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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과 진중권, 그리고 진보의 개념
진보의 요건은 선지자적인 선취성 여부, 진보세력내 개별흐름 파악해야
 
뒤집기   기사입력  2005/02/22 [10:51]
우리나라 정치세력은 크게 수구세력, 중도세력, 진보세력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사실 진보세력 내부에도 상이한 흐름이 존재한다. 그러한 내부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 전의 민주노동당 내 열린우리당과의 관계 관련 문건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북한 핵무기 보유 선언과 관련하여 그 차이가 재차 확인되고 있다.

해당 사안별로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 문제는 그 뿌리가 매우 깊어서 단순히 각종 사안별로 논의하는 것은 본질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개별 사안에 대한 표면적 대립은 보이지 않는 다른 내부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으며 결국 문제는 그 근본적 차이로 환원되어 버린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진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번 글은 그 첫 번째로 해당 주장이나 정치세력이 진보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진보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선지자적인 선취성 여부이다.

노예제도가 있던 시절, 만인은 평등하기 때문에 노예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21세기의 누가 보더라도 진보적인 사고라고 인정할 것이다. 파시즘과 나찌즘이 발호될 무렵 이들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발언이 진보적이라는 데에는 이미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보았던 우리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눈여겨 볼 것은, 이처럼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명징한 것도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비유를 빌자면 당시대 사람들은 허구의 동굴에 갇혀 그 2차원적인 그림자가 본질이며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성화가 아닌데도 여성을 나체로 그렸다는 이유로 엄청난 사회적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자면 마네가 진보적이라기보다 그냥 상식적일 뿐이지만 당시에는 “과격”했던 것이다. “여성의 나체는 성화에서만”이라는 것이 절대 진리였던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은 이러한 것의 살아있는 생생한 예이다. 과거에는 국보법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간첩 비슷하게 매도되었고, 실제로 처벌받기도 했다. 그 주장 자체가 금기시된 사회였다. 현재 국민의 반 정도가 국보법 폐지에 찬성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의식 발전의 증거이며 우리가 이 사안에 관해 평가가 바뀌고 있는 과도기에 있다는 걸 보여준다. 단언컨대 우리의 후손들은 21세기에 국가보안법이라는 구시대의 유물에 대해 폐지논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비문명성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지표로 기록할 것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천년이 흐른 후에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사는 지금 사회를 우리가 과거의 노예제도에 대해 그러하듯, 아니 그보다 더하게 야만적이고 후진적이라고 조롱할지 모른다.

예컨대, 우리와 동시대인인 라깡은 자본주의 체제는 정신분열적인 체제라고 하였다. 한 쪽에서는 1년에 8억 명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데 다른 한 쪽에서는 농산물의 값이 하락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농산물을 바다에 퍼붓고 있다. 한 쪽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병원하나 변변치 못한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 나마 있는 것마저 전투기와 미사일로 박살을 내고 있다. 그 파괴적인 군사예산의 2%를 10년만 투자하면 이 세계의 기아가 사라질 텐데도 말이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측면을 본다면 우리 사회가 불변할 것이고 존재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가진다는 생각이 1천년 후에도 동일하게 평가되기란 힘들 것이다. 서양의 한 사상가가 이런 의미에서 사회가 유기체라고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생물이 진화하듯 우리 사회도 진화한다는 판단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현존 사회와 현존 체제의 불합리한 바를 한발 앞서 지적하는 이런 선취성은 이처럼 당대에는 논란거리가 되지만 수십 세대가 지난 후에는 정당한 평가를 받는다. 우리의 후손들은 현재에는 극단, 과격이라고 비난받는 주장을 선지자적인 진보적 주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소극적인 자를 진보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핵심적인 이유는 이러한 “선취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 백 가지 이유를 갖다 붙여 이라크 파병을 옹호하더라도 그런 주장이 진보가 될 수 없는 것도 여기에는 가까운 미래에는 상식이 될 “선취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해당 사안이 선취성을 가진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퇴행적인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다. 예컨대 반미가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모든 선의 대변자이고 미국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았던 우리 사회에서 반미가 진보적으로 보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하지만, 미국을 증오해서 무고한 미국시민을 학살하는 테러리스트들의 경우를 본다면 반미는 진보가 아니라 증오를 유지, 증폭시키는 매우 퇴행적인 것임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선취성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보다 세분화된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취성 여부”를 따지기 위한 그 하위 기준으로 “과잉/과소의 문제”라는 기준을 제시한다. 거칠게 말하면 해당 사회에서 과잉화된 주장을 재차 반복하는 것은 선취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진보적일 수도 없다.

