 약을 먹도록 하기 위한 정부의 의약품 관련 정책이 다국적 제약회사의 이익과 로비를 앞세운 미국의 횡포로 '정책주권 침해(내정 간섭)' 논란까지 일며 크게 위협받고 있다.

실제 미국측은 한미FTA 협상중 의약품 분야에서 특히 많은 요구사항들을 쏟아냈고, 한국 정부가 미온적이자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 협상 전체를 중단시키는 ‘전략적 생쇼’까지 벌이며 강한 집착을 보였다.

미국측의 수많은 요구사항들의 핵심은 한마디로 "한국 국민이 값 싸고 좋은 약 먹기 위해 미국기업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다국적 제약회사의 오리지널 신약을 한국에서 오랫동안 비싸게 팔기 위해 한국의 법과 제도, 관행까지 뜯어고치겠다"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는 한미 FTA를 추진하기 위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2005년 10월 28일 ‘약값 재평가’ 제도의 개정 작업을 중단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정부가 한미FTA 추진 제물로 약값 인하를 통한 건강보험 재정 건전화와 국민부담 완화를 양보한 셈이어서 큰 논란이 됐다.

뒤늦게 우리 정부는 2006년 5월 3일 건강보험 적용 의약품에 대한 '포지티브 리스트 제도(선별등재방식)' 도입을 추진하면서 약값 적정화 작업을 재시도했으나, 미국측은 정부 관료와 대사관까지 나서 한국 정부에 공개적인 철회 압력은 물론 한미FTA 협상 대표단까지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며 파행을 일으킬 정도로 한국의 '약값 정책 주권'을 크게 위협했다.

약제비 적정화 방안은 우리 정부가 2003년부터 검토해온 것이다. 정부는 2003년 5월 31일 건강보험발전위원회를 구성, 건강보험 재정 절감을 위한 포지티브 방식의 보험약가 도입을 추진해왔다.

새로운 약가 정책을 도입하는 것은 당연히 미국 정부와 논의할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의 뜻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다. 더욱이 약값 정책의 문제는 불필요한 의료비용 절감에 있어 핵심적 과제이다.

기막한 사실은 미국은 자기 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현재 시행하고 있음에도, 우리 나라만은 하지 말라고 협박하는 이중성이었다. 더군다나 포지티브제는 북미와 유럽 등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등 세계적인 추세여서 그 반대 배경에 더 관심이 쏠렸다.

이렇듯 끝까지 반대할 명분이 없자 미국은 2006년 8월 11일 포지티브 리스트 제도 도입을 인정하면서 겉으론 양보하는 척 했다. 그러나 곧바로 8월 21일 한국 협상단을 싱가포르까지 끌고 가서 무려 16개나 되는 다른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그 요구 조건대로라면 한국 정부의 포지티브제 도입 자체를 ‘하나마나한’ 것으로 만들어 미국 기업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겠는 속셈이 알알이 박혀 있었다.

이렇듯 한번 덜미를 잡힌 한국 정부와 꼬투리를 잡은 미국은 협상에 임하는 태도부터 하늘과 땅 차이였다. 미국측은 한국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포지티브제) 도입 방침에 '약속 위반'이라며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는 등 위세를 부렸고, 우리 정부는 한미FTA가 깨질까 전전긍긍하다 국민의 눈을 피해 싱가포르까지 질질 끌려다니며 의약품 협상에 임해야 했다.

굳이 싱가포르까지 피난가서 한미FTA 의약품 협상을 벌이는 우리 정부 협상단의 모습을 보노라면, 마치 금연구역 때문에 끽연실을 찾아 헤마다 조그마한 골방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애처로운 모습 그대로 였다.

이처럼 한 나라가 국민 건강을 위해 그것도 이미 예정돼 있는 정책 실시를 앞두고, 다른 나라가 자국 기업에 불리하다며 중단하라고 윽박질러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야 하는 게 한미FTA다.

의약품 협상은 '꽃놀이패 들고 짜고치는 고스톱?'

한편 한미FTA의 최대 '딜 브레이커'(협상 장애물)로 부상한 약제비 적정화 방안(포지티브 리스트 제도)은 양국 협상단의 '꽃놀이패'가 되기도 했다.

보건복지부 안팎에서는 여러 정황상 "한국 정부는 포지티브제 도입을 고수하면서  미국에 끌려다니지 않는다는 이미지를 반대파에 심어줄 수 있고, 미국은 이 문제로 '협상 중단'을 소리치며 협박했다가 ‘못 이기는 척’ 포지티브제를 받아들인 후 정작 다른 곳에서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 실리를 취할 수 있다(성동격서)"는 점에서 한.미 모두에게 '짜고치는 고스톱' 내지 '꽃놀이패'가 될 가능이 있다는 비판적 시각이 많았다.

