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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모르실거야... 다 그런거지 뭐"
[오동명의 취중진언] 송년회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들은 배신과 이별
 
오동명   기사입력  2005/01/02 [14:21]
친구는 굳이 노래방으로 가잖다. 노래라도 불러대야, 아니 질러대야 속이 편해질 수 있단다. 속이 답답했던 게다. 아니 콱 막혀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라 했다. 그는 사랑을 떠나보내는 날이라고 했다. 사랑을 운운하는 친구만을 두고 나 혼자 집으로 돌아올 수 없어 노래방에 동행했다. 
 
마이크를 붙잡자마자,

“내가 전에 말했잖아요. 당신을 사랑했다고. 하지만 모-르실 거예요. 당신은...”

 
채인 주제에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아직 미련이 남은 겐가. ‘당신 당신’ 좋아하시네.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야 인마, 너 참 한심하다. 너 싫다고 떠난 년을 뭐 그리 가슴에 붙들고 있는 거야? 그 년, 널 버리고 돌아서자마자 딴 놈 꿰 찼다며? 미련 떨지 말고 마이크 이리 내놔 봐.”
 
조용필의 ‘허공’이 이 친구한텐 제 격이겠다 싶었다.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에...... 가슴 태우며 기다리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 년. 잊는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미련이 남아. 돌아선 마음 달래보기엔 너무나도 멀어진 그 년.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 슬픈 옛 이야기. 스쳐버린 그 날들 잊어야할 그 말들. 허공 속에 묻힐 그 공약.”
 
원 가사의 ‘그 대’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았다. 친구의 일방적 실연은 나에게도 미움으로 남았다. 이 친구, 이젠 마이크를 입 속에 집어넣을 듯이 하고는 절규한다.
 
“무슨 까닭일까요. 울고 싶은 이 마음. 눈물을 글썽이며 허공만 바라보네.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어떡하라고. 내가 미워졌나요. ... 내 말 좀 들어봐요. 나는 어떡하라고.”
 
어찌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엔 원래 믿을 만큼 처신한 여자가 아니라서 이렇게까지야 하고 그의 사랑을 의심하기도 했었는데 그 동안 사랑에 빠져도 엄청 빠졌었나 보다. 친구 놈 주변엔 여자가 몇 있었다. 다 별로 였으나 혼기를 놓친 이 친구는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다. 다른 여자는 너무나 형편이 없었다. 우리들이 나서서 그래도 좀 나은 편에 속하는 이 여자를 적극 밀었다. 이렇게 차선으로 선택한 여자. 그러나 친구는 이왕에 자기가 선택한 여자라며 정말 끔찍할 정도로 사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전 상상으로조차 받아보지도 못한 사랑을 받으면서 그녀는 오히려 자만과 오만에 빠지기 시작했다. 스스로 잘 나서 자기가 한 남자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했다.

착각은 급기야 ‘너는 어차피 나를 사랑하게 돼 있어. 너는 나 말고 달리 좋아하는 여자가 없잖아?’하며 겉돌았다. 그 전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던 이들과 어울리더니 이젠 노골적으로 내놓고 사랑행각을 벌이는 뻔뻔함도 서슴없이 해대고 있었다. 자기 하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놈 저 놈 하고만 싸돌아다니며 그 자들이 워낙 돈 있는 이들이라서인지 얻어 입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옷도 그들과 비슷하게 갈아입고 다니는, 제 얼굴과는 절대 맞지 않는 꼴로 추태를 부렸다. 이러니 과거 남자인 순정파 친구는 안중에도 없었다.
 
사랑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지만 배신을 때린 자의 사랑은 용서받을 수가 없다.
 
“이 나이에 너 참 기특도 하다. 아직도 사랑을 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니.”

내 마음 속엔 친구보다 더 증오가 일고 있었다. 이런 착한 친구를 저버리고만 여자가 무지 괘씸해지기 시작했다. 문득 김민기의 ‘친구’가 부르고 싶다.
“검푸른 바다 위에 비가 내리면...... 무엇이 산 것이요. 무엇이 죽었소. 눈 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그는 잔뜩 술에 취해 있었고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가 산 것이고 누가 죽었을까?’
 
술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가는 친구의 따뜻한 마음에서 난 그가 산 자이며 다른 놈의 품 안에서 히디득 웃음을 팔고 있을 그의 옛 여자가 바로 죽은 자임을 안다. 노래방 도우미를 불러야했다. 이 미련퉁이 친구의 품에도 돈만 알고 아무 품에나 비집고 들어올 여자를 안겨줘야겠다 싶었다.
 
