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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그먼 '부시죽이기', 조선의 '盧죽이기'
크루그먼 부시와 네오콘 비판은 배설효과용, 정밀분석해야
크루그먼의 신간 <대폭로>, 수구언론의 학문사대주의 비판
 
황진태   기사입력  2004/01/06 [01:17]

1994년, 일찌감치 아시아 경제 위기를 예견하여 미 경제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국내에선 ‘경제학의 향연’ 등의 저서로 널리 알려져 있는 노벨경제학상 0순위, MIT경제학과 폴 크루그먼 교수의 신간이 발간됐다. 신간 ‘대폭로’는 그가 2000년 1월부터 2003년 1월까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을 중심으로 포천(Fortune)지와 슬레이트(Slate)에 그간 기고했던 칼럼을 묶은 칼럼모음집이다.

기자가 여기서 국내 발간 된지 열흘이 지난 ‘대폭로’에 대한 책 내용을 리뷰하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다만 이 글에서 기자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미국의 주요 매체인 뉴욕타임스를 통해서 부시대통령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인 ‘폭로자’ 폴 크루그먼의 저서 ‘주변’을 삐딱하게 훑어보면서 본서에 대한 독자들의 독서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시비를 걸었을 뿐이다. 먼저 열흘 전 대폭로에 대한 ‘비만언론들’의 리뷰를 ‘다이어트 비판’을 함으로써 ‘대폭로’에 삐딱하게 접근하자.

조선일보의 허접한 <대폭로> 리뷰를 폭로한다

▲조선일보 12월 19일자 기사, 누가 미국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     ©조선일보
우선 ‘대폭로’에 대한 12월 19일자 조선일보의 리뷰를 살펴보자.

“전체적으로 이 모음집에 게재된 칼럼의 내용은 거의 다 "부시 죽이기"로 표현될 만큼 신랄하다(미국 대통령선거가 내년인가?). 칭찬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 책 한 대목을 인용해보자. "동료 학자가 부시를 칭찬하는 칼럼을 한두 개라도 써보라고 세차게 권했다. 나는 되물었다. '무엇을 칭찬한단 말인가?'" 심지어 그는 경기가 회복하는 듯하다가 다시 침체되는 '더블딥 현상' 곧 'W자형 침체'가 나타나는 것을 두고 부시의 미들네임이 'W'임을 상기시키고 있을 정도다.”(조선일보 12월 19일자 윤창현, 명지대 경영무역학부 교수)

조선일보의 리뷰를 통해서 대폭로가 어떠한 책인지는 독자들도 대충 파악했으리라 본다. 웃기지 않은가. 식상한 얼굴이지만 정말 조선의 낯짝은 두껍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언제부터 조선이 ‘부시죽이기’에 관심을 갖었다고 그간 조선의 노골적인 친미적 행태는 눈을 감고, 이렇게 찬양조로 마냥 듣기 좋은 주례사 비평을 할 수 있는가. 혹, 조선의 ‘노무현죽이기’에 대한 향수를 크루그먼을 통해서 찾으려는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크루그먼의 ‘부시죽이기’와 조선의 ‘노무현죽이기’는 엄연히 급이 틀리다. 기자가 보기에는 오히려 조선의 노선과 대조되는 크루그먼의 저서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으로 리뷰를 써야 되지 않아야 했을까 생각한다. 혹시 그간 조선 휴지에 닦인 프랑스의 기 소르망이나 피에르 리굴로처럼 조선이 폴 크루그먼을 써먹을 수 있을 지 모른다는 가능성으로 주례사 비평을 쓴 것일까.

