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주장] 존 스튜어트 밀이 장진구에게
 
변희재   기사입력  2002/03/07 [12:32]
존 스튜어트 밀은 반공주의자인가?

  내가 존 스튜어어트 밀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서 언급된 짧은 내용이었다. 10년 전의 일이라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유이다."라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조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 뒤에는 과격한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에 대한 비판이 반드시 따라왔었다.

고등학생들이 다 그러듯이 이런 짧은 문장만 보고,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민주주의자이다." 이 정도만 생각하게 되지, 그의 사상 전반을 다 아울러 검토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일단 시험에 나오는 문제에 제대로 답만 내면 되었으니까.

그러다 대학에 입학한 첫 해에 나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원문을 영어판과 번역본 모두를 통해 읽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정 반대의 이유 때문이었다. 역사학회 신입생 세미나의 첫 주제가 '자유민주주의의 허구성'이었으므로 나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대한 비판적 발제를 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대학생활 중 첫 세미나이자 발제였으니, 지금에 와서야 자유주의자를 자청하는 나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자유론>은 물론 <자유론>에 대한 비판서를 들고 다니던 시절 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아니, 존 스튜어트 밀의 책을 들고 다녀? 그 사람 반공주의자 아니야?"

그런데 문제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존 스튜어트 밀을 반공주의자라 보고 있는 사람치고 그의 책을 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아니,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주의자라 규정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자유론>을 읽은 사람은 내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약간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만큼 한국의 대학생들이 고전 읽기를 게을리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고전을 읽을 수 있는 수업은 전공분야에서도 거의 전무하며 비제도권 수업이라 할 수 있는 사회과학 학회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여전히 반공주의자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해 조금이라도 호의를 갖고 있다면 대학생들의 또 다른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유시민의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에서 언급된 존 스튜어트 밀에 대한 소개글 정도를 읽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경제 사회 문제의 해결 방안에서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자의 의견을 대폭 수용했다. 그러나 자유로운 인간 정신에 대한 억압과 획일화에 대한 우려 때문에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선택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자산계급의 안락하고 풍요한 세계와 근로대중의 빈곤하고 고통스러운 세계로 분열되어 가는 당시의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부의 분배를 좀더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시민은 전체적으로 존 스튜어트 밀을 중용의 미덕을 갖춘 사상가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밀은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중용의 도'를 지킨 사람이다. 그는 자유방임시장의 원리를 승인했지만 실제로 존재한 19세기 자본주의 사회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는 또한 19세기 유럽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적 불평등과 부당한 부의 취득을 비판했지만 유토피안 사회주의자 진영으로 기울지는 않았다. 그는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좀 더 나은 상태로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했다. 밀은 지대에 대해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상속과 증여에도 제한을 두는 한편 노동조합의 긍정적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자유방임시장이 낳은 문제를 완화하고자 하였다."

이런 정도의 평가를 상기해 본다면 존 스튜어트 밀을 반공주의자로 보는 편견에 대해서는 충분한 변명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는 이상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는 치열한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기득권 세력이 활용하는 존 스튜어트 밀.

  사실 외국 학자들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그의 개혁적 혁명적 사상이 지적 레크레이션 정도로 전락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아니 그보다 오히려 기득권 세력의 안위에 기여하기까지 한다. 현대 사상가가 아니라 19세기 이전의 사상가라면 아담 스미스와 존 스튜어트 밀이 그의 대표적인 모델이 아닐까 한다.

  국내에서 존 스튜어트 밀을 가장 자주 언급하는 사람은 전 자유기업연구센터 소장이자 현 인티즌 사장 공병호이다. 특히 그는 현 정부의 인기주의 정책을 비판하며 존 스튜어트 밀을 인용한다. 밀이 선거권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지식인 계급은 3표, 근로 대중은 1표, 뭐 이런 식으로 차등을 뒀다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그러나 공병호는 19세기 영국에서 근로 대중에게 선거권을 줘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엄청난 혁명적인 발상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또한 존 스튜어트 밀이 "남녀의 경제적 평등이 경제를 위축시키고 따라서 임금저하를 가져올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이 통신 논객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고 있지만 사실 그 당시 사회사상가 중에서 존 스튜어트 밀 만큼 여성 문제에 대해 눈을 뜨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교육기회를 갖게 되면 남성만큼, 혹은 그보다 더 지적 능력을 발휘하게 될 거라 믿고 있을 정도였다.