“아저씨들, 먼저 재미 다 보고 이제야 우릴 불러? 여기서 재밌게 놀아줄 테니 2차 더 쏘는 거야. 약속?”
 
애교가 아니라 추파였다. 그러나 어쩌나. 애시당초 이런 목적으로 부른 것을. 친구는 여자가 들어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또 마이크를 붙잡는다.
 
“꽃잎은 바람 결에 떨어져 강물에 흘러가는데 떠나간 그 사람은 지금쯤 어디쯤 가고 있을까. 그렇게 쉽사리 떠날 줄은 떠날 줄 몰랐는데 한 마디 말없이 말도 없이 보내긴 싫었는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저 아저씬 실연 당했구나. 내가 오늘 밤 더 꼭 껴안아줘야겠는 걸?”
 
어디쯤 가고 있든 지금 누구 품에 안겨 있든 뭐가 그리 중요하던지. 나는 도우미에게 눈짓을 보이며 친구를 챙기라 했다.
 
“내가 노래 하나 선물해야겠다. 버림받은 자에게 딱 맞는 노랜데.”
 
우리와 달리 악보책을 뒤지지도 않고 번호를 누른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뚜리두바 뚜리두바. 이 한 마디였었네.
 잘 있어요 잘 있어요. 뚜리두바 뚜리두바. 인사만 했었네.”

 
미련일랑 두지말라는 말이었다. 앗싸하게 헤어져라 했다.
 
술 기운이었을까. 체념이었을까. 아님, 도우미의 밀착서비스였을까. 친구가 이젠 이광조를 불러낸다.
 
“아 당신은 당신은 누구시길래 내 맘 깊은 곳에 외로움 심으셨나요. 그냥 스쳐지나갈 사랑이라면 모르는 타인들처럼 아무 말 말고 가세요. 잊으려면 할수록 그리움이 더욱 더 하겠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을 난 난 잊을 테요.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
 
마지막 소절, ‘난 난’에선 결연한 마음이 가득 섞여 있었고 후렴구 ‘아아아아아’를 울부짖을 때는 절망을 쏟아내고 있었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게다. 비로소 떠난 여자의 실체를 알게 되었던 게다. 역시 비록 한번 안기고 말 여자라 해도 여자는 여자로 잊어버려야 한다. 변심이든 변절이든 인간의 가벼움을 탓할 수밖에. 도우미가 이번엔 노래와 몸이 아닌 말로 또 하나를 가르쳐준다.
 
“나도 사랑을 해봤는데 그게 말이지 강아지만도 못하더라고. 떨어지면 방금이라도 죽을 것 같이들 유난떨지만 그게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년놈의 품에 안겨 금세 잊어버리더라고. 나도 그랬어. 잊으려고 딴 놈 품에 안겨봤지만 그 때뿐이야. 내 지금 이렇게 몸으로 때우고 살지만 나름의 지조는 있거든. 홧김에 서방질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아주 추하게 보이더라고. 내가 오늘 한번 품어줄게. 그리고 잊어버려. 돌아선 년,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아. 이게 인간이야. 하지만 강아지는 안 그래. 사랑하는 만큼 또 사랑으로 돌아오는 게 강아지거든. 어쩌면 인간이란 게 강아지만도 못한 거야. 그래서 난 지금 강아지를 키우고 살아. 아저씨한테 한 마리 분양할까? 우리집 강아지가 암년이거든.”
 
이러면서 이승철의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를 불러주겠단다.
 
“이 노래, 실연 당한, 아니지. 실연 당한 게 아니라 사랑을 빼앗아간 거지? 그래도 사랑을 품고 사는 아저씨한테 내가 특별히 불러주는 거야. 가사를 곱씹어보며 들어봐.
 
‘소리내지마. 우리 사랑이 날아가버려. 움직이지마. 우리 사랑이 약해지잖아. 얘기하지마. 누가 듣잖아. 다가오지마. 우리 사랑이 멀어지잖아.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나는 너를 보고 있잖아. 그러나 자꾸 눈물이 나서 널 볼 수가 없어.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우린 아직 이별이 뭔지 몰라. 우린 아직 이별이 뭔지 몰라.’
 