즉, 미국시민의 무고한 목숨을 목표로 하는 테러리스트 집단에서 반미는 분명히 과잉이기 때문에 반미는 전혀 선취성이 없다. 즉, 이 해당 사회에서 반미는 진보가 아니라는 말이다. 반면, 미군이 시민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도 변변한 조사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던 우리 사회에서 반미는 엄청난 과소였고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의 반미운동은 선취적이며 진보적이다.

국내의 자타칭 진보인사인 진중권 씨가 효순, 미선의 영정을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걸었다고 비난했던 것은 이 사람이 우리 사회의 과잉/과소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 성원 중 일부에게 반미는 과잉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 전체로 보자면 반미는 분명히 과소였다. 다른 나라 같으면 여중생 사건은 초기부터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몇 달이나 지나서야 겨우 쟁점화가 되었을 뿐이었다는 것이 그 명백한 증거이다.

물론 2005년 현재까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반미가 과소인지는 더욱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따로 쓸 기회가 있겠지만, 대략 본다면 일반적인 반미 감정은 과소단계를 지났으며, 각론에 있어서 미국에 대한 비판 의식을 본다면 여전히 과소의 단계라고 보여진다.

일반적으로 노동운동도 그 자체로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경향이 있지만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니다. 칠레의 아옌데 정권 때 정권 흔들기 용으로 자본가의 유도한 노동자의 파업은, 파업 자체가 항상 진보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90년 대초 영국 한 군수회사의 노동자들이 자신이 실업자가 될 것을 각오하고 회사 폐업을 위한 파업을 한 것은 이러한 퇴행적 파업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우리사회는 분명 자본에 비해 노동 쪽이 취약하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동운동의 선취성이 인정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미래에도 항상 그럴 수만은 없다는 점을 확인하자. 비정규직 문제도 노동운동의 불균형성의 한 예이기도 하다.

강준만은 논쟁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지역문제와 수구신문의 이미지 조작술을 제기함으로써 진보적이 될 수 있었다. 강준만은 정치적으로 중도세력이지만 적어도 이 두 지점에 있어서 강준만은 국내 진보세력보다 더 선취적이고 진보적이었다. 하지만 그가 작년 총선 당시 호남의 지역감정을 이용하려는 정당을 신랄하게 비판하지 못하고, 자신이 그토록 비판하던 감정적 이미지 덮어씌우기 방식으로 한 정치인을 매도하기 시작할 때 그는 더 이상 선취적이지도 진보적이지도 못하게 되었다.

강준만의 이러한 몰락은 정치에 관한 한 우리사회가 아직도 증오의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보세력이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중도세력을 비판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수구세력의 이미지 덮어씌우기와 다른 차원으로 진보세력을 비판하는 중도세력을 보기 힘들다. 수구세력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증오만을 먹고 산다. 우리 사회의 건전한 정치토론은 과소이며 감정적 찌꺼기 배출로서의 정치토론은 과잉이다. 따라서 이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일체의 정치적 주장은 근본적으로 선취적일수도 진보적일 수도 없다.

이외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러 과소/과잉의 불균형이 곳곳에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신체적 차이를 우스갯거리의 소재로 삼는 것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으며, 어린이, 청소년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도 그 한 예가 될 수 있다.

진보란, 선취성이란 이처럼 거대한 담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곳곳의 자질구레한 문제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과잉/과소”라는 기준은 거시담론이 미처 포괄하지 못한 영역을 볼 수 있는 좋은 수단을 제공한다.