한국 협상단도 포지티브제를 고수하는 댓가로 다른 것을 양보할 수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2006년 7월 14일 2차협상 결산브리핑에서 “선별 등재는 확고하지만 약값과 효능을 평가하는 방법은 미국과 협상으로 풀 수 있다.”고 밝혔다. 그 전날에는 “신약의 연구개발 비용은 인정해줘야 한다.”고 언급했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FTA 협상을 두고 한국과 미국간 협상이 아니라 '미국과 미국의 협상'이라는 비아냥도 협상단의 이런 '안이한 저자세'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안가 비판자들의 예상대로 미국은 한국의 포지티브 리스트 제도 도입을 수용하면서 곧바로 한국 정부를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있는 제3국(싱가포르)까지 끌고가 무려 16가지나 되는 요구 사항을 쏟아놓고 받으라며 압박했다.

미국은 호주에 대해서도 선별등재 방식 전환을 반대했지만 결국 이를 수용하는 대신 특허기간 연장과 약가 결정과정에서 자국 제약사가 참여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이의기구 설치 등을 얻어낸바 있다.

국민 우롱하는 노무현, 김현종, 유시민

정작 더 큰 문제는 미국의 압력보다 '내부의 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한미FTA 추진을 주도하고 있는 정부 관료들의 조급증과 체결 집착에 따른 거짓·기만은 자못 심각했다.

애초부터 터무니없는 요구였음에도 미국이 실컷 위세를 떨다 나중에 수용하는 척 했다고 해서 마치 대단한 전리품을 얻은 양 국민을 상대로 자랑하는 한국 정부의 태도는 가관이었다.

그래서 정부가 앞에서는 포지티브제를 지켰다고 생색을 내며 뒤에서는 미국이 요구하는 특허권 강화 등을 허용한다면 명분만 얻고 실리를 뺏기는 꼴이라는 게 많은 이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8월 9일 연합뉴스와 특별회견에서 “4대 선결조건은 FTA의 협상대상을 먼저 미국에 내주고 나머지로 협상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FTA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고 못박았다.

그런데 한미FTA 협상 과정에 미국은 4대 선결조건 중 하나인 한국의 약값 적정화 방안 도입을 놓고 약속 위반이라며 협상장을 박차고 나가며 파행시켰다. 3차 본협상까지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 그 부분은 가장 첨예한 시비거리였고, 심지어 제3국으로까지 끌려가 협상을 해야 할 만큼 지금도 한미FTA 협상의 한 복판에 있다. 결국 'FTA 협상 대상이 아니다'는 노 대통령의 주장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이 됐다.

한국 정부는 미국측의 이런 무례함이 사전에 양보를 약속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측의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더 크다. 이를 방증하는 미국측 언론 보도와 증언들이 나온 것이다.

2006년 5월 26일 미국의 유력 통상 전문잡지인 <인사이드 유에스 트레이드>지는 “케런 바티아 미국 무역대표부 부대표와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을 비밀리에 만나 새로운 약가정책을 추진할 경우 FTA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지지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고, 이에 김현종 본부장은 미국에게 불리한 약가 정책을 도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보도해 파문이 일었다. 이 잡지는 또 미국 제약회사 고위 간부들이 이태식 주미 한국대사와도 접촉했다고 보도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잡지 보도에서 “미국 정부와 업계가 5월 3일 발표된 한국의 '건강보험 약제비 적정화 추진방안'이 당초 약속을 어긴 것이라며 이의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고, 특히 FTA 협상 타결 이전에는 약가제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한 김현종 본부장이 어려운 입장에 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문제를 '조용하고' '비공식적으로' 논의하려 하고 있다.”고 강조한 대목이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도대체 대한민국의 관료인지 미국측이 한국 정부에 심어놓은 '경제 저격수'인지 '트로이 목마'인지 분간이 안가는 이같은 '매국 행위'에 대해 추후 그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할 사안이다.

이와 관련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6월 1일 CBS 라디오의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에 출연, 한국 정부의 약제비 적정화 정책에 대해 “FTA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기존 체계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발표에 우려해 한국 정부에 이 문제를 재고하라고 제안한 바 있다.”고 밝혔다.

이같은 버시바우 주미대사의 발언은 미국의 '인사이드 유에스 트레이드'지가 보도한 내용을 사실상 공개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또 이보다 앞선 2005년 11월 미 의회가 부시 대통령에게 전달한 서신에도 “김현종 본부장이 미국을 방문한 기간 동안 농업과 자동차, 스크린쿼터, 의약품 등 FTA 쟁점에 대한 미국의 우려를 적절한 방법으로 해결하겠다고 보장했다.”고 적시되어 있다.

이처럼 의약품 분야에서도 김현종 본부장이 사전에 미국측에 모종의 약속을 했다는 정황들이 미국측 보고서와 언론 보도를 통해 속속 드러났고, 이후 미국측 협상단의 일관된 발언으로 볼 때 김현종의 행보는 여러모로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김 본부장은 주로 외교통상부 관계자를 대신 내세워 이같은 보도 내용을 부인했다.

이들의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추후 한미FTA 청문회 등을 통해 김현종 본부장을 집중 조사할 필요성이 있다는 게 한미FTA 의약품 협상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한미FTA 추진 주도세력의 거짓·기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건복지부 배경택 한미FTA 팀장은 2006년 7월 27일 국정브리핑 기고를 통해 약제비 적정화 방안 등 의약품 협상과 관련해 "한·미 비밀협약(막후협상)은 없다"고 공언했다.

