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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교수의 '송두율교수 탄원서' 유감
국가보안법이란 체계의 과잉, 시민사회의 생활세계의 과소
 
황진태   기사입력  2003/12/27 [11:16]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Habermas)는 그의 의사소통이론에서 사회를 ‘체계’와 ‘생활세계’로 나누어 보았다. “생활세계란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의해 조정되고 규범적으로 통합된 영역으로서 개인의 사회화를 담당하는 사적 영역 및 담론적 공론형성을 담당하는 공공영역으로 구성되며 체계란 목적합리성에 의해 주도되고 돈과 권력을 매개로 사적인 경제 체계 및 공적인 행정 체계로 구성된 영역이라고 한다.” 독일이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시민혁명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뒤늦게나마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시민사회를 형성하였기에 독일에서 ‘체계’와 ‘생활세계’의 두 축을 중심으로 시민사회가 작동되고 있다고 보는 하버마스의 이론은 적합한 듯하다.

생활세계의 과소, 체계의 과잉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20세기의 초입부터 열강들의 침입과 해방 후부터 1950년 한국전쟁(6.25내전), 21세기 초입인 지금까지 분단과 레드 콤플렉스로 인하여 공공영역은 독일의 19세기마냥 협소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즉, 체계의 과잉과 생활체계의 과소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해방 직후부터 미국으로부터의 ‘종속’경제화를 이룩하고, 차관경제를 하는 등 자연히 시민사회의 맹아는 움츠러들고 수동성을 생체화되어 ‘제대로 된’ 시민단체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부터야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유럽사회의 근대적 법치국가의 토대를 이루는 공공영역이 한국에서는 수동적이고, 탈역사화 되었기에 하버마스의 이론을 그대로 한국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다. 철학자 권용혁의 말마따나 “우리에게는 체계와 생활세계의 이분법을 전제하고 그로부터 출발하는 것보다 오히려 강력한 체계로부터 정치적 공공영역의 확립이 (재활성화가 아님) 우선적으로 다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실상 하버마스도 자신의 의사소통이론을 독일의 역사의 ‘일부분’을 토대로 조사했듯이 한국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

하버마스의 탄원서를 읽고 난 후의 씁쓸한 현실목도

▲송두율 교수의 부인 정정희씨와 아들 린씨     ©대자보
최근 송두율 교수의 스승이자 동료학자이기도 한 하버마스가 송두율 교수에 대한 담당 재판장님께 드리는 탄원서를 보냈었는데 탄원서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법치국가적 근본원리들과 합치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는 이 유명한 재판에서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 국가보안법을 다시 한번 적용할 경우 공화국인 한국의 명성이 국제여론 상에서 입게 될 손실을 헤아려 주실 것도 간청 드립니다.”

하버마스가 생각하는 시민들의 역사적 능동성이 내재되어 형성된 “법치국가”라는 용어를 한국에도 여과없이 적용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법치국가적 근본원리”라는 헌법 상의 문구들은 그저 기표로 떠돌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실상(기의)은 헌법 아래의 국가보안법이 체계로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치안유지법으로 시작하여 해방 후 친일청산이 실패되고 친일 관료들을 그대로 이어진 사법체계는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생활세계를 억압하고 있었다. 비단 국보법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법체제에 제국주의적, 시민 억압적인 습속이 남아있어서 이러한 현실에서 홍세화 선생의 말마따나 공화국 담론이 증발 되어버린 한국은 공화국으로서 하버마스가 언급한 “한국의 명성이 국제여론 상에서” 입을 손실도 없을 뿐더러, 공화국이란 단어조차 그저 껍데기일 뿐이다.