지난 90년 대 북한의 동포가 기아에 허덕일 때 진보세력이 아니라 종교단체에서 가장 선도적으로 북한돕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우리 사회 진보세력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진보세력 내 한 그룹은 북한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서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으며 다른 그룹은 북한이 기아에 허덕인다는 것을 북한을 깎아내리려는 수구세력의 여론몰이로 판단하여 이 운동에 적극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에 대해 과소와 과잉만이 있었던 것이 과거 진보세력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것조차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북한 증오” 과잉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우리 사회의 “북한 증오”가 과잉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하고, 우리 사회의 평화주의세력이 과소라는 것도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 내부의 과잉, 과소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진보세력의 주장을 입맛대로 취사선택하려는 수구언론이 신문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노동조합 비리에 접해 민주노동당이 격렬한 비난을 하지 못한 속사정도 사실은 이러한 전반적인 과잉/과소의 문제점을 고려했던 것이라고 할 때, 균형잡힌 태도가 필요하리라고 보여진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지 한 가지 잊지 말 것은 다른 정치세력과 마찬가지로 진보세력도 그 내부에서 배타적인 편가르기가 과잉일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극단적 배타성만을 내세운다면 이는 바로 그 때문에서 선취적일수도 진보적일 수도 없는 것이다.

* 사실, 진보성, 선취성이 아니라 과잉/과소라는 기준틀을 제시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절대적 진보”라는 것을 상정하기 힘든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해서 “선취성”이 제기하는 진보에 관한 미묘한 문제에 대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 독자 논설위원
 
* 필자의 홈페이지 안내 http://www.geocities.com/turnover2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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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5/02/22 [10:51]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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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파판결 2005/02/26 [00:01] 수정 | 삭제

  • 친일과 쿠데타 부정부패비리로 쌓은 재물과
    피묻은 권력으로 호강하던 그 때 그 사람들
    아직도 이 세상이 제 넘들 꺼라 착각하면서
    국민의 눈과 귀를 막으려 하네

    영화는 가위질 노래는 벌금형
    패러디 만평에 사진에 댓글까지 검열하시고
    지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멋대로 재단하며 깐죽거리네

    삽질 좀 하지마 그 때 그 사람들
    그런다고 더러운 너희들
    호시절이 다시 돌아오진 않아

    이젠 좀 사라져 그 때 그 사람들
    세상은 이미 그 때 그 시절이 아니야

    [여당은 당선무효-야당은 벌금형]
    [기막힌 정치재판 그이름 선거재판]
    [돈은 풀고,입은막는 국민정서무시한재판]
    [여당,초선,개혁의원에 집중된 판파의혹]
    [대통령장인을 빨갱이라고 해도 괜찮고,야당대표 비난하면 유죄]
    [억대골프내기도 무죄라고 우기는 세상]
    [영화도 멋대로 가위질하는 재판]

    아~슬프다.

  • 동감 2005/02/23 [21:14] 수정 | 삭제
  • 우리 함께 '진보는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고민에 한번 빠져 봅시다!
  • ^^ 2005/02/23 [17:28] 수정 | 삭제
  • 가끔 보수가 어떤 것이고 진보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뒤집기님같은 분들이 '진보'에 대해서 논하는 글도 보곤 한다. 읽어보면 나름대로 재미있는 글도 있고 유익하다고 느끼는 글도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다른 것은 없다.
    진보에 대한 정의나 구분짓기가 우리의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이건 진보고 이건 보수.... 이렇게 정의 내리고 구분짓는다고 해서 피폐해진 삶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 스스로 정의를 부르짖고 억압과 소외의 틀을 부정한다고 해서 '진보세력(?)'이라고 불려지면 뭣 하나?
    나의 생각과 행동이 인권과 반전, 반핵, 그리고 차별받지 않는 비정규직을 향해 있어 '진보'라고 구분된다고 의미있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의미있는 것은 아닐까?
    이건 진보이니깐 의미있고 저건 진보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거라고 생각된다.
    진보라는 이름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과 행동이 민중과 함께 맞닿아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진보'로 불리든 '보수'로 불리든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며 관념적 문제일 뿐이다.
    지적 유희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삶이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뒤집기님의 '진보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에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진보는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고민에 한번 빠져 볼랍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빠져 보시겄습니까? ^^
  • gjgj 2005/02/22 [22:00] 수정 | 삭제

  • 강준만이 열우당을 비난하는것은 여전히 그의 지성인 날카롭다는 증거이다

    조기숙 김수진 김재홍

    이런 쓰레기들하고는 급이 다르다는 증거이다.
  • 레인맨 2005/02/22 [20:58] 수정 | 삭제
  • 이시대 진보란 과연무엇일까..?

