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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일제 관료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
[우리힘의 눈] ‘만주친일’ 인맥의 대표로 승승장구, 박정희 독재의 버팀목
 
방학진   기사입력  2005/08/03 [12:05]
요즘 나는 MBC 주말 드라마 <제5공화국>을 즐겨 보고 있다. 불과 20여 여 년 전 일을 안방에서 배 두드리며 당시 권력자들의 치부를 조롱하며 보고 있노라면 문득 그 당시에 그러한 진실을 알리고자 온 몸을 내던졌던 수많은 민주인사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그 날부터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일당이 최고 권력자의 공백을 틈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긴박한 과정을 그린 장면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안타까운 장탄식을 내뱉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우유부단하고 비겁한 최규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의 모습은 이러한 안타까움을 더욱 더 자아내게 만든다. 
 
"그 때 최규하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면 전·노 일당의 발호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착시현상임을 나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최악을 만나면 차악이 선으로 보이는 법. 최규하 역시 박정희 독재의 든든한 버팀목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특히 그는 당시 박정희 권력의 중핵인 만주인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0·26은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해 전·노 등 새로운 독재세력의 등장을 의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만주국 출신들의 2선 후퇴를 의미하는 뜻하지 않은 결과도 함께 가져왔다.

만주국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이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드디어 중국 대륙을 침략한 후 193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푸이를 형식상의 최고 권력자인 집정으로 앉히고 실질적으로는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지배하는 꼭두각시 국가로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지구상에서 사멸하였다.
 
일본은 만주국을 비롯해 드넓은 동북지역을 점령하기는 했으나 워낙 넓은 지역에다 그들의 침략 전선이 동북아에 그치지 않고 동남아 등으로 날로 확대되어 가고 있었기에 효과적으로 만주국을 지배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때문에 그들이 내세운 것은 일종의 이념 공세였다.
 
'오족협화'·'낙토만주' 등이 대표적인 구호로 만주국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민족(일본·조선·한족·만주족·몽골)이 잘 협력해 만주를 낙원으로 만들자는 내용이다. 가곡 '선구자'의 작사가로 알려진 친일문인 윤해영은 <락토만주>라는 시를 써서 만주국을 찬양하기도 했다.

오색기 너울너울 락토만주 꿈꾼다.
백방의 전사들이 너도 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복을 받은 백성들
희망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후략)

 
그러나 이와 같은 선전과 달리 실제로는 일본이 제1민족으로 만주국의 지배하는 것이고 다른 네 민족은 피지배 민족에 불과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난 사실은 만주국을 지배하던 일본은 조선족을 2등 민족 대우를 하며 이선치화(以鮮治華) 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이선치화'란 즉 조선인으로 하여금 중국인일 지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만주사변과 같은 무력으로 대륙에 진출한 일본에 대해서 중국인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는 마당에 일본인들이 일선에 나서서 통치를 하면 더욱 중국인들과 마찰이 생기고 반일감정은 더욱 고조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지주와 소작농 사이에 마름이 존재하듯 조선인들을 마름과 같은 역할을 주로 수행케 한 것이다. 만주국 관립대학인 건국대학과 전문 관료 양성소인 대동학원은 그래서 조선의 청년들에게 바로 새로운 출세의 길로 여겨졌던 것이다. 최규하는 바로 이 만주 대동학원 출신이다. 
 
▲10월 26일 최규하 전 대통령 운구행렬.     © 김현진
 
1919년 생인 최규하는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999년에는 어이없게도 원주시가 그의 생가를 복원하겠다고 나섰다가 여론의 호된 비판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사업을 백지화한 일도 있었다. 당시 원주시에서는 그의 구체적인 친일행적이 없다는 이유로 사업을 강행하려한 모양이다. 물론, 최규하는 만주 대동학원을 졸업한 후 2년 만에 해방이 맞았다. 이 2년의 공백 대해서 최규하 자신은 12·12 쿠데타 관련 국회 청문회에 나서기를 거부하던 '뚝심'을 발휘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이 작성된 보고서인 'G-2' 보고서에는 그가 '1942년 10월 1일에서 1943년 7월 5일까지 만주 장춘의 대동학원을 재학, 졸업하고 바로 그 다음날인 1943년 7월 6일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만주국 관리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청산하지 못한 역사] 제1권에서)
박정희가 나온 만주군관학교가 총칼로써 일제에 충성하는 군사학교라면 대동학원은 펜으로써 일제에 충성하는 관료학교였다. 이 대동학교 입학자체가 일제 관료를 하겠다는 명시적인 의사표현인 것이다. 그런 그가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에 잠시나마 올랐으니 그의 꿈은 120% 이룬 셈이다.
 
이승만이 물에 빠진 친일세력들을 배에 끌어 올려놓았다면 박정희는 그들과 함께 조타실에 점령한 것인데, 최규하는 친일관료들이 우리나라 공직사회에 어느 위치에 서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물론 지금 그는 현직에 있지 않다. 하지만, 친일문제는 한 사람의 생명이 끝나면 해결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친일관료들이 남겨놓은 가장 큰 부정적 요인은 바로 생각 없이 상명하복만이 강조되고 개인적인 판단이 원천 봉쇄되는 '기능적(기계적) 테크노크라트'의 양성에 있다고 본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지 직업적인 관료는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일제시대 조선인 관료들은 구한말 → 일제 → 미군정 →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지배계층의 관료를 두루 거치면서 노예적 근성을 상속받고 말았다. 노예는 주인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기계적이고 노예적인 관료 근성은 고민하고 생각하지 않는 공직사회를 만들었고 결국 제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군인들의 모습으로 돌변해 있었던 것이다.
 
상급자의 명령이라도 그것이 부당한 것일 때에는 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독일과 같은 유럽의 관료사회의 전통은 찾아 볼 수 없는 우리나라. 경찰도 노동자로서 파업이 가능한 유럽의 나라들이 왜 부정부패가 적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관료 스스로 생각하고 봉사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시장과 도지사에게만 충성하는 공무원들. 그들은 일제시대엔 천황에게 해방 후에는 독재자에게 충성을 다한 최규하와 같은 친일관료들의 후예임이 틀림없다.
 
다행히 우리나라도 늦었지만 공무원노동조합이 만들어져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법원공무원노동조합도 생겨났다. 이들이 친일관료들이 뿌려놓은 출세지향 노예근성적 복지부동의 관료 사회를 일대 혁신해주길 기대한다. 이 땅의 공무원들이 제대로 선다면 1992년 [안중근 의사, 여순 순국 유적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고문, 1999년 [백범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고문 등을 맡으며 국가 원로 대접을 받고 있는 최규하 같은 관료상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 글쓴이는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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