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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왕자, 그리고 '예수는 없다'
- 일부 완고한 교회를 향한 한 신학자의 문제 제기 ba.info
 
지오리포트   기사입력  2002/03/29 [13:23]
"예수를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문제인 것이 그릇 믿는 것이다. 예수를 바로 믿지 않는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게 낫다."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김진홍, 한길사) 중에서

‘이집트 왕자’라는 만화영화가 있다. 어린이용 책으로도 나온 스토리다.
아주 예전, 초등학교 무렵이었던가 지금은 기억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십계'를 떠올리게 하는 '만화' 영화였다. 그 영화를 비디오로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와 함께 본 적이 있다.

{IMAGE2_RIGHT}아이는 처음,이 만화영화가 퍼뜨리고 싶어했을 법한 이데올로기 보다는 박진감 있는 화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모세가 왕자 시절,형 람세스와 벌이던 마차 경주, 모래가 무너져 내리는 장면 등.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질문이 많아졌다. 난감한 질문이었다.
왜 이집트에 있는 모든 물이 피로 변하는지, 피로 변하는 재앙에서 왜 이스라엘 백성은 제외되고 이집트 사람들은 다 죽게 되는지, 왜 하느님이 역병을 퍼뜨리는지, 왜 양의 피를 집의 문설주에 발라 놓으면 역병이 피해 가는지….

9.11 테러 이후 이슬람권과 미국,유태계의 관계가 사회적 관심사가 된 이후 보게 된 이 영화는 할리우드 자본이 무엇에 의해,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 재미삼아 볼 만화영화가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기독교와 이슬람,혹은 기독교와 타 문화권을 어떻게 '나누어 기억하게'끔 가르치는지를 손쉽게 알게 했다.▶이집트 왕자 중 장면들. ⓒ드림웍스  

그러나 문제가 아이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이의 질문에 속 시원히 답변을 못한 나 역시 아이의 수준 만큼의 의문을 떨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랑을 가르친다는 기독교와 그 교리의 뿌리에 해당하는 모세의 출애급.
기독교의 교리를 접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의문들.
왜 하느님은 유대인에게는-혹은 유대인에게만- 예언자를 내려주시고 어려움에서부터 구원해주셨을까. 이집트의 많은 신들은 죄없는 이집트인들이 당하는 것을 왜 그냥 보고만 있있던 걸까. 좀더 근원적으로 수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강조하듯 '예수를 믿어야 천당에 간다'는 논리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인가. 기독교 속에서의 남녀차별은 과연 온당한가…

출애급의 신화는 '부족신화'로서의 면모에 충실

이집트 왕자를 보면서 느꼈던 불편함은 캐나다 리자이나대 종교학과 오강남 교수가 쓴 '예수는 없다'를 통해 많은 부분 해소됐다.
비교종교학자인 오강남 교수는 용감하게-어쩌면 무모하게- 기독교의 본질을,그리고 출애급으로 대표되는 유대교의 본질을 설파한다.

유대교가 가지고 있는 출애급의 신화는 '부족신화'로서의 면모에 충실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도탄과 실의에 빠져있는 유대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그들을 고통에서 구원하려면 출애급과 같은 신화가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부족신앙으로서 출애급이 갖고 있는 '당연하고도 불가피했던' 신화가 수십세기를 넘어서 이곳,대한민국에서도 곧이 곧대로 숭배받고 있는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IMAGE1_LEFT}“히브리 성서(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스스로 하신일을 직접 일기(日記)처럼 적어 놓으셨다가 나중 선지자에게 불러주시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적도록 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의 역사를 이해할 때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자기들을 도왔다고 믿은 바를 적어 놓은 신앙고백의 기록이다. 한마디로 이 이야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이스라엘 부족이 가지고 있던 신관(神觀), 그 신관에 비친 하나님일 뿐이다.”
그러면서 오강남 교수는 “이런 신은 자기들이 미워하는 나라는 무조건 다 미워하는 신이어야 한다. 이렇게 신이 자기들만의 신이라고 보는 신관을 ‘부족신(tribal god)’의 신관이라 한다”고 덧붙인다.

그가 비판하고자 한 바는 우리나라의 상당수 기독교인들이 ‘성경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서, 그것은 일획일점의 틀림도 없다는 것’으로 맹신하고 있는 현실인 듯하다.
오강남 교수는 그 현실을 ‘근본주의’라고 표현한다.