    이시대 진보란 과연무엇일까..? "자기만의 진보라는 착각은 어떻게 해방되어 지는가"라는 글쎄님의 숙제를 풀사람의 글을 보고 일단 네이버에서 진보를 검색해봤더니

    진보란 "진ː보 (進步) [명사] [하다형 자동사] [되다형 자동사] 사물의 내용이나 정도가 차츰차츰 나아지거나 나아가는 일. (비슷한말) 향상(向上). 라고 정의되어 있으며 반대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보수"가 아닌 "퇴보" 라고 정의하고 있었다 .

    한국의 진보관련 논객과 단체들 이루 헤아릴수 없이 진보를 사칭하고 참칭하는 집단이 있는것 같다.

    그리고 요즘 한끗발 날리는 튀고싶어 환장 아해 진중권 이애도 죽은 박정희 무덤에 침을 내밭고 화려하게 진보논객으로 데뷔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대표논객으로 대접받고 활약하고 있으며 어느정도 진보키드까지 양성하고 일부 극소수 철없는 꼬맹이들이 추종하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다...

    진보란? 약한자에게 약하고 강한자에게 강한 사회정의를 위한 사상과 집단을 진보라고 한다고 정의도 하는것 같다...이외 수없이 각종 진보논객들이 진보를 지들 꼴리는대로 진보를 정의하고 있는바, 나는 일단 국어사전에서 정의한 진보를 기준으로 진보론에 관한 썰을 풀어 보고자 한다..

    작금 한국의 진보논객들 그중 진보를 참칭하고 있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을 한번 살펴봐야 하지 않나 싶다..

    이친구들의 진보론의 기저는 사적유물론에 기초한 칼맑스의 사상과 철학으로 무장되어 있으며 세상을 바꾸겠다고 가열차게 외치고 있는것 같다..

    그런데 이친구들의 진보관련 글들과 활동상황을 보면...약한자의 권익을 위한 투쟁과 활동방향은 높이 평가 할 수 있으나...국어사전에사 말하는 "진보" 즉 국어사전에 정의한 앞으로 나아감은 전혀 아닌것 같다..

    왜냐면 작금은 20년전 엘빈토플러가 말한 제3의 권력을 창출하고 있는 정보화 시대가 도래 되었버렸다는것이다 이런 펀더멘탈이라 할수 있는 마뉴엘 카스텔의 정의하지 않더라도 한국사회는 누가뭐라해도 네트워크 사회로의 인프라와 온오프 컨턴츠에 의한 생산과 활동 그리고 여가 활동들을하고 있다. 즉 한국은 세계 어떤 나라보다 급격하게 정보의 혁명 네트워크 사회가 이미 되었고 고착화 되다 싶이 전개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를 참칭하고 있는 이친구들은 시대의 변화에 한참 덜떨어진 일테면 쌍팔년도 방식보다 더 못한 19세기 산업혁명 전후시대에 시초되었던 칼맑스의 유물론에 의한 자본론의 기저에 의한 사상과 사고의 민중 민족 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는것 같다..

    나는 이친구들의 이런 사상과 행위가 나쁘다는것이 아니다..아니 오히려 더 지지한다 하지만 문제삼고자 하는것은 이친구들의 철학과 원칙 활동방향은 지지하지만 이친구들은 너무 과도하게 칼맑스의 사상과 철학과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재단 하는것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친구들은 이런 사상과 철학을 진보라고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더 심각한 문제는 이친구들은 한국의 진보를 과다선점 대표를 자위하고 자칭하며 다른이들의 사고들은 무뇌아적으로 세뇌되었다고 질타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뿐만 아니다...지난과거 지향적인 부관참시형 논쟁과 논의들 그리고 슬픔과 분노는 강하지만 정보화 멀티미디어 시대에 걸맞는 업데이트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하는꼴을 보노라면 지난 사상과 사고들을 현대로 이끌기 위한 힘든 진보화에 대한 의지는 있어 보이는데 작금 21세기 기술진보 정보화 시대를 이끌기 위한 진보 즉 나아감은 절대 부족한것 같다.

    어쩌면 이친구들은 이시대를 이끌기 위한 진보 즉 나아감의 기술과 인문의 패려다밍에 대한 능력과 개념 조차도 성립되어 있는것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나는 끊임업이 갖곤 하였다..?