그는 “보건복지부는 ‘막후 협상’을 통해 국민을 기만한 바 없으며, 향후에도 속이는 일은 없을 것임을 약속드린다”며 “국민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양보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그런 합의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고 못 박았다.

그렇다면 굳이 제3국까지 피난가서 협상을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호기 어린 장담은 한 달도 못갔다.

'막후 협상은 없다'며 극구 부인하던 보건복지부는 급기야 2006년 8월 11일 “미국 정부가 우리 정부의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선별 등재 방식)' 도입 계획을 수용하기로 했고, 양국은 그 구체적인 절차와 다른 관심사항 모두를 협의하기 위해 8월 21~22일 양일간 '의약품 분야 작업반(working group)' 회의를 싱가포르에서 별도로 갖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국민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제3국까지 가서 사실상 '비밀 막후협상'을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측이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을 받아들임으로써 지난 2차 본협상 때 벌어졌던 약값 갈등은 국민을 기만하기 위한 ‘생쇼’가 아니었느냐는 비판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됐다.

미국이 자국에서도 실시하고 있는 포지티브제 도입 문제를 내세워 서울에서 열린 2차 FTA 협상을 중단시킬 정도로 반발했던 것을 돌이켜보면 미국측의 갑작스런 수용은 선뜻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 많았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 안팎에서는 한.미간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는 설이 파다했다. 이는 FTA 협상을 반대하는 세력이 줄곧 제기해온 '사전각본 시나리오'와도 맥이 닿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공개된 자리에서 협상을 하면 되지 의약품 분야만 제3국까지 가서 막후협상을 벌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건의료 관련 시민단체들은 “미국이 결국은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을 양보하는 척하면서 의약품의 특허기간 연장이나 약값 결정에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는 제도적 정치를 마련하는 것과 같이 실리가 더 큰 것을 얻어내려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은 싱가포르 막후협상에서 약값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넘어 무려 16가지나 되는 요구 사항들을 무더기로 쏟아냈다. 시민단체들의 예측은 대부분 그대로 들어 맞았다.

심지어 3차 본협상(2006.9.6~9)에서도 의약품 관련 합의가 여의치 않자 정부는 또다시 제3국에서 막후협상을 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보건복지부 전만복 한미FTA 국장(의약품·의료기기 분과장)은 2006년 9월 10일 한미FTA 3차 본협상을 마치고 귀국한 뒤 “시애틀 3차 의약품 협상에서도 끝없는 평행선만 달렸다”며 “이번 협상에서 별다른 진전이 없음에 따라 4차 협상 전에 제3국에서 별도협상을 진행키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별도협상은 미국측에서 먼저 요구했으며, 우리도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연내에 시행하기 위해서는 빨리 협상을 매듭지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결국 막후협상 같은 건 없을 것이라던 한미FTA 팀장의 공언은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휴지조작이 됐고, 이후 국민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막후협상이 거꾸로 의약품 협상의 주요 과정으로 마치 당연한 것처럼 둔갑해 버린 것이다.

그런가 하면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6년 8월 16 의약품 협상 관련 “양보는 할지 몰라도 국민을 속이진 않을 것”이라고 말하더니 일주일만(8월 24일)에 미국에 양보도 하고 국민을 기만하는 발언을 했다. 미국측의 독립적 이의신청 기구 설치 요구를 사실상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정부는 일찍이 한미FTA 공식 개시선언 직후인 2006년 2월 16일 제6차 대외경제위원회에서『한미FTA 분야별 영향 및 대응방안』란 내부 보고서를 통해 약가에 대한 이의신청 기구 설치를 허용할 계획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뒤 정부 관료들은 이를 부인해왔다.

그러다 8월 21~22일 싱가포르 막후협상을 거친 후 유시민 복지부 장관은 8월 24일 국회 보고에서 “미국측 요구가 일리 있다.”며 독립적 이의기구 설치에 사실상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정부는 그동안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애당초 정부가 내부적으로 계획했던 대로 이의신청 기구 설치를 양보할 생각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는 제6차 대외경제위원회 보고서에 나타난 다른 분야의 양보 방안 즉, 기간통신 사업자인 KT의 외국인 소유 제한 완화, 자동차 세제 단순화 등도 향후 한미FTA 협상에서 정부의 계획대로 진행되거나, 이면 합의를 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추후 검증이 반드시 필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유시민 장관의 '양보는 할지 몰라도'란 표현처럼 의약품 분야는 그렇게 가볍게 양보해도 될 사항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의약품 분야에서 미국측의 요구 하나 하나가 우리 정부가 새로 도입하려는 포지티브 리스트 정책을 무력화시키는 억지 주장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민 건강과 정책주권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것도 쉽게 양보를 해서는 안된다는 게 보건의료 관련 단체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환자·보건의료인·사회단체들은 한미FTA 의약품 관련 협상에 대해 “미국이 싱가포르에서 열린 별도 협상에서 내놓은 16개 요구안 중 2-3개만 들어줘도, 한국의 약값은 2배 이상 폭등할 것”이라며 “미국이 한미FTA 협상에서 한국의 포지티브 리스트 도입을 허용했다고 하지만, 16개 요구안은 포지티브 리스트는 물론, 한국정부의 약가정책을 완전히 무력화 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의약품 협상의 본질은 미국측의 억지 주장에 어떤 것도 쉽게 양보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국민을 속이지 않는 건 정부 관료로서 당연한 처신의 문제다. 결국 유 장관 발언은 본질을 양보하며 훼손해 놓고 나중에 국민에게 무엇을 양보했노라고 사실대로 보고만 한다고 해서 주무 장관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자신만은 선한 사람으로 남겠다는 정치적 멘트에 불과하다.

