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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정신에 억눌렸던 인식의 재생을 위하여
[서평] 앙겔루스 노부스 ― 진중권의 미학에세이
 
김홍민   기사입력  2003/05/22 [09:28]
미와 에로스

{IMAGE1_LEFT}지난 1994년, 진중권은 [미학 오디세이]라는 책으로 평단과 대중의 갈채를 동시에 받은 바 있다. 나 역시 대학 시절 우연치않은 기회로 그 책을 읽었는데, (그 때는 잘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진중권 특유의 글쓰기 덕분인지 ‘미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동경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것에 생명이 있다고 믿었고, 그 생명들과 언제든지 교감할 수 있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순 없을까? 물론 그럴 순 없다. 하지만 우리 삶의 한구석엔 고대인들의 심성이 여전히 살아있다. 여기선 아직도 그들처럼 세계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바로 예술의 세계다.”

장기간의 방랑(Odyssey)을 마치고 근 10년이 지난 오늘, 그는 <미학 오디세이>의 후속편 격이라 할 수 있는 또 한권의 책을 내놓았다. ‘진중권의 미학에세이’라는 부제가 붙은 <앙겔루스 노부스>가 바로 그것이다. 1994년과 2003년. 저자는 이제 근대 미학의 관점으로 해석된 서양 미학사를 탈근대의 관점에서 ‘다시’ 읽었다고 한다. 어떤 동기로? 그의 말을 들어보자.

“여기에 실은 글들은 어떤 독해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베를린 유학 시절 미학을 제쳐놓고 언어철학에만 매달렸다. 어느 날 우연히 푸꼬의 ‘쾌락의 활용’을 뒤적이다가 ‘존재미학’이라는 표현을 발견했다. 재미있는 것은 내가 언젠가 그 책을 이미 읽었고, 책의 중요한 구절에는 느낌표와 함께 이미 밑줄까지 그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읽고,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정작 그 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최초의 독해에서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완벽하게 못 볼 수가 있을까?”

앙겔루스 노부스의 서문이다. 전문을 보면 알겠지만 첫 번째 독해에서 중요한 부분을 전혀 읽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그는 두 번째 읽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을 통해 근대적 에피스테메(인식구조)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미의 이데아’를 논하는 플라톤의 <향연>에 대한 푸코의 독해 때문이었다. 새로운 시각으로 플라톤을 읽었을 때, 아마 플라톤에 대한 근대미학이 가리운 맹점이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플라토닉 러브가 순수한 정신적 사랑을 의미하게 된 건 이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만 그건 오해다. 플라톤의 에로스는 결코 영혼을 위해 육체의 사랑을 지워버리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 오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중세 기독교의 문명을 거치면서 사람들의 머리에 깊이 각인된 육(肉)에 대한 경멸이 선입견으로 작용한 모양이다.”

계속되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기독교에서 에로스는 곧 육욕(肉慾)의 죄였다. 그리하여 중세에 아프로디테는 남성을 유혹하는 ‘창부’로 에로스는 인간을 죄에 빠뜨리는 ‘마귀’로 묘사되곤 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이런 대립을 몰랐다. 기독교 문화가 성적 쾌락을 억압하려 했다면 그리스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미셸 푸코의 말대로 ‘쾌락의 활용’이었다.”

그렇다. 이런 푸코의 해석이 맞다면 존재미학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생활태도’이다. 사회적으로 고정된 도덕의 눈치를 보며 거기에 맞춰 수동적으로 행위하는 게 아니라 ‘질서와 미’의 원리로 자신을 지배하며 쾌락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능력과 수완말이다.

“존재미학. 철학과 섹스가 하나가 되어 미를 향해 상승하는 영적, 육체적 생식의 시대, 삶이 예술이 되고 모든 인간이 예술가가 되는 시대, 그리하여 예술가가 되려고 예술가가 될 필요가 없는 시대, 인간이 창조자가 되어 자기 앞의 생을 예술작품으로 아름답게 만들어나가는 시대. 우리의 포스트 모던은 왜 그런 시대를 열지 못하는 걸까?”

창조적 개새끼

다음은 다들 알고있는 유명한 일화.

어느 날 알렉산더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아가 말한다.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 테니 말해보라” 그러자 디오게네스 왈, “좀 비켜 줘. 햇빛 좀 쬐게.”

기성 도덕과 관습을 우습게 보았던 디오게네스. 사람들이 그에게 왜 스스로를 개라고 부르느냐고 묻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답한다. “내게 뭔가를 주는 자는 꼬리를 치며 반기고, 아무 것도 주지 않는 자에게는 시끄럽게 짖어대고, 내게 나쁜 짓을 하는 자는 물어버리기 때문이지.”

{IMAGE2_RIGHT}독설과 가시돋힌 공격성, 냉소적 이성을 소유했던 디오게네스, 과연 누구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어쨋건 우리들은 “그의 건방짐을 비난하는 대신, 위선적 권위를 단 한 칼에 날려 버리는, 그 퍼포먼스의 미학성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의 기행은 그가 자기의 존재를 예술적으로 양식화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므로. 디오게네스야말로 진정한 존재미학의 행위자였던 것이다.

진중권은 이러한 디오니소스적 존재미학을 파울 클레의 ‘앙겔루스 노부스(신천사)’에서 다시 확인한다. 이 책의 미학적 결론이기도 한 클레의 그림을 통해 그는 파다라다이스의 들뜬 희망을 참담한 좌절감으로 보내야 했던 우리의 80년대를 떠올렸다고 한다.

“승리하기를 멈추지 않는 자들에 의해 독재자들의 망령이 차례로 부활하고 우리를 위해 죽은 자들의 무덤이 적들에게 비웃음당하고 모욕당하기 위해 파헤쳐지고 우리에 의해 잊혀지고 외면당하는 이 위험한 순간에 나는 다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다.”

앙겔루스 노부스. 슬픈 눈으로 우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존재론적 닮기의 놀이를 원하는 또 하나의 주체. 무력하게 머리만 자란 또 하나의 멜랑콜리커(우울한 기질을 가진 사람). 자! 이제 이 ‘신천사’는 날개를 폈다. 이 순간, 근대정신에 억눌렸던 우리의 인식도 Reset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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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5/22 [09:28]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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