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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지형도] 사족들 - 2000년의 앨범
 
기타기순   기사입력  2002/03/05 [15:13]

<긱스 VS 노바소닉>
2000년은 국가대표급 음악가들의 실망스런 두 번째 앨범을 목격했던 우울한 해였다. 이 두앨범의 공통점은 소란스럽다는 것이고, 밴드로써의 견고한 연대(텍스트의 생산과정에서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적의 지나친 엔터테이너적 사고와 김세황의 무절제한 하이테크닉의 남용은 이 앨범들의 소란스러움의 주범이다.  
긱스의 두 번째 앨범은 전작의 실로 기적적이었던 균형감과 음악적 완성도를 상실했다. 음악요소에 대한  진지한 작가정신이 슬그머니 자리를 내준 공간에는 어설픈 광대기질만 남았다.
'하드코어'라는 말장난에 서태지 정도는 아니지만 얼마간 음악적 주체성의 강제치상을 경험한 노바소닉의 두 번째 앨범이 시사하는 바는, 넥스트의 진정한 작가는 신해철 이였으며 그의 조율이 빠진 테크닉의 현란함이 얼마나 시끄러움을 동반하는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노숙하고, 한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던 이 테크니션 집단들의 새로운 프로젝트들이 순항을 거듭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사족 1
"…그리고 제일 싫어 하는 기타리스트는 잉베이맘스틴, 조 사트리아니 이다. 미국에서 음악을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을 싫어하는데, 이상하게 국내에서는 열광하고 있다. 그들은 조 사트리아니를 평할 때 개 똥 같은 놈(a piece of shit)이라고 한다. 의미 없이 음을 낭비 하는 것이 싫다. 스케일도 너무 뻔하다."
-박준흠, 「한상원, 나는 훵크의 마스터」, 『이 땅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IMAGE2_RIGHT} 긱스의 기타리스트 한상원은 국내 연주자 중 손 꼽을 수 있는 실력가이다. 유학10년의 경력이 말해주 듯 그의 블루지하고 훵키한 연주는 본토의 필(feel)에 전혀 뒤지지 않는 것들이다. 긱스의 텍스트 주관자인 그는 기타연주 스타일 면에서 볼 때 완강한 내용주의자 이다. 테크닉이나 형식에 집중하는 연주자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그의 견해가 보여주듯, 테크니컬 기타리스트들에 대한 자신과 같은 성향의 연주자들의 우월성을 강변하려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후 어느 인터뷰에서 함께 연주하고 싶은 국내 연주자가 있느냐는 질문에 한상원은 노바소닉의 김세황을 언급한다. 노바소닉의 김세황은 세련된 스타일리스트이고, 잉위맘스틴은 물론 조 사트리아니를 스승으로 모시는 기교파 기타리스트이다. 한상원이 김세황과 함께 연주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가 의도한 건 자신과 정반대의 연주와의 공력 대결이었을까, 아니면 그새 그의 연주관이 바뀐 것일까. 긱스의 두 번째 앨범을 비롯, 최근 세션앨범까지 추적해 보면 그의 성향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전히 그의 블루스 스케일은 폭발적인 필과 깊이 있는 비브라토를 분사하고 있다. 한상원과 김세황의 잼(Jam) 세션을 구경하는 날이 2001년에 올까?.      

<서태지 2집>
{IMAGE1_LEFT}누가 뭐래도 이 앨범은 2000년을 넘어 국내 대중음악지형도의 문제작으로 남을 것이다. 이 앨범의 치열한 음악성은 서태지가 구사한 장르적 정교함(누구나 인정했듯)이 아니라 고유한 ‘서태지 멜로디’가 록 문법의 형식을 통과하며 음악 내적 맥락의 완결성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돌아온 서태지’에 대한 분석은 많았어도 그의 음악 텍스트의 진정성이 작가의 ‘심리적 표절’론 따위에 의해 방해받고 만만하게 처리된 것이다. 사람들은 서태지가 록을 하는 것이 못마땅한 건 아닐까. 대중가요를 부르는 적당히 실험적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만만하지만, ‘록커 서태지’는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   

사족 2
서태지의 음악 텍스트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세간의 부당한 평가는 유감스럽게도 『인물과 사상』에서 극점을 이루었다. ‘단행본’필진에서 월간으로 방출된 조흡의 「서태지: 정치가 거세된 핌프 락」이 그것이다. 문화평론가와 문화연구가 라는 직함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그는‘평론’도 ‘연구’도 아닌 왜곡과 날조의 전형을 제시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서태지는 이번 앨범에서 일반 청중들이 듣고 따라서 흥얼거리기 쉬운 그루브 부분을 의도적으로 줄이고 대신 "기계적이고 드라이한 사운드"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을 그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원조 락 밴드들 어느 누구도 쉽게 이해하고 있는 상식일 텐데, 서태지는 그것을 단순한 테크닉의 변주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로 그것은 아니다. 그가 이번에 추구했던 "기계적이고 드라이한 사운드"는 기존의 하모니 구조에 반발하는, 다시 말해, 가지런히 정돈된 가치질서에 정면 도전한다는 저항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서태지는 이를 간파하지 못한다."
       -조흡, 「서태지: 정치가 거세된 핌프 락」,월간 『인물과 사상』2000년11월 호