“성경무오류설, 동정녀 탄생, 기적, 육체부활, 인간의 죄성, 대속, 예수의 재림과 심판 등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인정하고 의심없이 믿어야 ‘잘 믿는 것’이고, 이 ‘근본적인 믿음’을 잃어버리면 기독교도 기독교인도 있을 수 없으므로 이것만은 절대적으로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근본주의자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주장이 기독교의 보편적 믿음 내용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런 근본주의적 입장은 주로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은 나라’에서만 서식하고 있을 뿐 서방 유럽 같은 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기현상이다…”

생활 속에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해 나가는 게 중요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근본주의’의 아집에 빠지게 된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기독교의 전파 과정에도 그 뿌리가 있음직하다.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제국주의적 모습으로 밀려들어온 측면이 있다.
주로 미국 쪽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개화기 시대의 기독교는 한국적인 모든 토속과 신화,오랜 믿음들을 '시급히 버려야할' 사탄의 모습으로 규정하고 깨부수기에 일관했다.

황석영의 소설 <손님>은 서양으로부터 밀려온 기독교를 공산주의 사상과 함께 '손님'으로 규정한다. 제국주의적 선교의 결과는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자신의 종교를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혹은 토속신앙에 대한 반동으로 살인을 낳고 도피를 낳기도 했다고 황석영은 얘기한다.

청교도적인 미국의 신앙이 곧이곧대로 전해져오면서 한국만이 세계에서도 거의 유일하게 '성경을 역사적 실체'로 받아들이고,그 이외의 논의는 모두 '이단'으로 규정하는 근본주의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릴 때부터 희미하게나마 가져오던 기독교에 대한 많은 의문들을 새삼 되짚어보게 한다.

지금 세계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무한 금융자본이 획일적 세계화를 기도하고 있고 그 대척점에는 , 다원성의 사회,나와 다른 너, 너와 다른 나를 인정하고 지향하는 목소리들이 서서히 일고 있다. 신학에서도 마찬가지 일 터이다.

선교를 할 필요가 없다는, 그 보다는 생활속에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해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오강남 교수의 주장,
‘신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다만 신을 표현할 뿐’이라는 ‘춤추는 여신학자’ 정현경 교수(미국 뉴욕 유니언신학교)의 문제 제기,
그리고 별도의 교회 건물을 갖지 않고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정신에 바탕을 두고 평신도 중심으로 신앙을 싹 틔우는 새길교회의 노력…

이집트 왕자를 함께 봤을 때처럼 대답을 흐렸다

이들의 목소리와 노력들이 아집에 빠져 있는 한국 교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다. 다만 어렴풋이나마 예수의 사랑과 자비가 넓은 누리에 퍼지기 바라는 보통 사람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신격화된 예수에게서 되레 예수의 참모습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건 아닐까하는,예수를 제대로 바라보게 되길 바라는 마음마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그리고 초등학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눈에 비친 한국 교회의 모습은 그리 살갑게 다가오지 않는다.

때때로 철도역 광장등에서 학생들 또는 청년들이 원을 그리고 기타를 치며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본다. 환희에 찬 얼굴들이지만 보는 입장에서 그리 유쾌하진 않다. 자신들만의 '원'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이다. 광장에서...
복음의 노래인데 누가 감히 소음으로 듣겠느냐는 듯한 자신감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 나타나는 전도사도 만난다.
그들을 굳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없다.
하나님을 만난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 주려고 하는 '선의'로 해석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오직 예수만이 구원..." "지옥불에..." 운운하며 다가오면 마음은 금새 싸늘하게 돌아서게 된다.
그들에게서 '사랑으로,자비로 가득찬 하나님의 흔적'을 헤아린 기억이 없다.
확신에 찬 표정 뒤로, 일부 '믿슘니까' 교회의 완고한 모습이 겹쳐지는 건 어떤 연유일까.

그리 새삼스럽지도 않은 느낌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그런 완고한 모습들의 총체가 비대하게 자리잡은 종교 권력의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리고 그 권력 또한 열린 사회의 행보를 더디게 할 요인이 될 것이란 우려에서다.

기독교에 국한된 이야기일 수는 없을 것이다.
종교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제 자식의 대학 합격을 위해' 혹은 '남편의 승진을 위해' 혹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배타적으로 '기도하는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주변의 행복과 평화를 기원할 수 있다면 세상은 더 살 만한 곳이 되리라는 바람이 한낱 이상주의자의 '읊조림'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언젠가 아이의 손을 잡고 거리를 지날 때였다.
아이가 어떤 신축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뭐 하는 곳이예요?”
“응…교회…”
“와, 궁궐 같다!…” “교회는 돈이 많은가봐요?”

이집트 왕자를 함께 보다 질문을 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답을 흐렸다.

오강남 교수가 <예수는 없다>에서 하고 싶었던 말이 어쩌면 아이의 그 짧막한 질문에 대한 답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본문은 본지와 기사제휴 협약을 맺은 "지구촌을 여는 인터넷 신문 지오리포트 http://georeport.co.kr/ "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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