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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한국어의 한 정점(頂點)을 만나다
숨막히게 아름다운 시집, 이성복 시인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이태경   기사입력  2004/10/14 [17:03]
20대 초·중반 무렵 나는 아름다움에 목말랐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자 허다한 시집과 소설책 사이를 순례했고, 거장으로 추앙받는 영화감독들의 영화들을 눈이 아프게 감상했다.
 
그러다가 이성복이 청년시절에 쓴「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운명처럼 만났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시(詩)들로 이루어진 이 시집은 1980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간행한 이성복의 첫 시집이었다.
 
▲시어를 통해 한국어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린 이성복 시인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 문학과 지성사(1980)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만난 것은 내게 기쁨의 원천이자 고통의 시작이기도 했다. 이 시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쉽사리 작품속으로의 침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파격적인 시 문법의 파괴와 논리적 인과관계를 결여한 시어들의 범람은 작품들에 대한 몰입을 간단(間斷)없이 방해했고 독해를 한없이 더디게 만들었다. 섬뜩하리만치 생생하고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이미지들의 출몰은 정서적 불편함을 초래하기도 했다.
 
작품들을 여러번 읽어도 시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명징하게 알 수 없었기에 답답함은 커져만 갔고 급기야는 그 답답함이 고통에 이르는 지경이 되었다. 흡사 초현실주의풍의 그림 앞에 선 자의 막막함이 나를 감쌌다.
 
그런데 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거듭 읽어갈수록 이상하리만치 슬픔과 누추함이라는 정서가 내 마음속 깊숙이 똬리를 틀었고, 아픔과 고통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혜엄쳐 다녔다.
 
그렇다! 그런 정서적 충격은 일찍이 다른 예술작품들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어떤 것이었다. 세상의 비참과 우울을 밑바닥까지 경험하고 그 추레한 기억들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자의 시선은 어느새 나의 것이었다.
 
도대체 시인(詩人)은 어떤 존재이기에 이리도 아름다운 시편을 쓸 수 있었을까?
 
시인은 먼저 자신의 상처, 혹은 역사 및 사회의 상처를 직시하고 온 몸으로 그 상처를 감싸 안는다.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고열을 겪은 후에 빛으로 정제된 언어는 시인의 몸을 뚫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시인은 폐허가 된 몸을 이끌고 또 다시 다음 상처를 만나러 간다. 언어는 시인의 몸을 통하여 육화되고 그들의 육체를 갉아먹으며 성장한다.
 
그리하여 개인과 사회, 역사와 현재, 보편과 특수, 성과 속, 정상과 병리(病理)라는 이항대립적이며 상호교호적인 요소들은 시인의 육체와 정신을 관통하여 힘껏 날개짓하며 날아오른다.
 
날 것의 시가 지나간 자리에 언어의 분수(噴水)가 솟아오르고 인간의 정신은 한층 고양된다. 거기서 자연과 분화되는 정신이 출현하고 사물에 대한 인식이 시작된다.
 
이른바 문명의 출발이다.
 
시인(詩人)이 시를 쓰는 것은 무엇보다 시인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고 위무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시인이 쓴 시를 읽으면서 내면의 상처를 다스리고 병든 영혼을 소독(消毒)한다.
 
좋은 시집이 시인과 독자의 상처를 보듬고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는 그 전범(典範)이라 할 것이다.
 
또한 좋은 시는 모국어를 살찌우고 그 지경(地境)을 넓히는 기능을 한다.
 
이 시집에 수록된 〈1959년〉·〈정든 유곽에서〉·〈그 날〉·〈口 話〉·〈어떤 싸움의 기록(記錄)〉·〈모래내, 1978년〉·〈出埃及〉·〈편 지〉·〈금촌 가는 길〉·〈세월에 대하여〉·〈그해 가을〉 등의 시(詩)는 한국어가 이를 수 있는 아름다움의 한 정점을 보여 준다.
 
시(詩)를 말의 사원(寺院)이라고 할 수 있다면, 시인 이성복은 번제(燔祭)를 집전하는 제사장에 해당한다. 이성복으로 인해 한국어의 아름다움은 그 높이를 한뼘 더하게 된다.
 
인간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을 만나게 해 주고, 자연의 본성인 신성을 보이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라고 한다면 시인 이성복이야말로 예술가의 임무에 충실한 시인이다.
 
사막이 늘어나는 이 시대에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를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타인의 피흘리는 내면의 상처와 아픔을 느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지 절감할 때, 존재가 비존재가 되는 그 질적변환의 아득함을 느낄 때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어김없이 내 호출에 응하게 될 것이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라는 시집이 내 인생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시집을 읽은 이후 모국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내가 비로소 한국어의 아름다움에 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집으로 하여 문학의 죽음이 운위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문학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음을 믿게 되었다. /  편집위원

* 글쓴이는 <대자보> 편집위원,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 사무처장, 토지+자유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블로그는 http://blog.daum.net/changethecorea 입니다.
대자보 등에 기고한 칼럼을 모은 [한국사회의 속살] [투기공화국의 풍경]의 저자이고, 공저로는 [이명박 시대의 대한민국], [부동산 신화는 없다], [위기의 부동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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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10/14 [17:0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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