  19세기 영국과 21세기 한국과의 상황은 무척이나 다르겠지만 존 스튜어트 밀이 이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그의 <자유론>을 한국 현실에 그대로 적용해봐도 한번 의미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정말 그의 <자유론>이 불후의 명작이라면 말이다.

<자유론>이 말해주는 것들

<자유론>은 존 스튜어트 밀의 사상 제 3기에 저술된 것으로 분류한다. 그는 중용의 미덕을 갖춘 대학자답게 제 1기 자유주의 제 2기 사회주의 제 3기 다시 불간섭 자유주의로 복귀를 하는 사상적 탄력성을 보여주었다. 쉽게 말하면 "날 내버려 둬." 이렇게 하다 정말로 내버려두니 개판 5분전이어서 간섭이 필요하다 생각했다가 역시나 다시 "날 내버려 둬."로 회귀한 것이다.

<자유론>은 서론을 포함해 총 5장으로 되어 있는 짧은 책이다. 또한 <자유론>은 그의 부인이자 사상적 동료였던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해리엇 테일러에게 바치는 그 유명한 헌사를 포함하고 있다. 이 둘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연애와 동거 및 결혼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테일러는 밀과 만나기 전에 이미 유부녀의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있는 상태에서 20년 동안 연애와 동거를 반복한 뒤 테일러의 남편이 죽자 그 둘은 결혼하게 되었다. <자유론>을 거의 다 끝마칠 시점에서 바로 그런 부인 테일러가 죽었으니 밀은 이 책을 테일러에게 바치게 된 것이다.

"그녀의 무덤에 묻혀 있는 위대한 사상과 숭고한 감정의 반이라도 옮겨 놓아 내보낼 수가 있다면 나는 이 세상에 커다란 이익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될 것이며, 아마도 그 이익은 그녀의 거의 비길 바 없는 지혜로운 격려와 지원없이 엮은 나의 다른 어떠한 저술보다 더욱더 클 것이다."

<자유론>은 주류 지식인 비판서이다.

  너무 서론이 길어졌는데 이제부터 <자유론>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로 하겠다. 다만 내가 갖고 있는 <자유론> 번역판은 을유문화사 세계의 사상 4권에 실린 것이다. 번역자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말이지만 번역 문장이 도저히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기본 문법에 어긋나 있기 때문에 여기서 인용할 때는 내가 자의적으로 문장을 퇴고하기로 하겠다. 물론 그건 번역자의 실력이 형편없어서라기 보다는 번역자가 너무 원전에 충실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 판단한다. 나는 그렇게 원전에 얽매이기 보다는 쉽게 풀어보겠다는 뜻이다. 물론 자유론은 각 장마다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다 인용하기보다는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2장, '사상과 언론의 자유'만을 소개할까 한다. 이는 철저히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의 한국 상황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자유주의 정치가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알려진 존 스튜어트 밀이 사실 지식인 비판자로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자.

  19세기 영국의 지식인들도 언론으로부터 고립되면 먹고 사는데 위협을 받았나 보다.

  " 사실 19세기 영국에서 다른 의견을 탄압했던 방식은 법률적 형벌이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의견에 대한 법률적 형벌이 지극히 미약했음에도 법률적 형벌이 과중한 다른 나라에서보다도 새로운 의견을 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그 이유는 법률적 형벌이 부과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여론을 통해 사회적으로 왕따를 만들어 버리는 방식으로 의견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왕따가 되버리면 일단 밥벌이 수단을 확보하기 힘들다. 그래서 아마 영국인들은 빵을 얻는 수단을 놓치기보다는 차라리 감옥에 가는 게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견을 꿋꿋이 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많은 돈을 확보했거나 사회 대다수의 사람으로부터 별달리 얻을 게 없는 사람들에 한정된다. 까짓 남에게 욕 좀 먹는 것 말고는 잃어버릴 것도 없다."