‘원조 락 밴드’라는 우스개 소리는 접어두자. 무엇보다 조흡은 서태지의 음악 텍스트를 제대로 분석해낼 능력이 없다. 그가 멜로디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 ‘그루브’라는 용어는 음악텍스트 속에서 멜로디가 아닌 리듬의 바운스(Bounce)감을 말하는 것이다. 거짓말을 한 셈이다. 조흡이 말하는 ‘가치질서’의 내용이 음악적 정연함을 뜻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기계적이고 드라이한‘사운드’가 화성학 용어인 ‘하모니 구조’와 대응할 수 없는 말인 것은 확실하다. 같은 구조의 하모니라도 다른 사운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필연성이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서태지가 기존의 3성 화음 체계를 거부하고 특유의 하모니구조를 선보였다면 위의 ‘반발’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운드가 아무리 반항해도 하모니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메가데스(Megadeth)라는 미국의 스래쉬 메틀 그룹이 있다. 이들이 1992년에 발표한 앨범「Countdown To Extinction」은 모든 악기, 노래의 녹음 공정을 디지털 방식으로 제어하는 절차를 택했다. 그들이 목표한 것은 몇 백만 분의 일의 오차까지 용납치 않는 정교한 타임감의 정확한 연주였고 그 결과 너무나 ‘기계적이고 드라이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기계적이고 드라이한 사운드’가 가지런한 정돈됨에 정면도전하는 상황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록음악에서‘기계적이고 드라이한’느낌이야 말로 가지런히 정돈된 사운드인 것이다.

조흡과 『인물과 사상』은 자신들의 음악 텍스트에 대한 무지를 감안하지 않은 체 하나의 문화현상이나 작가론에 머물렀어야 했던 글을 음악 내적 맥락의 정치성까지 건드리고, 나아가 뛰어난 한 음악가에게 민망한 수사를 안기는 염치없음을 스스로 폭로했다. 비판이 허약한 근거를 기반으로 선정적 수사를 남발할 때 그것은 비난으로 둔갑되고 난폭해 진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음악에 관한 한, 조흡과 『인물과 사상』은 폭력적이다. 그들의 문제점은 깔끔하다. ‘윤리’가 거세되어있다.

<코요태 3집>
공중파의 지겨운 트랜드는 2000년에도 계속되었다. 빌보드 차트의 멜로디를 퍼와 간소하게 변용하는 수법들, 테크노의 껍질만 차용하거나 역시 빌보드 힙합의 루프를 베낀 리듬 쪼가리들이 범벅된 음악을 참 많이도 들었다. 심지어 브리트니스피어스(Britney Spears)의 「Oops!...I Did It Again」의 멜로디 4마디를 그대로 덜어온 O-24의 「Blind Faith」라는 곡도 우리는 용서했다. 작가의 개성과 고민이 배제된 구태의연한 팝 발라드들도 거짓말하는 공중파의 입술에 침 정도는 발라 주었던 것 같다.    

코요태의 음악작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공중파에서 볼 수 있는 한 명의 처녀와 두 명의 총각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이들의 앨범은 데뷔 당시부터 다른 공중파 음악들의 유행추수적인 전략을 따르지 않았다. 이번 앨범에서도 전형적인 마이너 멜로디와 통속적 코드 진행을 일관했으며, 공중파는 나이트 클럽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된다는 의미의 ‘클럽댄스’라는 딱지를 선사했다. ‘클럽댄스’가 아닌 ‘뽕짝댄스’인 코요태의 통속성은 공중파의 표절아닌 표절곡들 보다 훨씬 더 건전하다.  

사족 3.
대자보 독자들을 위해 재밌는 이야기 하나. 코요태의 신지 양의 목소리가 고음부에서 갈라지는 양상을 ‘전’곡에 걸쳐 느꼈을 것이다(물론 이들의 음반을 구입하고 전 곡을 들어보는 궁상을 감수한 필자 같은 분들만). 이유는 음반 프로듀스의 결단에 있다.    
선천적으로 남자와 여자의 키(Key)는 4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노래방 기계를 기억해 보면 알 것이다). 그래서 대중음악에서 혼성 듀엣 곡의 경우 대개 전조(조바꿈)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제는 달콤함과 귀를 거스르지 않는 말랑함에 주력하는 공중파 음악들의 경우, 3분대의  엔터테인먼트에서 곡의 조성이 바뀐다는 사실은 여간 위협적인 게 아니다. 결국 전조를 택하면서 곡 자체의 완성도를 높이느냐, 아니면 보컬리스트의 무리한 발성을 감수하면서 대중들의 귀를 거스르지 않느냐 하는 선택이 남는다. 신지 양의 목소리가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르지만 남자 키(Key)를 기준으로 작곡되어진 코요태의 곡들을 소화하는 그녀의 핏대 세운 목이 가련하다. 프로듀스의 결단은 어린 여가수의 성대를 착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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