늘 그래왔듯, 자신의 기존 입장을 바꿀 때 특유의 말솜씨로 자신만은 선한 얼굴로 포장하고, 뻔뻔하게 변신을 꾀하는 '변신의 귀재' 다운 행보를 한미FTA 협상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의약품 분야와 관련 정부의 주장에는 얄팍한 논리로 국민을 기만하는 대목이 적지 않았다.

한미FTA 협상 주도세력들은 포지티브 리스트 제도가 실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의약품 분야를 미국에 양보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우겼다.

그러나 당초 미국측 요구를 받아들여 우리 정부가 2005년 10월에 취했던 조치는 '약값 재평가 제도 개정 작업 중단'이었다. 포지티브 리스트 제도는 다음해인 2006년 5월 3일 그 추진 방침을 확정 발표한 것이다. 비록 약값 적정화 정책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나중에 나온 또 다른 정책이다.

이미 하나를 들어 줘놓고 나중에 추진한 정책을 들이대며 미국의 요구를 들어 준 적이 없다고 우기는 꼴이다. 사실관계를 뒤섞어 궁색하기 짝이 없는 수석침류형 해명이다.

보건복지부는 2002년부터 약가재평가를 통해 '약값 거품'의 일부를 빼고는 있지만 '미봉책'에 그쳐왔다. 따라서 2005년 약가재평가 방식 개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한미FTA 개시 조건으로 미국측 요구를 받아들여 2005년 10월 28일 개정 작업을 일단 중단했다. 그러다 장관이 바뀌면서 2006년 5월 '포지티브' 방식으로 변경을 통한 '수술'을 재시도했다. 그런데 미국측이 이 제도마저 강력하게 철회를 요구하고 있는 새로운 상황이 또 발생한 것이다.

한번 미국측 요구를 들어준 전력이 있기 때문에 이후 미국의 비위를 거슬릴 다른 정책을 시도할 경우 번번이 '약속 위반'이라며 강력 반발하는 형국이 돼버린 것이다. 꼬투리를 잡혀 놓은 결과다.

이를 반영하듯 보건복지부는 약값 적정화 방안을 입법 예고 하면서도 미국측의 눈치를 살핀 흔적이 역력했다.

보건복지부는 당초 이 제도를 '9월중 시행'을 목표로 추진해 왔었다. 그러나 입법예고 기간을 2006.7.26~9.24일까지로, 통상적인 입법예고 기간인 20일보다 훨씬 긴 2개월(60일)로 정했다. 이 과정에는 미국측의 압력이 작용했다는게 중론이다. 미국은 입법예고 시한이 임박해 오자 한국정부에 "입법예고 기간을 60일로 달라"고 유무형의 압력을 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7월 19일에는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가 유시민 장관을 직접 방문했었다.  

정부 내 분위기도 보건복지부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부터 2006년 9월 14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FTA 추진 의지를 확고히 한데다, 협상 주도세력들은 '조기 체결' 의지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의약품 분야에서 미국에 일정 부분 양보를 해서라도 한미FTA 협상 체결을 앞당겨야 한다는 노 정권 핵심층의 '유무형 압박'에 그만큼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또한 정부가 '자발적 자유화 조치'의 일환으로 경제자유구역 내 국내 기업의 영리병원 설립을 허용하는 경제자유구역법 재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도 일각에서 “한국 정부는 영리병원 도입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이미 한국 정부는 한미FTA와 별개로 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병원을 세우도록 했고, 이제는 국내 기업들도 영리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려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즉, 이제까지 한미FTA 협상에서 합의된 것만으로도 한국의 사회공공성이 상당 부분 파괴될 수밖에 없는데도, 이에 더해 한국 정부가 FTA와 별개로 알아서(자진해서) 교육 및 의료의 개방화·시장화를 추진하고 있고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영리병원 도입이라는 지적이다.

의약품 협상 쟁점들    

1. 미국측 요구(의도)와 문제점

미국은 왜 우리에게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 추진의 중단을 집요하게 요구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자국의 값비싼 혁신적 신약들이 보험 적용을 받기 어려워 자국 제약사들의 수익이 줄어들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미국측의 수많은 요구사항들의 핵심은 한마디로 "한국 국민이 값 싸고 좋은 약 먹기 위해 미국기업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다국적 제약회사의 오리지널 신약을 한국에서 오랫동안 비싸게 팔기 위해 한국의 법과 제도, 관행까지 뜯어고치겠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한미FTA 협상 과정에서 약값과 관련한 미국의 최우선적 요구사항은 바로 ‘혁신적 신약의 가치 인정’이다.