    왜 그럴까..? 이쪽동네 친구들이 왜 지난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여러 이유중 하나 나는 이친구들이 자본을 너무 미워하고 적대시하다 자본이 안따르는 배고품에 따른 자본권력에서 자의반 타의반 배제된 유능한 인재들이 궤에서 떠나 버린 능력없는 자들만 남아 있지는 않는가를 가끔 생각한다. 이친구들 이런소리 들으면 무쟈게 기분나쁠것이다..그러나 내가 보기엔 정말 그런것 같기도 하다..이쪽 진보계열 친구들을 불가근 불가원 하면서 지난 20여년간을 사귀어 봤기 때문이다..소위 진보진영에서 직업적으로 운동하는 친구들은 더 이 정도가 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혹할정도의 진보진영 친구들에대한 나의 평가는 어떤 계기가 되어 이땅의 수많은 진보계열 운동한다는 친구들을 최근 다시 만나보고 이친구들에게서 한결같이 이걸 느낄수 있었다 그게 뭐냐면..참 기분 나쁜 소리일지 모르곘지만, 아니 기분 나뻐도 된다..쓴소리 이니까 새겨 들었으면 한다..

    자본을 너무 적대시 한 나머지 자본이 말라버렸을뿐만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본에 너무 목이말라 목이 너무 길어져 슬픈 사슴 같아 보였다는 것이다.

    진보진영 친구들 아무리 나의 뜻이 옳고 바르다 하더라도 뜻을 모르고 힘을 길려 나의 뜻을 펼치러면 인적자원등등 여타의 기재중 자본이 반드시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데 이친구들은 이 자본과는 자의반 타의반 너무도 멀리 있지 않나를 나는 살펴볼수 있었다..진보 제대로 하려면 자본축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진보를 사칭하고 참칭하는 이친구들은 시대의 아픔을 자기들이 너무 확대재생간 가공하여 무거운 짊을 만들어 선각자적이고 깨어있는 시대의 아픔을 너무 많이 스스로 과대대표하고 책밈지는것 같기도 하다

    작금이 무슨 파쇼시절도 아니고 구시대 쌍팔년도 시대도 아닌데 탄압과 핍박의 울타리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의 시각에 벗어난 이들을(다중) 개량주의니 수정주의니 삥키칠을 하면서 자기들만 오리지날 이라고 지난 낡은 이분법벅인 사고와 안경으로 손쉽게 재단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친구들을 보고 참으로 얼척이 업고 가엾기도 하다 ...이친구들의 쓰는 단어들을 보노라면..지극히 똑똑바보형 이념단어들을 씨불거리고 사고와 활동방향들이 함몰되어 있다는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금의 민중사고의 민중이 아닌 다중은 오히려 이런 골수 진보세력들보다 더 진보적인 사고에 기반한 활동들을 아무런 부담없이 하고 성취한다는 것이다...어쩔땐 진보진영 친구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진보대접좀 해주세요라고 구걸하는것 같기도 하고 진보 열패감에 사로잡흰 친구들 같기도 하다.

    어찌보면 똑똑 바보가 되어 자기들만의 진보를 과다대표하고 선각자적인 진보의 지도가가 되어 권력을 사취하기 위한 숨은 그림자의 기저가 사고 밑바탕에 흐르른것은 아닐까...? 지난 민주화 시대 순수한 열정의 선배 진보선배들(민주투사와 노동운동가들이 )쌓은 금자탑을 핱고 폄하시키고 있는것은 아닐까.....?

    요즘 진보 진영에 있는 친구들 묵묵히 끊임없이 아무댓가 없이 진정성을 훼절하지 않고 운동하는 친구들이 적은것 같다는 것이다

    요즘 진보친구들 심하게 말하자면 각종 사이비 진보아해들이 있는바 그중 이 덜떨어진 이친구들은 지난 시절의 어눌한 선배 진보세력들이 가지고 있던 순수한 열정과 눈물 사람냄새가 너무 멊는것 같기도 하다..어쩔땐 어히려 저 더러운 수구들보다 더 짐승냄새가 고약하게 난다는 것이다..

    이거 쓰다보면 끝이 없을것 같고..쓰다보니 되지도 않는글 같다. 그리고 내가 술을 한잔 한지라 대가리가 알탈탈하며 다른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이만 적고자 한다...

    낭중에 좀더 심도있는 토론을 하도록 하자...이문제는 글도 좋지만 오프토론도 괜찮을것 같다 /끝. 레인맨/

  • 글쎄 2005/02/22 [12:29] 수정 | 삭제


  • 숙제 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