한국의 ‘체계’를 잡고 있는 ‘우려’되는 관료들

하버마스가 이러한 한국의 상황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혹시나’하는 생각에서 ‘부득이한 감언이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자도 ‘혹시나’하는 생각에 역사의 긴 흐름을 긍정하며 재판을 지켜보고, 판사를 믿어보려고 한다. 하지만 반세기가 넘도록 억압적인 기제가 내재된 시스템의 습속이란 것을 결코 간단히 무시할 수 없기에 재판 결과에 대해서만큼은 굉장히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나마 세계적으로 저명한 석학의 충언이라면 재판 결과에 영향을 줄 거라 예상하는 사람이 많지만 하버마스의 친구라고 하는 요쉬카 피서(Joschka Fischer) 독일 외무장관이 지난 달에 갖었던 한-독 외무장관 회담에서 송두율 교수에 대해서 언급하자 참여정부의 외교분야 실세인 윤영관 외무장관이 -미국과 협의할 때와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으로- 내정간섭이라는 듯 독일정부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점에서 습속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고, 선진국의 외무장관이 이러한 반응을 받는데 하물며 그 친구라는 하버마스의 말을 재판부가 얼마나 새겨들을지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걸까. 참으로 가능성 없으며 ‘우려’되는 한국의 ‘체계’들이다.

‘차떼기’ 앞에 너무나 공허하게 들리는 헤겔의 국가 중심이란 말들

하버마스의 학문적 계보를 이루는 헤겔은 국가를 구성하는 국가와 시민사회 양대 축에서 국가 중심으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사회는 시민들의 사적이익을 추구하고자 하여 시민사회의 과잉은 혼란과 갈등만을 조장할 우려가 있음으로 객관적이고 공적이익을 추구하는 국가가 이러한 시민사회를 감싸고,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시민사회의 과잉’은커녕 ‘충만’함 조차 겪어보지 못했으며, 국가 중심의 시민사회가 공적이익은 커녕 시민 각자의 사적이익의 규모를 초월한 정경유착, 부패정치를 통하여 사적이익을 공적이익으로 둔갑한 실상을 ‘차떼기’를 통해서 시민들은 똑똑히 알고 있다. 한국에서 헤겔의 말은 80년 대 이후 빨아먹을 것은 다 빨아 먹고 이젠 공허한 방귀소리로 들릴 뿐이다.

생활세계의 확대만이 공화국의 가능성이다

또한 헤겔의 미학관(觀)은 ‘자연은 결함이 있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예술이 필요하다’는 전제하에 자연을 뜯어고치려는 ‘근대개발이데올로기’가 내재되어 있다. 이러한 ‘헤겔의 눈깔’에는 자연을 인간과 상호 동등한 수준에서의 관계 정립이 아니라 인간을 주체, 자연을 객체로 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이러한 헤겔의 개발이데올로기는 좌파와 우파가 갈리게 되는 ‘생산관계’가 아니라 그 이전의 ‘생산력’ 증대 즉, 자연파괴를 도모했었기에 좌파와 우파는 생산력 증대에 공모하는 핑계로 헤겔미학을 남용하였다.) 하버마스가 주장했던 “행위자의 상호이해를 추구하기 때문에 자연과 인간을 대상화, 계량화하지 않”으며 “의사소통적 합리화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기술적 통제를 행하지 않고 사회구성원들의 자유롭고 동등한 의사소통 행위를 장려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좀더 포괄적인 전망을 갖도록 한다.”는 ‘생활세계’는 재차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버마스의 탄원서가 앞으로 재판과정에서 얼마나 실질적인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또 다시 역사를 넓게 긍정하면 국보법 철폐까지 바라볼 수 있는 상징효과는 크다고 본다. 이번 글은 하버마스의 이론을 짚어보았지만, 여전히 이 글의 핵심적인 주장은 통일연대 민경우 사무처장과 아주대 학생들을 풀어달라는 이유와 똑같다. 구시대 유물 국가보안법 철폐다!

국보법이 철폐되어 하버마스의 공공영역의 지평이 한국에서도 확장되어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희망해본다. 그날이 오면…/사회부기자

*따옴표로 인용된 출처는 울산대 철학과 권용혁 교수의 ‘하버마스와 한국’이란 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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