현재 미국과 다국적 제약업체들은 한국 정부에 ▲모든 신약에 선진 7개국(A7) 평균 약가 적용 ▲의약품 가격 결정시 물가인상률 반영 ▲의약품(신약) 특허기간 연장(심사·승인 기간 등 반영) ▲특허 대상의 확대 ▲특허와 의약품 허가 업무 연계 ▲신약·유사의약품에 대한 자료독점권(임상시험, 성분 등 신약 개발 자료 접근 제한) ▲독립적인 이의신청 기구, 의약품 의료기기 위원회의 신설 ▲전문의약품에 대한 대중광고 허용 ▲특정 질병 발생시 복제약 강제실시권 사유 제한 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맞서 한국은 ▲의약품 특허만료된 제네릭 품목의 상호 인정 ▲GMP시설 상호인정 ▲생물학적제제(백신제제 등) 허가규정의 투명성 등을 주장했다고 한다.  

◆혁신적 신약 범위 확대는 약값 인상 의도

미국은 모든 신약을 혁신적 신약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기존 약품에 비해 효과가 뛰어나고 부작용이 적은 신약만을 혁신적 신약으로 인정한다. 때문에 혁신적 신약의 약값은 가장 고가로 책정된다. 결국 미국의 주장은 모든 신약의 약값을 올려달라는 의미다.

미국은 동시에 복제약가를 내릴 것도 요구하고 있다. 다국적 제약사들이 내놓는 신약의 기득권에 쐐기를 박겠다는 속내다. 3년마다 약값을 조정하는 약가 재평가제 폐지까지 요구하는 등 기본적인 약가정책까지 흔들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환자들이다. 특허권 강화와 혁신적 신약의 가치 인정 등은 중·장기적으로 약값상승으로 이어져 최악의 경우에는 특정 환자들이 약을 사먹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특히 난치성 질환자들의 상당수가 역설적으로 커틀러 미 협상대표 말대로 약을 먹을 수 없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의약품 특허기간 연장의 문제점

미국은 혁신적 신약에 대해서 특허권 강화 등 강력한 정책적 보호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요구는 먼저 특허 기간을 늘려(연장해) 달라는 것이다. 보통 특허권 보호기간은 20년인데, 의약품의 경우에는 특허출원 뒤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심사 등으로 인해 시판허가를 받을 때까지 3~5년이 더 걸린다. 심사가 늦어져 더 길어지기도 한다. 미국은 이를 모두 인정해 특허존속기간을 늘려달라고 요구한다.

보통의 경우 특허가 만료되면 국내 제약업체들이 복제약(제네릭)을 생산할 수 있게 돼 해당 특허 의약품을 생산하는 다국적 제약업체는 손실을 입게 되지만, 이렇게 되면 특허기간이 실제로 최대 25년까지 늘어나게 돼 신약을 소유한 다국적 제약업체들은 국내에서만 연간 수백억 원의 추가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반면 이런 요구는 국내 제약사의 제네릭 의약품의 시판을 막자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요구대로 특허권 강화가 이뤄질 경우에는 국내 제약산업이 큰 타격을 받을 게 불보듯 뻔하다. 오리지널 약품의 독점기간이 연장되고, 특허권이 만료돼야 생산할 수 있는 복제약의 출시도 그만큼 늦어지기 때문이다. 복제약 생산에 치중하는 우리 제약업계로서는 수익성 악화가 걱정이고, 국민들도 비싼 오리지널약을 먹어야 하니 당연히 부담이 늘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국내에서 판매되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의약품들 가운데 매출액 기준 상위 10개 제품의 특허기간을 5년씩만 연장해도 우리나라에 약 1500억 원의 손실이 난다는 분석이 나왔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건약)는 2006년 8월 18일 '한미 FTA에서 미국 측 의약품 분야 특허부분 요구안(예상)이 국내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자료를 통해 "미국측의 요구사항들이 국내에 그대로 적용될 경우 현재보다 최소 5년 이상의 실질적인 특허 연장이 이뤄지며, 브랜드 의약품은 추가로 5년의 독점기간을 확보하게 된다"며 "특허기간이 5년만 연장됐을 때 발생될 수 있는 손실액은 전체 전문의약품 시장에서 특허가 만료되지 않은 다국적 제약기업의 톱 10 품목을 기준으로 1535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의약품 지적재산권 보호/특허와 의약품 허가 업무 연계/신약.유사의약품 자료독점권

일각에선 의약품 협상의 핵심은 지적재산권이란 말도 있다.

실제 ‘한미FTA 1차 협상 대응방향’을 보면 의약품·의료기기 작업반에서 미국 측은 7개 요구사항 중 3개 항을 지적재산권에 할애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특허와 의약품 허가 업무 연계(신약 보호기간 중 개량신약·복제약 허가 금지)▲신약의 안전성·유효성 자료 독점권(date exclusivity) ▲특정 질병 발생 시 복제약 강제실시권 사유 제한 등 특허 부문에 있어 다국적 제약사의 우월적 지위를 요구하는 항목이다.

