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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유럽, EU 경기 침체의 교훈
합리적인 사회복지체제와 노사관계의 수립을 이뤄야
 
이용길   기사입력  2003/06/15 [21:09]
 

▲ 1유로. 사진출처: http://www.guardian.co.uk
최근 EU의 경기가 갈수록 침체되고 있는 양상이다.

지난 5일 유럽중앙은행(ECB)은 기준 금리를 2.5%에서 2.0%로 0.5%p 인하했다. 유럽중앙은행이 작년 12월 이후 기준 금리를 세 차례 인하한데다 이번에 큰 폭의 금리 인하를 단행한 것을 감안할 때 EU 경제는 최근 성장의 둔화세가 뚜렷해지는 느낌이다.

이번 금리 인하 조처는 EU가 금년 1/4분기에 제로 성장을 한 데서 비롯되었다. 특히 EU의 주요 경제국인 독일(-0.2%), 이탈리아(-0.1%), 네덜란드(-0.3%) 등이 1/4분기에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또한 최근 미국 경상 수지 적자의 확대로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서 유로 가치는 최고치를 기록하는 등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EU 기업들의 수출 가격 경쟁력을 저하시킴으로써 수출 증대에 악영향을 주었다.

EU는 국내총생산(GDP)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17%로 미국(11%), 일본(9%) 보다 높기 때문에 수출 증대의 차질은 EU 경기 회복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다. 결국 EU의 올해 경제 성장률은 당초 전망했던 1%를 달성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침체된 경기를 회복시키고 유로 가치의 상승세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이번 금리 인하 조치는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경기의 침체 및 유가 안정, 유로 가치의 상승에 따른 수입 물가의 하락 등으로 지난 5월 물가 상승률이 유럽중앙은행의 인플레 억제 목표치(2%)에 미달하는 1.9%를 기록하여 인플레 압력이 감소, 금리를 인하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다. 특히 EU 창설의 주도자이자 역내 최대 경제국인 독일 경제 성장의 둔화세는 확연하여 EU의 경기 침체를 부채질하고 있다. 독일 경제의 성장세는 2000년 2.9%를 정점으로 급속히 위축되면서 2001년에는 0.6%, 작년에는 0.2%에 그쳤고 최근에는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작년 4/4분기 -0.03%, 금년 1/4분기 -0.2%)을 기록하여 경기 둔화세가 심화되고 있다.

금년 들어 독일 경제는 3년째 1% 미만의 저 성장세가 이어지면서 실업자수가 470만명을 초과하여 실업률이 11%에 육박하고 있다. 이러한 독일의 경기 침체를 완화시키기 위해 통화·재정 정책의 필요성이 절실한데 정책을 수행할 만한 조건은 원활하지 못한 상황이다.

현 단계 금리 조절 정책은 유럽중앙은행의 관할 하에 놓여 있고 재정 지출의 확대 정책 역시 재정 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제한하는 EU의 재정 건전화 협약 때문에 여의치 못하다. 더욱이 달러 가치의 약세에 따른 유로 가치의 상승은 독일 경제 성장의 주요 기반인 수출의 증대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지난 6월 1일 독일의 슈뢰더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SPD) 정부는 새로운 경제 정책의 이정표인 '아젠다 2010'을 채택하였다.

여기서는 독일 사회민주당 정부의 전통적 사회 복지·노동 정책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주요 내용은 ◇ 기업의 실업 보험금 축소(50세 이상 종업원 고용시 실업 보험료 면제) ◇ 해고자 보호 규정 완화 ◇ 임금·단체 협상과 관련한 노조 권한 약화(파트 타임 노동에 대한 권리가 근로자에서 고용주로 이관) ◇ 실업 수당 축소(현행 32개월에서 12∼18 개월로 단축) 등이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보수 언론은 독일 경제 정책의 기조가 근로자·분배 중시에서 사용자·성장 중심으로 급격히 전환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들은 독일 경기의 침체를 가져 온 근본 원인이 기업에 과도한 부담이 되는 사회 복지 체제와 노동 시장의 경직성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독일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회 복지 체제의 축소와 노동 시장의 유연화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EU는 미국, 일본과 더불어 세계 경제의 3대 축을 형성할 정도로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하다. 그러므로 최근 EU의 경기 침체는 일본의 장기적 불황과 더불어 세계 경제의 성장을 결정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특히 진보 진영은 EU 경제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EU가 현 단계 세계 체제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체제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EU의 현재와 미래는 세계 체제를 보다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체제로 발전시키는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더욱이 미국의 일방적 세계 패권주의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21세기 들어 인류 공동체의 평화와 공존 공영을 위해서 미국의 세계 패권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인 EU의 역할은 더욱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체제에서 정치·사회·문화적으로는 가장 선진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고 사료되는 EU가 유독 경제 부문에서는 그 취약성이 심화되어 EU에 대한 기대가 우려로 전환되는 현실에 대해 진보 진영은 보다 근본적이고 심도있는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보수 진영은 이러한 EU의 경기 침체가 EU 각국 정부의 진보적(친노동적·사회 복지적) 경제 정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사회 복지 체제를 축소하고 기업 친화적인 경제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들은 최근 몇 년간 EU 경기의 침체에 대해서 EU의 진보적 경제 정책의 비효율성에 집중 공세를 가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수구·보수 언론은 노무현 정부의 경제·사회·노동 정책에서의 진보성을 사전 차단하기 위한 계기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보수 진영의 논리에 대해 진보 진영은 즉자적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보다 개방적이고 탄력적인 태도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즉 진보 진영은 국민 경제를 책임지고 경영하고자 하는 보다 성숙된 대승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적정하고 합리적인' 사회 복지 체제와 노사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자본 진영과 공동으로 협의하고 협력하는 자세를 주도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진보 진영은 자신의 정책 노선을 전통적 관점인 노동 계급 중심주의에 기초해 온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진보 진영이 임금 인상 등 노동 계급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는데 주력해 온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노동·자본 계급만이 아닌 중간 제계층을 망라하는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어 그 계급적 구성이 변화되었다. 그러므로 진보 진영은 전통적인 노동 계급(민중) 중심적 관점에서 노동 계급을 비롯한 다양한 계층의 이익을 수렴할 수 있는 전 국민적·민족적 관점으로 자신의 이념·노선의 외연을 확대시켜야 한다.