   자, 이런 식으로 먹고 살기 위해 지식인이 길들여지기 시작하면,

  "이러한 분위기는 사회 기득권 세력에게 이득을 가져다 준다. 그들은 어떠한 박해의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고 있다. 이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평화로운 상태이다. 투옥되는 사람도 없고 사형에 처해지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가질 수 있고 그 생각을 전파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실제론 사회적으로 왕따가 되어 밥줄이 끊어질까 두려워 알아서 자신의 의견을 검열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의제설정권을 언론이 쥐고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언론플레이를 하는 지식인들은 자기 자신이 언론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미 오랜동안 언론에 기들여지다 보면 자기가 알아서 언론의 입맛에 맞는 것만 이야기하도록 스스로를 검열한다는 것이다. 밀은 이에 대해 이렇게 한탄한다.

  "이런 것을 지적 평화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비판도 없고 토론도 없고 서로서로 둥글게 둥글게 사는 평화로운 세상.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지적 평화를 위해 도덕적 용기 전체를 희생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적 탐구에 몰두해야 할 지식인조차도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때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것을 염두에 두며 진리 앞에서 잔머리 쓰는 일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표현을 현대적으로 바꾸긴 했지만 밀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것은 도덕적 용기의 문제라는 것이다.

  "인류 전체의 사상을 풍요롭게 했던 저 두려움 모르는 지식인들의 발언은 이제 옛 말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속세에 영합하거나 기회주의적인 지식인들이 스스로의 확신도 없는 무책임한 발언을 뱉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식인들은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없는 실제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발언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적인 문제는 옳고 그름의 원리 원칙이 제대로 잡혀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것인데도 이러한 진리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철저히 무시된다."

  지식인이란 옳고 그름을 판정해주는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정치가나 사업가마냥 힘의 논리만을 쫓아간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도 힘의 논리에 종속되고 만다.

  "대단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이단자 혹은 부도덕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자신의 독립적인 사상의 줄기를 발전시키지 않는 비겁한 성격을 지닌 지식인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큰 손해를 감수해야하는지는 감히 계산할 수도 없을 것이다."

  밀은 또 자신의 의견에 대한 반대론 중 항상 최약체 최저질 반대론만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도마에 올려놓느다.

  "자신의 의견에 대한 반대론을 제대로 알고자 한다면 그 반대론 중 가장 강력하고 설득력있는 반대론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의견의 진리성을 확실히 할 수 있다.

참으로 서글프게도 우리 주위의 100명 중 99명은 이런 원칙을 놓치고 있다. 겉보기에 자기 주장을 정확히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자기는 진리를 외치고 있다 생각하겠지만 그 주장의 반론이 무언지도 모르는 상태이니 그건 오류나 다름없다."

  이 부분을 강준만 교수의 손호철 교수의 비판과 비교해보면 고개를 끄덕끄덕하게 될 것이다.

  "어떤 분이 지역간 정권교체론을 떠들면서 손 교수가 말씀하시는 투의 그런 이론을 역설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명색이 한국 정치를 연구하시는 정치학자라면 정권교체를 역설했던 모든 사람들의 글은 다 챙겨 읽으시면서 가장 이론적 수준이 높고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걸 골라 반격을 가해야지 그런 식으로 억지를 써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손 교수야 자기가 글을 적게 읽는 걸 자랑이랍시고 말씀하시는 분이니 그것도 기대하긴 어렵겠군요. 그렇다면 남 공격하지 마시고, 그냥 자기 주장만 하도록 하시죠. (<김대중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인물과사상」 2000년 7월호)"

「자유론」은 주로 19세기 막강한 영향을 끼쳤던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힘이 상대적으로 영국보다는 적은 한국에서라면 조금 다른 의미로 들린다. 이 말을 한번 검토해보자.