먼저 '의약품 허가와 특허 연계(해치-왁스만법)'는 의약품을 허가하는 것과 특허 심사를 연계하는 것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의약품을 허가하는 과정에서 해당 의약품이 기존의 다른 의약품의 특허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미리 확인한 다음에 허가를 내주라는 것이다. 즉, 특허 기간이 끝나 다른 회사에서 제너릭 약품을 만드는 경우 특허권을 가진 제약사에서 제너릭 약품이 특허를 침해했는지 검토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다.

이는 국내 제약사들이 만드는 제너릭 의약품의 생산을 최대한 뒤로 늦출 수 있는 제도로, 특허를 가진 미국 등의 다국적 제약사에게는 의약품 독점을 강화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제도다.  미국에서는 이런 제도를 통해 특허를 가진 제약사가 소송을 하는 경우 30개월 정도는 제너릭 판매를 미룰 수 있다고 한다.

기간에 따른 의약품의 판매 경향을 보면, 보통 한 신약은 출시된 지 6~7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리고 이후 제너릭이 나오면서 그 판매량이 줄어든다. 따라서 3년 정도를 연장하는 것은 특허를 가진 다국적 제약사에게 엄청난 이윤을 가져다 줄 수 있다. 반면 3년 동안 제너릭 약품이 나오지 않아 환자들은 비싼 돈을 들여 신약만을 먹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특허권의 유효성을 신뢰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등록된 특허권 중 약 30% 정도가 사실은 잘못 등록된 것이다. 이에 따라 특허권자가 권리침해를 이유로 제기한 소송에서도 특허권자가 패소한 사건이 훨씬 더 많다. 이러한 통계를 볼 때 특허가 등록되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식약청이 제네릭 의약품의 판매 허가를 해 주지 않는 것은 잘못 등록된 특허권으로 인한 비용을 제네릭 제약사에게 전가하는 꼴이 된다. 그 결과 제네릭 제약사의 시장진입을 막아서 환자들이 값싼 의약품에 접근할 권리를 제한한다.  

또 현재는 식약청 판매 허가 시 특허 부분이 크게 작용하지 않아 국내 제약사가 다국적 제약사의 신약 특허보호기간 중 원료는 똑같고 염기(鹽基)만 다른 개량신약을 출원할 수 있다. 염기는 약의 소화나 흡수를 돕는 성분이다.

하지만 미국측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상황이 180도 달라진다. 약품 허가 시 기존 신약의 특허권이 강화돼 특허보호기간 중 국내 제약사가 제조법을 바꾸거나 염기를 달리해도 개량신약을 만들 수 없다.

의약품 허가와 특허 연계 제도와 관련 미국은 호주와 협상에서 이를 강조한 바 있다. 미국은 또 그동안 우리와의 통상 회의에서도 “(한국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청과 특허청 간의 직접적 연계가 없다”며 “식약청은 특허청과의 연계를 통해 특허기간 중 제네릭 제품의 시장 진입을 방지할 책임을 명백히 포기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임상 시험 등 자료독점권'의 경우 자료독점권이 풀리면 해당 자료를 활용해 약이 암 등 부작용을 일으키는지 검사하는 동물실험 등을 생략할 수 있다. 그 기간만큼 개량신약이 빨리 나와 원래 신약과 경쟁하므로 약값을 낮출 수 있다.

하지만 이 자료독점권이 연장되거나 강화되면 그만큼 개량신약이 나올 수 있는 시기는 뒤로 미뤄지는 것이다. 특허 보호기간 이후에 개량신약을 허가받으려 해도 미국 기업이 기존 신약의 안전성·유효성 자료를 독점하고 있다 보니 자료 제출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료독점권도 다국적 제약사의 신약 독점 기간이 그만큼 길어지는 제도로, 이 역시 미국에 크게 유리한 쟁점 사항이다. 반면 환자들은 비싼 돈을 주고 신약을 구입하는 것이 불가피해진다.

특히 '강제실시권 사유 제한'이 이뤄지면 정부의 전염병 대책이 위협받을 것이 우려된다. 예컨대 조류 인플루엔자(AI)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해도 정부가 직권으로 복제약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해져 다국적 제약사의 신약을 천문학적 금액을 주고 구입해야 한다.

이에 대해 박실비아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책임연구원(의약품산업팀)은 “우리 정부는 이번 협상에서 ‘양자간 무역협정이 개발도상국에서 의약품 접근성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지식재산권 조항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세계보건기구의 권고 등을 내세워 환자들의 의약품 접근권(건강권)은 무역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논리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독립적 이의신청 기구, 의약품 의료기기 위원회 설치 요구 의도

미국은 또 약값 결정과 재조정 과정에서 미국측이 따질 수 있도록 의약품 등재과정의 각 단계마다  ‘독립적 이의신청 기구’, ‘의약품 의료기기 위원회’ 등을 설치해 적극 개입, 약품 가격의 인하를 막고 더 올려 받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의약품 의료기기 위원회’는 국내 약값정책에 미국이 개입하는 또 다른 구조이며, 이로써 미국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설치될 약제급여평가위원회, 보건복지부내 약제급여조정위원회, 독립적 이의신청 기구, 의약품 의료기기 위원회 등으로 3중, 4중의 개입 구조를 만들겠다는 것으로 지나친 요구라는 지적이 많다.