조선의 부름을 받은 윤창현 교수는 이어서 “미국은 이라크전에서 승리하고 후세인을 체포하고 경제는 다시 회복 기미를 보이고 있다. 우리 눈에는 그런대로 잘 굴러가는 듯한 미국이 이 정도라면 언뜻 보기에도 별로 잘 굴러가는 것 같지 않은 우리나라의 ‘뒷모습’은 어느 정도일까?”라며 어떡하든 조금이라도 참여정부를 씹으려고 안달하고 있다.(이 또한 ‘반노’내지 ‘비노’로 찍힌 기자와 논객들의 씹는 것과는 급이 틀리다.) 윤 교수가 말하는 “우리 눈”은 조선독자만의 눈인 듯 하다. ‘대폭로’에서 크루그먼이 비판하는 네오콘의 문제점 부분은 읽지도 않고, 리뷰를 쓰셨는가. 이거 리뷰 쓰기의 기본자세부터가 틀려먹은 게 아닌가. 아무리 꼴보수라도 일단 ‘대폭로’를 읽고서는 -독자의 정치적 성향이 어떠하든 간에- 크루그먼은 ‘미국은 이라크 전을 승리했다’고 옹호할 만한 시각이 아님을 개나 소나 알 수 있다. 윤 교수의 눈은 미국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그들의 눈을 닮았나 보다. 네오콘을 비판한 저자의 시각에서 네오콘의 시각을 발견하니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정말 미국이 그렇게 잘 굴러가 보이는가.

더욱 웃긴 것은 정작 윤 교수가 살고 있는 한국에 대해서는 -‘대폭로’를 읽으면서 보여준 타국, 미국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이- “언뜻 보기”로 치환되어 조선이 좋아하는 참여정부 비판(혹은 비난)에 물타기를 감행한 것이다. 책 자체에 대한 독해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한국까지 들먹이고 있는가. 혹, 책에 대한 독해에 자신이 없어서 조선의 입맛에 맞는 정부 씹기를 감행한 것인가. 윤 교수의 글은 책에 대한 진지한 독해도 못했으며, 정국현안에 대한 어설픈 인식까지 곁가지를 친 이도 저도 아닌 참으로 부실한 리뷰가 아닐 수 없다.        

2년 전 기사도 잊고 찬양하는 한경의 리뷰를 폭로한다

“그는 9.11 테러가 이미 예견된 재난이었다며 진짜 위험한 것은 "악의 축"이라고 이름붙인 외부 테러집단이 아니라 미국 내 "지도력의 실패"라고 꼬집는다. 성조기 뒤에서 미국인의 애국심을 악용해 자신들의 잇속만 차리려 하고 전 세계인구의 5%밖에 안되는 미국인들의 지도자이면서 세계를 통치하려는 신보수주의자들이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한국경제신문 12월 20일자 고두현 기자)

▲한국경제신문 12월 20일자 기사     ©한국경제신문
한국경제신문(이하 한경)의 고두현 기자도 ‘대폭로’에 대한 리뷰를 다음과 같이 썼다. 그나마 조선에서 윤창현 교수가 “미국은 이라크전에서 승리”하여 “그런대로 잘 굴러가는 듯”하다는 라식수술이 요구되는 시각에 비해서 대폭로를 읽은 고두현 기자는 “"악의 축"이라고 이름붙인 외부 테러집단이 아니라 미국 내 "지도력의 실패"”이고, “세계를 통치하려는 신보수주의자들이 근본적인 문제”라며 조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책읽기를 보여줬다.

그렇다고 고두현 기자의 리뷰가 마냥 OK 할 수는 없다. 한경이 그간에 즐겨 폴 크루그먼의 칼럼을 번역해서 종종 실었기 때문인가. 왜 크루그먼에 대한 문제점은 여기서 짚고 넘어가지 않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래서 고 기자 또한 윤 교수와 같은 주례사 비평의 한계를 못 넘는다. 고 기자는 “그(크루그먼)는 ‘거짓말쟁이’ 부시가 당선된 이후 더 기승을 부리는 정경유착은 엔론사태, 딕 체니와 핼리버튼사, 칼라일그룹과 부시의 고리를 타고 ‘악취를 풍기고 있다’고 폭로한다”고 리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크루그먼이 이 악취와 무관한 고고한 향기일까.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한경의 보도기사는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정경유착을 비판해왔던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학 경제학과 교수가 한 때 엔론의 자문위원으로 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워싱턴타임스는 20일 엔론의 마크 팔머 대변인의 말을 인용,"크루그먼 교수가 1999년 엔론 자문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고 확인했다. 실제로 크루그먼 교수는 활동대가로 엔론으로부터 5만달러를 받았다고 신문은 전했다.”(한국경제신문 2002년 1월 22일자)