내가 무식하긴 하지만 문자 하나 좀 써볼까?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더라고. 유식한 아저씨들은 이 말 잘 알지? 아저씨가 사랑한 게 헤어진 여자야? 아닌 것 같은데. 아저씬 그 여자의 마음을 사랑했겠지. 그 여자가 마음이 변했을 뿐 아저씨의 고운 마음은 변하지 않았어. 나중에 보면 변할 것들은 변할 것들끼리 모이더라고. 사람만 바꿔대면서도 그들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그런 류들 끼리끼리 놀라고 해. 이걸 유유상종이라 한다며? 아저씨의 눈물을 보고 내가 이 노랠 불러준 거고 아저씨의 그런 소중한 마음, 그런 허잡쓰레기 같은 여자  하나로 잃지 말고 살아. 여자는 버리면 되지만 마음을 상하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거든. 아저씨, 너무 착하다.”
 
윤항기의 이런 노래가 있던가?
 
“다 그런 거지 뭐 그런 거야. 그러길래 미안 미안해.”
 
돈 많고 빽 좋은 남자에게로 간 친구의 옛 여자는 이러면서 돈 없고 힘없는 친구를 떠났을까? 뻔뻔한 여자! 이런 잡쓰레기 같은 여자에게 마음을 주고 2년이나 살았다니, 이 바보 멍충아! 이번엔 내 짝 도우미가 말을 보탠다.
 
“불쌍한 건 실연 당하는 쪽이 아니라 버리고 떠나 이놈 저년 품에 안기는 것들이지. 자기깐엔 자기가 꽤 잘난 걸로 알고 있지만 시간 지나봐 봐. 힘 없어지고 돈 떨어지면 거들떠도 안 보는 게 인간이거든. 이러면 아주 궁색해지는 거지. 돈 떨어지기 전에 돈 챙기려 들고 얼굴 잘 팔릴 때 한 몫 잡으려고 든다 이거야. 꼴 아주 추잡스러워지는 거지. 불쌍한 건 누구?”
 
친구가 다시 노랠 부르기 시작했다.
 
“가을잎 찬 바람에 흩어져 날리면 캠퍼스 잔디 위에 또 다시 황금 물결. 잊을 수 없는 얼굴 얼굴 얼굴들. 하늘엔 조각구름 무정한 세월이여. 꽃잎이 떨어지니 젊음도 곧 가겠지. 머물 수 없는 시절 시절 시절들. 꽃이 지네. 가을이 가네. 세월이 가네. 젊음도 가네.”
 
나는 이 노랠 가사를 바꿔 다시 불렀다.
 
“하늘엔 조각구름 무정한 권력이여. 자리서 물러나면 감옥에 또 가겠지. 씻을 수 없는 변절 변절 변절들. 세월이 가네. 5년이 가네. 물러나야 하네. 인생 종치고 마네.”
 
(기회주의와 실용주의를 분간할 줄 모르는 오만방자, 파렴치졸, 무지몽매한 변절 권력자에게 이 글을 띠우노라. 이자정회라는 고사성어는 권력의 맛을 알고 그것을 말초혈관 혀끝 맛으로만 느끼고 미식으로 누려본 자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그는 이미 다시 만날 수 없는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어차피 계속될 그의 변절을 재미있게 눈 여겨 지켜보자. ‘잊지 말자 6.25!’가 아니라 ‘잊지 말자 변절자!’다. 꿈이 없는 자에게선 절망도 없다. 소망을 절망으로 갚아오는 자에게 용서는 없다. 왜? 남의 마음을 속여 짓밟은 자는 언젠가는 또 그 짓을 할 터일 테니까. 돈을 훔친 자는 미워도 용서가 되지만 마음을 배반한 자는 결코 용서할 수가 없다.)
 
 
오동명 작가는 1957년 생으로 경제학을 전공했고 중앙일보 사진기자를 지냈다. 직업인이 아닌 직장인으로서 신문사에 근무할 때 3년에 한 권 꼴로 책을 내겠다는 계획을 직장을 그만 두고 변경했다. 1년에 한 권은 꼭 내겠다고. 별 다른 재주가 없어서이기도 하다. 그 약속을 아직까지는 지키고 있다.
2000년엔 <당신기자 맞아> 증보판을, 2001년엔 <신문소 습격사건>을 냈고, 2002년엔 소설<바늘구멍사진기>, 2003년엔 사진취미 책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가 시중에 나와 있다. 2004년엔 여행책 <5만원 2박3일>을 펴냈다.(미디어오늘 작가소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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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1/02 [14:2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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