보건복지부는 이를 두고 “국내 정책 결정 과정이 미국 또는 미국계 회사의 이해관계와 상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또 ‘절차의 투명성’을 강하게 밀고 나왔다. 이와 관련 미국은 약값 및 급여기준 결정이나 관련 제도를 변경하려면 입법예고, 고시, 구체적인 행정결정 등 단계마다 미국 정부는 물론 미국 제약회사에 그 내용을 통보하고, 의견제출 기회를 보장하며, 정보요청 요구에는 의무적으로 응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포지티브제 도입 반대 이유와 의미

앞서 설명했듯이,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 중단은 의약품 분야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것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다. 신약의 특허 보호권 강화 등 더 큰 요구 사항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포지티브 방식은 그 자체로는 다국적 제약사에 결코 불리한 제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분야 여러 전문가들은 이 방식은 미국 등의 다국적 제약사는 이미 축적된 경험이 있으나 우리 정부는 처음이므로 오히려 불리할 수도 있다고 전망한다.

포지티브 방식에 있어 약값 결정의 잣대가 되는 경제성 평가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약값을 내리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런 경험을 수년 이상 축적해 온 미국 등이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다국적 제약사들은 협상력이 강해 제도가 바뀌어도 제네릭 업체보다 피해가 크지 않다는 것. 설령 선별 등재를 받아들여 값이 좀 떨어진다 해도 특허권을 몇년 연장 받으면 추가 독점의 혜택이 더 크다.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국은 한미FTA 본협상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새로운 약값 정책 도입을 '하나마나한' 제도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요구들을 집중적으로 쏟아내며 압박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의 이런 요구들이 수용되면 오리지널 신약 처방 증가, 약가 인상 초래, 건강보험공단의 재정 악화로 결국엔 국민 건강과 경제에 큰 손실을 입힌다는 점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특정 환자들이 약을 사먹을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정부가 포지티브 리스트(선별등록제)로 전환, 약값 재평가 제도 개선 등 약값 적정화 정책 등을 '실효성 있게' 추진하지 못하고 미국의 압력으로 그 취지가 훼손된다면, 이는 건강보험 가입자인 전 국민이 부담하는 약값을 정부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미국의 다국적 제약회사가 정하는 대로 따르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일 정부가 협상과정에서 포지티브제를 지켜내는 대신 이의신청 기구와 특허기간 연장 등을 허용한다면, 약가결정에 다국적 제약사의 입김이 강력해지고 고가의 약가가 유지돼 국민의 약제비 부담이 오히려 늘어날 수도 있다.

오히려 포지티브제 도입이란 명분만 얻고 실리는 잃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2. 보건복지부 약값 적정화 방안(5.3대책)의 허점과 대안

보건복지부가 ‘뚝심’을 가지고 추진하는 듯 보이는 새로운 약가제도가 그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아 현행 약가제도 문제점을 개선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보건의료 관련 시민단체들은 복지부의 포지티브 리스트 도입에 대해 2006년 7월 31일 기자회견을 갖고 “실효성 없는 포지티브 리스트는 약가 거품을 없애지 못하고 특히 신약에만 적용된 포지티브 리스트는 무용지물이며, A7 기준 약가결정방식이 약가 거품을 확대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선별등재방식(포지티브 리스트)을 도입하고, ‘약가제도는 FTA 협상대상이 아니다’는 정부 스스로가 한 약속을 지키라.”며 한미FTA 협상의 거래물로 삼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또 이같은 우려와 대안들을 담은 <약제비 적정화 방안 입법예고안에 관한 보건의료 관련 시민사회노동단체 의견서>를 2006년 9월 25일 정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들이 정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지적한 문제점과 대안으로 제시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약에만 적용하려 하는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선별등재방식)을 모든 의약품에 확대 적용하고 이행기간 동안 약가재평가를 확실히 해야 한다. 예를 들어 기등재 의약품의 경우 이제까지의 사용량을 조사하여 우선순위 의약품 군을 설정하고 일정기간에 걸쳐 포지티브리스트 적용 여부를 평가하면 전 의약품을 대상으로 포지티브 리스트 도입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다.
따라서 20,564개 품목에 달하는 기등재 의약품에 대해서도 선별등재방식 확대 적용(특히 건보 재정에서 가장 큰 점유율 차지하고 있는 '항생제'부터 목록 정비) 및 구체적인 계획(로드맵)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신약 약가 협상시와 약가 재평가시 A7 국가를 가격의 기본으로 삼는 현행 약가 산정 구조에서 '실거래에 근접한 가격'을 기준으로 삼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
따라서 약가 산정시 반드시 경제성 평가가 수반되어야 하며, 외국의 약가와 비교.참고시에는 약가 책자가  아닌, 실거래가 조사를 통한 실제 거래되고 있는 약가를 기준으로 산정해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 약값 산정의 기본은 A7 국가의 기준 약가 책자이다. 그러나 문제는 기준 약가집이 실제 거래하고 있는 가격보다 높다는 사실이다. 혁신적 신약이 아닌 일반신약의 경우도 '상대 비교가'를 통해 약값을 정하는 데, 문제는 상대조정가격이 A7조정평균가보다 높게 나오는 경우가 있고 비교 대상이 되는 약물도 최근에 등재된 의약품을 우선 적용하기 때문에 가격이 높게 나올 수 밖에 없다.