기자가 알기로는 이러한 엔론의 자문위원으로 크루그먼 교수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아직 그의 해명을 제대로 들어보질 못했다. 고 기자는 아무리 2년 전 기사지만 타 신문사의 기자보다도 자사의 기사에 신경을 못 쓸 수 있는가. 크루그먼의 목소리가 분명 미국에서 소중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맹목적으로 크루그먼의 주장에 마냥 ‘옳소’로 반응하는 것은 사대주의의 잔가지일 뿐. 기자는 크루그먼이 부시의 정경유착을 비판하기 이전에 엔론 자문위원으로 활동한 것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비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작 필요한 ‘대폭로’는 이러한 크루그먼의 엔론자문위원 활동에 대한 해명이 아니었을까. 여기서 그저 해외 석학이라면 앞,뒤 못 가리고 숭상하는 사대주의가 짜증날 뿐이다.

국내에 부풀려진 크루그먼의 진보성향 거품을 걷어내야

아직까지도 한국에선 프란시스 후쿠야마를 자유주의자의 전형으로 받아들이는 사대풍조가 만연해있다. 후쿠야마는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옹호자로 미국의 보수 이데올로그다. 한때 그의 저서가 국내에서 돌풍을 일으켰었는데 그의 저서 중에서 ‘트러스트’를 일부만을 상기해보자. 그 책에서 –6,70년대도 아니고 80년대- 한국의 대부분의 노동자는 퇴근하자마자 바로 귀가하는 스타일로 표현하는 어이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기본적인 조사방식부터가 허접한 일반화를 감행하여 가히 학자적 자질에 의심이 갈 수밖에 없다. 한국에 대해서 부실한 연구를 했던 그의 주장들이 왜 한국에서 떠받들어지는 이유가 대체 무언가. 학자 자신의 신뢰(트러스트)가 바닥을 기는 데 무슨 저서 이름을 ‘트러스트’라고 붙였는지… 어이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외 보수,신자유주의 학파의 학자들에 대한 사대주의가 진보성향에서도 혼돈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혼돈의 기류 중 하나가 진보성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진보로 왜곡되어 이미지화된 해외 석학이 크루그먼이다.

▲폴 크루그먼 교수의 대폭로     ©세종연구원
크루그먼은 대폭로에서 “나(크루그먼) 자신이 판에 박힌 진보주의자, 심지어 사회주의자로 비난 받고 있는 모습을 종종 발견한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판에 박힌 진보주의자들은 나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잡지는 나의 친(親)자본주의적 성향에 대한 공격, 심지어 커버스토리로 다루기까지 했다. 랠프 네이더[Ralph Nader: 미국의 변호사로 소비자 운동의 지도자]가 세계화를 공격하는 것을 내가 비판하자 그가 내게 보내 온 분노에 찬 편지를 나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내가 끝에 가서는 우익 진영을 공격하는 글들을 상당히 자주 쓰게 되고 말았다면, 그것은 우익이 현재 집권하고 있으며 그것도 서투르게 집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정책들이 엉성하고 무책임하다는 것만이 아니라 미국 지도자들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지식인들보다 훨씬 앞서서 부시 정부의 뻔뻔스러운 부정직을 꼬집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진보성향 지식인인 노엄 촘스키는 “전쟁기의 미국 언론을 두고서 '치어리더cheerleader'의 역할로 전락한 지 오래라고 비꼬았고”, 미국에 체류 중인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에 따르면 “「뉴욕타임즈」나 「워싱턴포스트」, 「엘에이 타임즈」 같은 신문의 논설이나 칼럼에는, 물론 미국의 전쟁수행 과정의 문제점이나, 부시 정부 내 매파들의 작전개념, 이라크 점령과 복구 과정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글이 실린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의 지식인들에게만 관심을 끌 뿐, 일반 대중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의 주류 매체에서 진보적 지식인의 대접이 어떠한가하면 “전쟁에 반대하고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 생각을 가진 지식인들이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공간은 극도로 축소되었다. 촘스키의 경우 수년전 NBC와 인터뷰 한 적이 있으나, 이번 이라크 전쟁 이후에는 방송 매체에 나타난 적이 없으며, 그보다 훨씬 온건한 학자나 지식인들도 공영방송인 C-Span 이나 NPR 토론 프로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등장하는 법이 없다. 아마 보통의 미국인은 물론이고, 대학교육을 받는 사람들 중에서도 촘스키가 누군지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올해 내내 북한 핵 문제로 그렇게 방송에서 떠들썩해도 커밍스Bruce Cumings 같은 학자들이 인터뷰에 등장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면서 실상 미국에서 진보적이다고 분류되는 지식인들은 매체를 등에 업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김동춘,미디어독재 미국의 미디어와 지식인,격월간 아웃사이더 16호) 청상 미국에서 노엄 촘스키를 만나려면 한국에서처럼 인터넷을 통한 Z-MAGAZINE(http://zmag.org)에 접속하는 방법 뿐인 것이다.