결국 진보 진영은 노동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에서 노동 계급을 비롯한 전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세력으로 혁신해야 한다.

따라서 진보 진영은 자본 계급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노동 계급에 적대되는 세력으로, 즉자적으로 대립화시키기 보다는 이들이 국민 경제의 발전을 통해 노동 계급을 비롯한 여타 계층의 생활 조건의 개선에 이익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유도해야 할 것이다. 즉 자본 계급이 투자를 왕성하게 하도록 유인하여 기업을 성장시키고, 그 과실이 임금과 세금을 통해 근로 계층과 국민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부 자본 계층이 기업 수익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임금 상승을 억제하는 등 근로 계층의 정당한 요구에 성실하게 응하지 않거나 세 부담을 공정하게 이행하지 않는 등 국가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한 규제와 대책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미성숙·반대·비판·무책임으로 평가 절하되었던 진보 진영의 이미지를 성숙·건설·대안·책임의 이미지로 전환시켜 진보 진영의 집권 기반을 확충시킬 것이다.

사실 '과도하고 불합리한' 사회 복지 체제는 정부의 재정 수지를 악화시켜 경기 침체시 재정 지출의 확대를 통해 경기 부양을 펼칠 수 있는 재정 정책의 기반을 침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과도하고 불합리한 사회 복지 체제는 근로자들의 근로 자세를 안이하게 만들어 생산성을 저하시킬 위험성도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도하고 불합리한 친노동 정책은 기업의 세 부담과 인건비 부담을 증가시켜 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키고 기업의 투자 의욕을 저하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 진영은 정부의 재정 수지를 악화시키고 기업의 수익성을 하락시키며 근로자의 생산성을 저하시키는 '과도하고 불합리한' 사회 복지 체제와 노사 관계를 '적정하고 합리적인' 사회 복지 체제와 노사 관계로 전환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적정하고 합리적인 사회 복지 체제는 저 소득 계층에 일정 수준의 소득 기반을 확보하게 하여 민간 소비를 통해 경기의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으므로 간접적 재정 정책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적정하고 합리적인 사회 복지 체제는 근로자가 공동체에 대한 안정된 사회 심리를 확보하여 보다 안정되고 성실한 자세로 근로에 임할 수 있어 장기적으로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적정하고 합리적인 노사 관계에 기초한 근로 계층의 기업 경영의 참여는 기업의 성장과 미래에 대한 근로자의 책임 의식을 제고시켜 근로자가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생산성 향상에 참여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결국 현 단계에서 근본적이고 절실하게 요망되는 것은 적정하고 합리적인 사회 복지 체제와 노사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진보 진영의 주도하에 노사가 공동으로 협의하고 협력하는 자세이다.

적정하고 합리적인 사회 복지 체제와 노사 관계의 수립은 국민 경제를 성장시키고 성장의 과실을 노사 양측과 국민 각계 각층에게 적정하게 배분함으로써 노사를 비롯한 국민 각계 각층의 상호 협력 관계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기본적 자양분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적정하고 합리적인 사회 복지 체제와 노사 관계의 수립은 진보 진영이 노동 계급적 관점에서 국민·민족적 관점으로 혁신하여 국가 경제를 책임지고 경영할 수 있는 집권 세력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토양이 될 것이다.  

* 필자는 고려대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농협대, 숭의여대, 전북대에서 강사로 재직 중입니다. 현재 여러 인터넷 언론에서 시사 평론 활동을 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어느 진보주의자의 세상 비틀기>(동성출판사, 2002)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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