"가난한 자, 천한 자,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는 행복하리라고. 부자가 천당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 그 비판이 다시 너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또 아예 맹세하지를 말라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고. 또 외투를 빼앗으려는 자에게 웃옷도 주라고. 내일의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또 스스로 온전하기를 원한다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는 말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위의 교훈들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오히려 이런 작은 실천을 요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기독교인들은 그를 남보다 잘난 체하는 매우 밉살스러운 놈들 중의 한 놈이라는 악평을 선사할 뿐이다."

우리가 얼마나 작은 실천을 우습게 보는지, 그리고 그런 작은 실천을 요구하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대우하는지 밀은 마치 한국을 내려보고 있는 듯하다. 다음은 토론을 기피하려는 자들의 특성에 대해여 밀은 이렇게 말했다.

"흔히들 자유토론을 보장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토론의 범위를 매우 온건한 정도에까지 한정시키려는 자들이 있다. 즉 토론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토론하는 건 좋은데 그래도 좋은 말로 온건하게 해야하는 것 아니겠어? 쓸데없이 인신공격하지 말고." 이런 핑계를 대면서 실제로는 토론을 기피하려는 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관연 그 온건함의 한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보기엔 그 판단 기준은 남이 자기를 화나게 했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내 경험상으로 볼 때, 상대방의 논점을 정확히 잡아 통렬하게 비판을 해버리면 상대방이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비판자가 이에 그치지 않고 상대의 약점을 끝까지 파고들어가면 그 비판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판자가 난폭한 폭력배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 반대의견을 내는 사람들을 힘있는 자들이 가장 저질적으로 제압하는 방식은 그 비판자에게 부도덕자라는 누명을 씌워버리는 것이다. 대개 아직 널리 퍼지지 않은 새로운 의견을 내세우는 비판자는 이렇게 부도덕한 사람이라는 중상모략을 당한다. 이들은 아직까지 소수이고 자기 자신 말고는 그 누구도 공정성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아주 이상하게도 이런 부도덕자라는 누명을 씌워버리는 필살기는 주류 지식인들을 공격할 때는 사용될 수 없다. 만일 누군가 주류 지식인들을 공격할 때 이 무기를 써먹었다간 오히려 백배 천배 앙갚음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다보니 주로 주류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최대한으로 말을 공손하고 온건하게 하여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만 비판을 허락받는다. 이에 한치라도 벗어나면 그들의 의견은 부도덕자의 의견이라며 철저히 묵살당한다. 그러데 그런 주류 지식인들은 마음놓고 독설을 퍼부으며 반대 의견자들이 반론을 발표할 수 없게끔 하던지, 아니면 발표를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이에 관심을 갖지 않게끔 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정말로 진리와 정의를 원한다면 바로 그런 주류 세력들의 폭력과 독설을 금지시키는 게 훨씬 더 필요한 일이다. 19세기 영국 종교에 관해서라면 종교인에 대한 공격을 금지시키는 것보다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중지시키는게 더 필요하다는 말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존 스튜어트 밀이 서로 계급장 떼고 자유롭게 토론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가는 2장의 마지막 문단에서 절실히 드러난다.

"반대 의견을 성실히 경청하고 반대론자에 불리하게 될 왜곡과 과장을 하지 않으며 반대론자에게 유리해 보이는 사실을 은폐하지 않는 토론자가 있다면 그는 당연히 칭송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참다운 토론자의 도덕이며 가끔 제대로 안 될 때가 있더라도 이를 준수하는 논객들이 상당히 많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잠을 이루기 힘들 정도로 행복하다."

다른 말을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반공주의자로 활동하고 있는 존 스튜어트 밀을 하루라도 빨리 지식인 비판자로 활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고금의 걸작들이 우리들에 의하여 가치가 입증되기 전에 우리가 그 걸작들에 의해 자기자신의 진가를 입증해야 할 것이다."

이런 또 하나의 고전적 작가, 헤르만 헷세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의 가치를 활용하는 것은 우리 하기 나름이다.

* 본 글은 대자보 60호(2001.6.7)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02/03/07 [12:32]   ⓒ 대자보
 
  • 도배방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