▲한국의 경제적 수준과 맞지 않는 선진 7개국(A7) 기준은 철회하고 우리나라와 경제수준이 비슷한 나라들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복제약에 대한 상한금액 조정안에서 1개 제품만 등재되어 있는 경우는 기 등재된 제품 상한금액의 64%를 56%로 조정해야 한다.

▲의약품의 선별등재시 평가, 조정 등의 과정을 충분히 공개하고, 제약회사의 의견 수렴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진영의 의견 수렴 및 정책의견 개진을 위한 창구가 마련돼야 한다.

▲혁신적 신약에 대한 개념이 모호한 상태에서  일부 신약에 대해 가격 및 시장진입의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혁신적 신약 규정'은 폐기해야 한다.

▲강제실시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
▲가격-수량연동 제도 도입에 따른 후속 조치 마련
▲지불제도의 개선
▲다제 처방 방지, 같은 효능군내 저가약이나 제너릭 의약품의 사용을 장려하기 위한 제도(예 : 독일의 약가 총액예산제) 도입이 필요하다.

독립적 의의신청 기구나 별도 위원회 설치는 반대한다.
제약사들에게 심사평가원과 건강보험공단의 결정사항이나 과정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가 충분히 보장돼 있기 때문에 독립적 이의신청 기구나 별도 위원회 설치는 낭비적 행정절차이자 정부의 결정을 번복하고 제약사의 개별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된 사항임으로 정부의 약가정책 결정권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포지티브 리스트 제도가 다국적 제약사에게 별로 불리하지 않다. 2차 본협상에서의 미국의 부분적인 파행 감행은 협상전략이 뿐이다. 미국의 의약품 전략은 다양한 특허 연장과 약가 산정시 제약회사 참여보장 등을 통해 실제적인 이익을 취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약가 적정화 정책을 비롯하여 건강보험과 관련된 제도는 국민 기본권인 건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회공공제도로서 무역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따라서 한미 FTA의 의제가 될 수 없고, 한미 FTA와 연계되어서도 안된다. 약제비 적정화 방안은 한미FTA 협상과 상관없이 연내부터 시행되어야 한다.


3. 정부, 제약업계 입장과 전망

우리 정부의 일관된 입장은 국민건강과 직결된 공공정책은 무역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미FTA 협상 과정을 지켜본 많은 이들 중 정부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미FTA 본협상에서 미국측은 자국의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신약의 특허기간 연장, 혁신적 신약의 범위 확대 등을 요구하고 있고, 이를 수용할 경우 신약 개발에 앞장섰던 기업들은 시장성과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신약 개발의 포기나 축소를 하게 된다. 투자에 비해 회수가 불투명한 신약개발에 투자하느니 투자한 만큼 쉽게 이익이 나는 제네릭(복제약)이 낫다는 이유로 제네릭 개발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실제로 국내 기업들은 제네릭 부문을 강화하고 있다.

한미FTA로 신약 대국을 꿈꿨던 국내 제약산업에 그만큼 적신호가 켜졌다. 신약 개발 포기와 제네릭(카피약) 전환으로 뒤숭숭한 제약업계에 강력한 한미FTA 폭풍이 불어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은 계속 만들기가 어렵고, 신약 개발의 강자인 다국적 기업들은 자기들의 방어와 이익 확대를 위해 계속 한국의 중소업체들과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국내 제약업체의 난립 등 해결되지 않은 구조적 문제들까지 맞물려 제약산업의 기반이 붕괴될 것이란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더욱이 정부에 의해 값이 싸고 치료 효과가 높은 의약품을 선별해 보험을 인정하는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마저 도입될 예정이어서 제약업계에 미칠 충격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따라서 한미FTA 돌풍으로 자칫 국내 제약산업이 뿌리째 흔들려 제약시장을 송두리째 다국적 기업에 내주고 ‘제약주권’마저 상실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몇몇 국내 재벌계열 제약사는 느긋하다. 대부분의 서민과 중소업체의 우려와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투자 않고 쌓아둔 막대한 '실탄'을 동원 M&A를 통해 알짜 중소 제약회사들을 먹어치우겠다는 속셈이다. 초대형 업체로 탈바꿈하면서 독과점 체제를 갖출 수 있는 기회로 한미FTA 정국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 한미FTA 의약품 협상- 용어 해설 및 협상 진행 일지(참여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연대, 2006.9.26)

☞ 한미FTA 의약품 협상 '관련자료 및 보도기사' 모음(참여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연대, 2006.10.4)

(한미FTA 역사 쓰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 한미FTA 관련자료를 더 보실 분들은 참정연 홈페이지( http://www.cjycjy.org/ )를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대자보> 편집위원. 항상 이 나라 개혁과 진보적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쪽에 서 있고자 하는 평범한 생활인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6/10/04 [17:10]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