이러한 보수주의적 성향의 학자들에 대해서 특히 새뮤얼 헌팅턴의 경우에 한국에서는 학문사대주의의 극치를 보여주었는데, 진보성향에서도 한국독자들은 ‘돌다리도 두들겨 본다’는 필터링 사고가 필요할 것이다.

네오콘을 비판하는 크루그먼의 뉴욕타임스 칼럼은 그저 배설효과?

폴 크루그먼은 뉴욕타임스 칼럼을 통해서 부시의 신보수주의와 그 싱크탱크인 네오콘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이 또한 그저 그의 칼럼이 배설효과로 그치지는 않는가 하는 강한 의구심이 든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뉴욕타임스가 미국의 타 신문에 비해서 진보적이다고 생각하지만, 다음과 같은 프레시안의 김재명 분쟁전문기자의 분석을 본다면 네오콘을 비판한다는 폴 크루그먼의 칼럼이 마치 조선의 ‘조선일보 못참겠다’와 같은 ‘배설효과’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 언론계의 유대인 파워도 막강하다. 영향력 면에서 2대 신문이라 할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유대인 소유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두 메이저 언론사는 성향 면에서 <뉴욕타임스>가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지만, 친 이스라엘 논조라는 측면에선 큰 차이가 없다. 중동문제를 단골로 쓰는 유대인 칼럼니스트들 때문이다. <뉴욕타임스>의 윌리암 새파이어, <워싱턴포스트>의 찰스 찰스 크라웃새머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지면을 통해 기회 있을 때마다 이라크 침공 나팔을 불어댔고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를 비난해왔다.”(유대인 네오콘에게 휘둘리는 美 대외 강공책, 김재명의 뉴욕통신, 프레시안, 2003년 11월 29일자)

결국은 책의 대한 판단은 독자 몫

이렇게 삐딱하게 ‘대폭로’에 대해서 ‘소’폭로를 했지만 이러한 기자의 변이 얼마나 독자들에게 영양가 있는 독서 나침반이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거듭 말하지만 진보든 보수든 그저 해외 석학이면 거품을 물면서 논문을 인용하고, 찬양하는 사대주의는 벗어나야 함을 백번 천번 강조하고 싶다. 여기서 혹시 기자의 ‘대폭로’ 리뷰가 워낙 삐딱한 논조여서 폴 크루그먼의 ‘대폭로’가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라고 생각할 독자가 있을 까 해서 노파심에 말하지만 9-11테러 당시 새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시류에 편승하여 읽어 본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꼭 읽길 권하고 싶다.

분명 크루그먼의 말은 새겨들을 만한 건더기가 많다. 경제학자답게 예의 논리적인 그의 분석은 어쩔 수 없이 부시정권을 향해서 비판의 칼날을 드리 내밀고 있다. 이는 이즘(ism)을 기반으로 한 비판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진보든 보수든 꼭 읽을 만한 책이다. 크루그먼은 ‘대폭로’에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우리 지도자들의 대담한 이상, 기량, 그리고 도덕적 명료성을 찬양하고 있었던 때에 나는 혼돈, 비효율성, 그리고 부정직을 찾아냈다. 그것은 특히 9월 11일 이후 몇 달간은 인기 있는 관점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내가 옳았는가? 그것은 이 책을 읽고 독자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고 말했다.

기자의 눈엔 ‘대폭로’는 근래 드물게 읽은 만한 몇 권의 책 중 하나였다. 일단 독자들이 직접 ‘대폭로’를 읽고서 크루그먼 말처럼 “독자 스스로 판단”하는 방법 밖엔 없는 듯하다. 브레이크뉴스는 열려있다. 독자들의 새로운 리뷰를 기대한다./사회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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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1/06 [01:17]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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